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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2. 11. 20. 19:15 Writer : 김홍덕

앞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란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란 제하의 글을 올렸다.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방향을 설명한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을 수없이 많이 하고 계시기 때문에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 문제는 어쩌면 상충되는 둘의 관점이 공존할 있는지 여부다. 핵심은 무엇으로부터 지키는지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시 121:5)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실 것이란 사람의 생각 위험은 육신의 일이다. 운전 위험, 시험에 임할 실수와 같은 것들이다. 이런 위험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상쇄될 것이라고 믿는 건 어리석은 것임을 먼저 말했었. 그러나 실제 기독교인들의 기대가 그렇고 믿음이 그렇다. 그러나 살펴보면 이런 기독교인들의 기대사항은 모두 육신에 관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도들은 물론 예수님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 믿는 위험이나 환난을 피하지 못했다. 모두 고통스런 순교를 당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받고 따른다고 하면서 그들이 당한 위험에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과연 온전한가를 생각할 있어야 한다. 이게 상식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기독교인들이 지켜 주시기 원하는 위험을 모두 당했다

 

그럼 예수님과 사도들조차 피하지 못했는데 우리를 지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있을까? 그런 하나님께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이성적이고 온전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고찰이나 묵상도 없이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위험 속에서 안위를 부탁한다는 뭔가 많이 부족한 설정이 수밖에 없다.

 

문제에 대한 답은 시작할 이미 제시해 두었다. 하나님은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사람의 부분은 육신이라기 보다 육신 안에 거하는 심령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형식이자 소비재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본질은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다. 심령 안에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 있는지다.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지키신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본질은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

 

신앙의 가장 근간이라 있는 구원도 이와 비슷한 모델이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 무엇으로부터,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가?’ 물으면 거의 대답하지 못한다. 물론 답하는 경우가 제법 있지만 그건 대부분 공식이다. ‘죄와 사망?’ 그러면 죄는 무엇이고 쉬고 살아 있는데 사망은 무엇인가 물으면 끝이다.

 

이는 도움을 받아야 환난과 위험과 결을 같이 한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위험이나 구원해야 위험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역시 육신의 문제를 구원받아야 자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천국에 가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금면류관이라는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땅에서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던 땅의 삶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약속은 절대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아래에서 났으므로 이를 절대 벗어날 없다. 따라서 구원이란 목적을 벗어난 자리에서의 회복이며, 지키심도 목적을 벗어나지 않도록 지키신다.

 

결론은 신앙의 본질이 육신의 일인지 아니면 사람으로서 자기 정체성, 존재로서 존재 목적인지다. 육신과 삶에 부속된 일을 본질로 보면 하나님이 지키시는 위험은 육신과 삶의 위험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란 위험이 이것이다. 그리고 구원도 육신의 일에 귀속된다. 그래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기대하는 증거다.

 

우리를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아래 사람이 회복되고, 그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가 되며, 그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육신이 되어 그 생명으로 사는 삶을 지키신다는 것이다. 이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이고, 이 삶을 살게 되는 게 구원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지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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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의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또한 고린도전서를 관통하는 세상 지혜에 대한 권면의 일환이다. 결국 세상 지혜를 좇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게 자신을 속이는 것이란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위한 존재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이 이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냥 거하시기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하나가 되어 형상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말씀이다. 이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며 이는 곧 피조물인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을 외면하는 게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

 

어떤 존재라도 자신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부인하는 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도 역시 그렇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존재 목적 아닌 것을 추구하는 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게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를 관통하는 주제인 세상의 지혜를 좇고, 세상의 지혜를 가치의 기준으로 삼아 세상과 신앙을 조명하는 게 바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란 게 바울 사도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사모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것

 

바울 사도가 이토록 세상 지혜를 경계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도와 반대로 높아지는 것을 의로 여기고 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세상 지혜는 세상에서 더 높아지는 법이고 지혜다. 높고 크고 많은 것이 곧 의인 세상 가치 기준이 그렇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가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낮고 천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가 사람을 구원하는 진정한 가치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정체성임을 보이셨다.

 

따라서 사람이 낮아지는 십자가의 도와 반대인 세상의 지혜를 좇아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모든 시도와 근본 마음은 자기 존재 목적을 부인하는 것이고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이란 게 바울 사도의 말씀이다. 가야할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라고 하고, 또 그렇게 가는 건 분명 속이는 일이다.

 

그런데 이같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일은 이색적이거나 일상에서 멀리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 신앙인들은 남도 자신도 속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스스로 속이고 있다. 신앙인으로서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바울 사도 말씀의 의도로 볼 땐 분명히 그렇다.

 

신앙인들이 정말로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지점이 여기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을 의지해서 어디로 가려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을 믿어서 얻거나 이루거나 이르려는 자리가 어딘지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아 높은 곳이라면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다.

 

분야가 굳이 돈이나 권력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도덕이나 행위의 선함 역시 다르지 않다. 높아지려는 육신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을 버린 삶이다. 즉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세상 지혜를 의지하므로 분열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한 이유가 이것이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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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생각의 어리석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2. 11. 19. 21:18 Writer : 김홍덕

선민의식(자신은 선택 받은 백성 혹은 사람이란 자부심)’ 일반화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 선민의식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선민의식은 좋기만 말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일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거야!”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남들과 달리 어려움도 극복하고, 위험한 일도 당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전제는 예수를 믿으니까?’. 근데 이게 바로 선민 사상이다.

 

어느 사전적 용어가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다. 예전 박희태란 사람이 국회의장일 말이다. 이른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의미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기독교인들의 일반적 생각도 결을 같이 한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예수 믿는다는 명분으로 뭔가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선민의식은 상당히 이기적이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 예수 믿는 혹은 우리는 된다는 동전의 양면처럼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은 불행해 지거나 불행에 방치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건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 마음은 곤고함이나 환난 혹은 어려움에 방치하는 아니다. 사람에게 세상이 힘들고 곤고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생각으로 살기 때문이지 세상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이 있어야만 안전한 위험한 곳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라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

 

 


세상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이 있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해야 하는 위험한 곳이 아니다. 성경에서 성도들의 위험을 하감하여 것을 간구하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의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세상의 가치와 문화와 의를 주장하는 위험을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근본적으로 위험하단 뜻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법과 사람이 만들어 세상의 위험을 안다면 선민사상은 자체로 허구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에 뭔가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는 그런 기대를 만든 저변에서부터 전부 허상이란 이야기다. 이런 바로 공중에 나는 새다.

 

세상은 예수 믿는다는 명분으로 특별히 보살펴야 위험 같은 없다. 세상에서 위험한 다나 하나, 세상을 만들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과 다른 생각으로 하는 뿐이다. 그런데 특별한 보살핌을 주실 것이란 믿음을 가졌다는 없는 위험을 감지한 사람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만 있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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