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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

 

이 말씀은 흔히들 말하는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말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은 죽는 것도 자신이고, 사는 것도 자신이지만 예수님 말씀은 다르다. 죽고자 하는 건 목숨이고 살고 얻는 건 영혼(구원)이다.

 

특히 이 말씀은 베드로의 고백과 책망,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진 말씀이란 점을 주목하고 묵상해야 한다. 앞서 예수님께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칭찬했지만, 반대로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질 수는 없다는 베드로에게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일련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면 어렵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란 걸 알고서 봐야 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땐 칭찬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하니 사탄이라 책망하셨으며, 그리스도인 자신을 따라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들은 모두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본능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조롱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신념을 가지고 고통을 참으며 십자가를 지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만류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란 게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 질 수밖에 없는 존재란 것이다.

 

예수님께선 자기 목숨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리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어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원은 곧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우리 목숨을 버려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인데, 이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과 연결된다. 반대로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자기 목숨을 구한다는 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생각과 같다.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건 육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다. 목숨을 버리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서 구원은 육신의 목숨이 본질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 존재의 가치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육신은 다 죽는다는 것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누구나 예수님을 위해 순교하란 말씀인가? 그건 아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목숨을 버린다는 건 한순간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육신은 결국 죽는다. 결국 죽을 육신의 목숨을 굳이 버린다고 말씀하심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어디에 사용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 육신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반대로 그냥 잃어버릴 수도 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는 건 이 육신과 그 수고와 삶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쓴다는 뜻이다. 반대로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는 건 육신의 삶을 자기를 위하여 쓴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육신을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쓴다는 건 예수님처럼 산다는 뜻이다.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산다는 의미다. 그러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어야 한다. 생명과 본성이 같지 않은데 따라 하는 건 그냥 시늉이다. 성경은 이를 외식이라 한다. 이게 오늘날에 와서는 성경대로 살려는 노력으로 미화되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건 같은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우리 인생의 목적이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즉 육신의 삶을 예수님처럼 사는 게 구원인 이유다. 존재가 자신의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것 이상의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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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16-17) 하나님의 성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2. 11. 16. 08:04 Writer : 김홍덕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유명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공간, 형상)이다. 성전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개념은 교회 건물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말씀 속 성전은 물리적 건물이 아니다. 이건 사람 이야기다. 사람의 존재 목적과 우리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전반적 흐름 속에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반면 사람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영이신 하나님은 볼 수 없다. 다만 존재하신다는 현상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상은 실체의 모든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다. 하나님을 형상 가진 존재를 통해 표현하시고자 하심이다. 그게 바로 우리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이 의미다.

 

바울 사도는 또한 우리를 질그릇이라고도 했다. 밥그릇은 밥을 담기로 정했기에 밥그릇이듯,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이 담기기 위한 존재다. 그게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우리의 존재 이유를 알고서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을 상고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와 결이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앞서 바울 사도가 언급한 대로 신령한 사람이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다. 육신이란 형상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지혜로 신앙을 조명한 결과 너보다 내가 더 나은 신앙이라는 분열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정당성 확보를 위해 사도의 이름을 도용했다. 세상 지혜가 가치 기준이 되어 신앙마저 삼켜버린 성도를 향한 권면이 고린도전서다.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를 향해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각성시키는 건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실 그릇이요 형상임을 상기시키는 권면이다.

 

집이나 그릇과 같이 그 속에 무언가를 담는 건 담긴 것이 정체성을 결정한다. 콜라가 담긴 잔을 건네 달라고 할 땐 콜라 혹은 콜라잔을 달라고 한다. 밥을 담아둔 그릇을 지칭할 땐 밥그릇이라 한다. 차를 둔 건물은 차고라 하고, 김치를 두는 곳은 김치냉장고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다.

 

구약시대에도 돌로 지은 성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형이고, 육신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이다. 그 안에 가만히 계시기 위한 게 성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시는 이유는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함이다. 돌로 지은 성전 아닌 호흡 있는 육신 가진 사람을 성전이라 하신 건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9:11)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은 다른 사람과 달리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선민의식을 위한 것이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신앙을 보이지 않는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로 가리기 위한 변명거리가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게 우리 인생의 목적이란 걸 일깨우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육체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본성인 사람이다. 그 삶이 세상의 가치나 지식과 섞일 수 없다. 오직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 의와 뜻,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란 말씀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 말씀하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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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행사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그저 알라딘의 램프 속 요정이거나 차비 대신 내주는 선량한 존재일 뿐이다. 그들이 누군가 물을 필요는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바로 그들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기독교인 당신도 그중 하나일지 모른다. 예수님을 죄가 있어 인생이 형통하지 못하고 벌을 받아야 할 처지에서 자신을 대신해 벌 받은 존재로, 그리스도는 육신의 삶에 마주한 난관을 해결해주는 메시아로 믿고 있다면 재론의 여지 없이 그들 중 하나다.

 

이건 너무나 많이 이야기해 왔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야기할 내용이다. 이 블로그의 독자가 어느 날 눈에 보이는 게 본질이 아님을 알고 예수님이 부르시는 (You)’라는 호칭을 인해 통곡하는 날이 온다면 왜 그렇게 많이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 해 보려 한다. 그건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를 지는가에 관한 것이다. 아마 이건 앞으로 전개될 마가복음 후반부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 이유는?

 

대부분은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 가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는 신념이라 여긴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사랑의 마음을 인한 신념, 그것이 그 엄청난 고통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은혜라 감동한다. 이게 틀리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답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한 이유를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곤고한 육신의 삶에 위로를 삼고, 이를 복음의 본질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게 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란 것이다. 십자가를 지실 때 이미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육신이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서 못 내려오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기 전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였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 이유를 아는 건 너무 중요하다. 이걸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당연히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신념으로 알기에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도 분명 신념으로 지려 한다. 예수님처럼 되려는, 말씀대로 행하려 귀도에서 십자가를 지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들인 죄 없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내 삶의 근본과 본성이어야 한다. 예수님과 내가 같은 존재여야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예수님과 같은 본성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면 모두 신념과 외식이다. 이건 신앙적 논쟁이 아니라 상식적 개념이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본성을 가졌기에 어쩔 수 없이 지는 게 십자가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한다.

 

너무나 다행스러운 건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게 우리의 존재 목적이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게 바로 이 의미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창조된 존재다. 따라서 이 존재가 아닌 상태가 바로 죄다. 죄가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존재 목적으로 돌아가는 게 회개고 회복이며 구원이다.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맥없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 구원과 믿음에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이 이유를 신념으로 보는 사람은 신념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을 한다. 노력하고 육신으로 지켜내려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시기에 십자가를 진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게 바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임을 안다. 이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신념으로 살아가던 생명이 예수님을 이끈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새로 나는 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자기 안에 있다. 생명이 자라면서 알게 되고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설사 도망치려 해도 어쩔 수 없음을 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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