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599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내려올 때 함께 있었던 세 명의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리스도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서기관들이 와서 엘리야를 이야기한다. 이는 메시아(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란 말라기(4:5)의 말씀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왔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나 그리스도가 죽는다는 건 인정하지 못하는 제자들, 반면에 아직 그리스도는 오지 않았다고 믿는 서기관 누구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는 존재라는 건 모르고 있다. 이어 귀신 들린 벙어리 소년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책망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이전에 온다고 한 엘리야를 기다린다는 건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엘리야를 기다리는 건 놀라운 능력으로 민생 문제 해결할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엘리야는 오랜 가뭄을 기도로 끝낸 선지자이자 죽은 자를 살리고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간 능력의 선지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야를 기다리는 건 당시 유대인들만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심지어 각종 미신이나 종교를 믿는 사람 모두가 엘리야를 기다린다. 사람 이상의 능력으로 사람이 겪고 있는 문제, 특히 각 개인이 겪고 있는 자기 문제 해결을 기대한다. 그 기다림은 아주 연속적이고 진행형이다. 아직 그들에게 엘리야가 오지 않은 것이다. 왔다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엘리야를 기다린다는 건 그리스도 역시 오지 않은 것이다. 신앙인들이 자신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들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 이전에 오는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리스도는 오지 않은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엘리야를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 이상의 능력으로 자기 육신의 문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제자들도 비슷하다. 다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겐 엘리야가 이미 왔고,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영으로 온 사람이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일러 주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니 그들에겐 이미 그리스도까지 왔으므로 알려 주신 것이다.

 

다만 제자들은 오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는 그리스도라는 건 아직 믿지 못하고 있다. 제자들은 오순절이 되어서야 이 모든 걸 알게 된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오시므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고린도전서 4:14-21) 나를 본받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2. 12. 18. 11:57 Writer : 김홍덕

세상 지혜의 속성으로 복음을 가늠하거나 조명하면 복음을 전하는 방식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법을 따른다. 하나님의 모든 법은 생명의 법이라 낳고 낳는 것인 반면 세상 지혜가 전해지는 법은 가르침이다. 물론 복음 안에도 가르치고 양육함이 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할 때도 하나님 말씀의 생명 본성에 따라야 한다. 생명은 본성이므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자녀 같이,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라는 말과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않다는 말에서 복음은 가르치는 게 아니 생명의 법으로 낳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스승과 아비를 대비시키고, 부끄러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권면하는 것이라는 표현 역시 궤를 같이 한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빠져버린 세상 지혜와 복음은 전혀 다른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은 생명의 법이다. 사람들은 무심하나 구원의 본질인 거듭남도 생명에 관한 말이다. 이 생명의 법은 그 어떤 교육 방식보다 완벽하다. 교육이란 가르침을 통해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그 변화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바탕으로 더 성장하는 자체 동력을 가지도록 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다시 나서 교육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모습이 본성이 되는 것 이상의 교육은 없기 때문이다. 본성이 바뀌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 그러니 이보다 온전한 교육은 없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성도들을 스승으로 가르치지 않고 낳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 대로 살도록 지속적인 훈계를 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나는 것에 비할 수 없다. 거듭나면 말씀으로 가르치고자 한 모든 게 자기 본성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이런 생명의 법이기 스승이 아닌 아비처럼 낳았다고 한 것이다.

 

또한 자신을 본 받으라는 말도 같은 맥락과 법이다. 자녀가 부모를 닮고 자기도 모르게 부모처럼 살게 되는 건 가르쳐서가 아니라 낳았기 때문이다. 이 법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이나 바울 사도 자신을 본 받으라는 건 행동이나 습관이나 말투를 따라 하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그리스도의 모든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된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생각나도록 디모데를 보낸다는 건 아들은 아버지를 알게 하는 생명의 법을 염두에 둔 말이다. 아들은 누구라도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과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이같이 생명인 복음은 가르쳐 전해지는 게 아니다. 이건 엄연히 생명이므로 생명의 법이 이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 되고, 구원은 거듭남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와 오늘날 교회가 매몰된 세상 지혜는 이와 다르다. 세상 지혜로 평가하고 판단하여 비교 우위에 있는 사람이 가르친다. 또 비교 우위에 있다는 걸 서로 주장하니 분열된다. 이 모든 게 고린도 교회와 오늘 우리가 아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에 대해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말씀으로 권면한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능력은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가르치는 말과 달리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으로 살게 하는 능력,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생명이다. 기독교인들이 빠져 있는 평소 성경을 지켜 행하려 그 지키는 법을 말로 배우는 어리석음과 다른 세계다.

 

이 다름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다름이 아니다. 돌과 풀의 차이다. 생명 세계와 사물의 차이다. 말로 가르치는 세상 지혜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그리스도라로 거듭나서 살게 하는 능력도 이런 차이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전한 복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이렇듯 배우고 훈련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는 것이다. 놀라운 생명의 능력으로.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가복음 9:2-8) 변화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2. 15. 16:1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아주 완곡히 만류했다. 심지어 베드로는 사탄이라는 책망을 들을 정도로 만류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리스도는 누구(무엇)인가?’에 대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변화산은 사건은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 기적이다.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가 산에 오르니 예수님께서 아주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셨다. 옷이 광채가 나고 사람이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희게 되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더불어 말씀을 나누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란 말씀을 하신 이후의 일이다. 지금 이 사건은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이 충돌한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 이걸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묵상해야 한다.

 

먼저는 옷이 강조되었는데,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의 옷이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희게 되었다고 했다. 예수님의 신분인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이룰 수 없는 성결한 신분임을 먼저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베드로의 말과 하늘에서 난 소리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하실 때 모세와 엘리야도 나타나서 함께 말씀을 나누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각각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초막을.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게 아주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가 난 후 제자들에겐 예수님만 보였다. 모세나 엘리야의 말이나 함께한 말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만 들으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하늘에서 들린 말씀을 의미가 전달되지 않은 말을 표현하는 소리라고 기록한 건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가 온전한 그리스도임을 제자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기적을 대표하는 선지자다. 그런 그들이 함께 있는 게 좋다는 제자들은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이 그리스도의 자격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라 믿는 예수님께서 이제 곧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정치, 사회,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은 비단 제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물론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 대부분의 생각이다. 기도 제목을 보면 모든 게 증명된다.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온통 밥 달라, 직장 달라, 이성을 만나게 해 달라, 나라를 살펴 달라는 것뿐이다. 이런 문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건 그리스도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민생은 고사하고 자기 육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렸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네가 그리스도면 거기서 내려오라는 조롱 속에 예수님은 자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하나님 아들이란 사람의 생각이 녹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고 기뻐하는 자라며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영광스럽게 변하신 일은 예수님의 권위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사랑하는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시는 사건이다. 엘리야처럼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나 모세처럼 성경 지식에 밝고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말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세대라도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면 천사의 말을 해도,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없다. 따라서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처럼 육신의 문제 해결을 사람 이상의 능력으로 도우시는 분을 그리스도로 믿는 건 하나님께서 말을 들으라 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니다. 믿는 그리스도가 다르니 거듭났다는 자신 역시 하나님의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로 난 사람이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게 아니다. 즉 구원 없는 믿음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