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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두 견해는 예수님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충돌과 갈등을 오래전에 깔끔하게 정리하셨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바리새인과 같은 안목으로 보기에 아직 정리가 안 되었을 뿐,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 확정하셨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음을 위한 사건, 우리가 잘 아는 향유옥합 사건에서 먼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확실히 정리하셨다.

 

향유옥합 사건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두 의견, 두 가지 의가 모든 패를 드러낸 사건이다. 이때까지 비유와 은유로 맞서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의와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의가 향유옥합이 깨어질 때 바닥까지 각자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가치를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는 그리스도가 낭비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은 확고하게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정체성을 확정했고,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로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존재가 아님을 확정하셨다.

 

이처럼 패가 다 드러났을 때. 자기의 운명과 생각도 확실히 결정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가룟유다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의 생각 앞에 분명하게 '그건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가난한 자는 항상 있다'라고 일갈하는 예수님을 보고서 '저 사람은 내가 기대한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또한 확정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어떤 그리스도인지를 가장 먼저 안 사람이 가룟유다인지 모른다. 알았다기보다 사람이 원하는 그리스도가 아닌 건 확실하다는 걸 알았다고 해야겠다.

 

가룟유다에게 가난을 해결하지 않는 그리스도는 한낱 종일 뿐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에게 예수님의 가치는 그저 종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값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그의 유산은 오늘날 뿌리 깊이 남아 있다.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기본적인 개념이 그렇다. 기독교인들은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분명 예수님을 종처럼 여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본질로 보시거나, 육신의 행위를 의롭게 보시지도 않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의 필요는 먼저 아시고 이미 다 주셨음에도 사람은 육신을 본질로 보기에 육신의 영화를 위해 자기가 필요한 걸 하나님께 구하면 도깨비처럼 구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구조를 양심을 가지고 보면 램프의 주인도 지니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자기 필요를 능력자에게 구하듯, 사람도 자기가 필요한 것을 능력자에게 구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가룟유다는 이 구조 안에서 예수님을 봤고,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이런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적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분별은 분명했다. 문제는 온전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것이다. 자기가 가진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과 다른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믿었고, 예수님은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가 아니란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런 그의 기준에 예수님은 특출하긴 하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종과 같았다. 그런데 막판에 예수님은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님을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가룟유다에겐 더 이상 예수님은 소유할 가치가 없는 종이었다. 그래서 팔아버린 것이다. 딱 종의 몸값에.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가룟유다의 인류 최고의 배신 아이콘으로 조롱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가룟유다의 유산을 이어받아 살고 있다. 더 한심한 건 그런 자신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라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 그리고 자녀의 복락과 같은 육신과 세상의 일 뿐이면서 가룟유다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도 예수님을 육신의 재화를 능력으로 구해주는 램프의 지니처럼 여기면서 가룟유다와 자신은 다르다고 믿고 있다.

 

십자가를 진 패배자 예수에게 육신의 성공을 구하는 사람은 가룟유다의 후손

 

그리스도는 가룟유다나 육신의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존재다. 육신이 십자가를 지고 완전한 패자가 된 예수님께 육신의 성공을 바라는 어둡고 모순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구원이라고 한다면 어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인지는 알아야 하는 게 지극히 상식이다. 이런 상식적 접근도 없이 그러 '그리스도'라는 단어만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로 거듭났으니 그 그리스도에게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걸 믿음으로 여기고 사는 건 정말 아니다. 그건 가룟유다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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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부활을 변화를 입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 육신의 변화를 목적으로 믿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거듭난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가 되거나 하늘을 날고 물 속에서 숨쉬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다. 같은 육신인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보다 삶을 이끄는 본성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게 변화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창조목적, 하나님의 말씀(LOGOS, 의도)와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기 전에는 육신으로 육신의 소망을 추구한다. 이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육신으로 육신이 추구하는 바가 아닌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바울 사도가 육신을 두고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을 삼킴 바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응한다는 게 부활이라고 설명함도 바로 이런 성경의 기본 관점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육신의 부활과 거듭남과 새롭게 됨이 육신에 초자연적 현상이 나타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망으로 여기시는 것을 입은 듯 죄와 사망으로 살다가 썩지 않는 것을 입는 것처럼 바뀌는 것이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부활은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사망이 이긴 것처럼 삼키지만 죽지 않는 것으로 입게 되는 것이다. 이 썩을 것 곧 육신이 사망이 이긴 것처럼 삼키는 당하는 게 부활할 수밖에 없는 죽임이다. 바로 십자가요,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인해 죽는 죽음이다. 이 죽음을 주관하는 것은 높아지려는 본성에 죽을 힘을 다해 살면서 낮아지는 본성으로 사는 것을 심판하는 사망이다. 이 사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고,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삶 밖에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심판하고 삼킨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다 헛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높아지려 하면서 낮아질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사는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므로 모은 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리스도라서 나라마다 죽는 모든 거듭난 인생에게 이김을 주셨다. 바울 사도는 이 이김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 감사는 그리스도로 살기에 남들과 달리 낮아지고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에 순종하는 사람만의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의 이김이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교회에서 하나님을 빌려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이김은 환상일 뿐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믿음을 견고히 하라고 했다. 날마다 죽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견고히 하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수고를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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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28-37) 깨어 있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3. 4. 15. 07:0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을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한 개인의 신앙으로 설명한 건 별스러운 게 아니다. 오늘날 세상에서의 성공을 빌며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들을 멸망의 가증스러운 게 거룩한 데 서 있는 것이며 거짓 그리스도라고 하는 건 자극적일 수 있겠지만, 양심을 가지고 자신이 교회에서 또 다른 데서 기도하는 내용이 과연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지 돌아보면 오히려 놀랍고 솔직해질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이 모든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다. 저주한 무화과나무와는 결이 다르다. 생명과 하나님의 세상 경영은 징조가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벚꽃이 피면 봄이 온다 생각하는 것 같이 사람의 신앙 여정에서도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비는 믿음도 조금만 살피면 그 안에 생명이 없음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과정을 진지하게 걷다 보면 과연 이게 맞나?’라는 의심이 드는 게 정상이다. 바로 그런 깨달음이 무화과나무를 보며 여름이 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비는 신앙 속에서 ‘이게 맞나?’ 반추하는 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다.

 

이를 알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신앙인들은 깨어 있다는 의미를 혹시나 죄를 범할까 염려하고 긴장한 상태로 사는 걸로 안다. 그건 엄청난 모순이다. 구원받았다는 건 죄가 없다는 것인데 죄를 범할까 염려한다는 건 자기모순이다. 오히려 이런 모순을 아는 게 깨어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고 있는 신앙이 과연 맞는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 이게 온전한 깨어 있음이다.

 

생각해 보면 교회에서 배우고 나누는 것들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있나? 구원받았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면서 회개로 기도를 시작하는 게 맞는 일인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게 맞는 말인가? 기도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맞는 말인가?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면서 욥의 친구들처럼 육신이 흉흉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게 없는지 돌아보거나 권면하는 게 맞는 신앙인가?

 

이런 수많은 모순 속에 살고 있는 자기 모습이 바로 무화과나무 잎에 무성해진 것이다. 그저 기본적인 상식만 있어도 의심할 수 있는 교리와 종교 속에 살면서 징조를 알지 못한다는 게 바로 잠자는 것이다. 이것에서 깨는 것, 그래서 지금 자신의 신앙이 많은 모순 속에 있다는 것, 더 나아가서 지금의 신앙을 이루는 하늘이 무너지고 이 신앙이 만든 세상이 종말을 맞아야 비로소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 중에 이렇게 깨어 있는 이들이 있었다. 자기 가치관의 종말을 맞이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누구도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다. 먼저 제자들은 성령이 오시므로 자신들이 알고 있고 믿었던 그리스도를 버렸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독립과 가난과 질병 없는 세상을 이룰 것이라 믿던 세상의 종말을 맞았다.

 

그들은 깨어 있었다. 예수님이 자기가 믿었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갈등했다. 그래서 빌라도의 뜰에 찾아갔다. 그리스도는 왕이 되고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데 어째서 채찍질 당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성도들은 어떤가? 수많은 모순 속에서, 자기 스스로조차 하나님께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인지 그냥들 살고 있다. 그저 육신의 일에 어떤 흉사가 생기지나 않는지 전전긍긍하면서. 큰 문으로 가는 많은 사람을 떠나면 육신의 삶이 힘들어지지 않을지 염려할 뿐이다. 그 생각이 바로 육에 속한 것이고,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데도 깨어 있지 않는다.

 

예수님께선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오늘 나의 신앙에 여름일 올 것을 알리는 무화과잎의 무성함과 같은 징조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지금은 다들 높아지는 그리스도, 육신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걸 아는 게 깨는 것이다. 조금만 양심이 있다면 알 수 있다. 이것을 알아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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