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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22-26) 벳새다의 맹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0. 23. 14:3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시니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청했다. 예수님께선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칠 때처럼 또 침을 뱉어 그 사람을 치유하셨다. 그런데 짧은 시건 속에 치유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맹인이 단번에 치유된 게 아니고 단계적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논란이 되는 말씀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열리는 게 구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 예수님께 맹인은 사람이 보이며 나무 같은 게 걸어가는 게 보인다’고 하고 이어서 다시 안수하시니 만물이 밝히 보이게 되었다고 했다. 보통은 단번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게 일반적인데 맹인이 체험한 치유의 과정을 제법 상세히 기록한 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열리는 과정을 설명하심이다.

 

기독교인들은 구원이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어느 날 교회에 출석해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고, 육신으로 겪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주로 믿는다고 말만 하면 바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은 단숨에 태어나는 게 아니고, 우리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출애굽은 자그마치 40년이 걸렸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구원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는 건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란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성경을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처음 안수했을 때 맹인은 사물이 분명하지 않았다. 특히 사람이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또 한 번 안수했을 때 사람을 바로 인식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곧 열리라고 하신 건 결국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대한 인식이며, 그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우리가 알 건 구원의 시작은 순간적이나 완성은 과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여정을 설명한 출애굽이 그렇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사람의 생각처럼 구원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건 쉬운 게 아니란 뜻이다. 구원은 적어도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만 성취되는 사건이다. 그 구원으로 얻는 영생은 더더욱 단순하지 않다.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인식과 그의 아들을 아는 게 영생이자 구원이다. 

 

특히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안다’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한 말에서 보듯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내가 체휼하여 나의 생명 본성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고 나 역시 예수님과 같은 생명 본성을 가진 존재로 살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란 의미다. 아마 조금만 양심이 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이 말하는 구원엔 이게 없음을 고백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양심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

예수님은 치유한 맹인을 집으로 돌려보내시면서 한편으론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 집이 마을 안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동네가 벳새다란 것이다. 여러 제자의 고향이기도 한 벳새다는 ‘어부의 집’이란 의미의 말인데, 우리가 주목할 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안타까워한 곳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회개하기 전 자리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성경에는 어떤 장소를 두고 ‘떠나라’, ‘가지 마라’는 말씀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너의 본토 고향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고, 결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부모를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유한 몇몇 병자에게 이 본문의 말씀처럼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다.

 

성경 속 장소는 지도상의 지점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건 정체성의 이야기다. 아브라함이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적지도 지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지 말라고 한 마을은 지점이나 지역,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지 않은 존재, 그리스도의 양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사람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돌아가지 말아야 하는 마을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는 상태

 

성경은 근본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가 거듭나야 할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구원을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말하는 이유다. 성경의 의도가 이것이므로 성경 속 시간과 장소는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리적 장소와 절기와 시간은 모두 그 그림자, 비유, 형식이다. 이것을 알면 돌아가지 말라는 마을이 장소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 침을 발라 안수했을 때 맹인은 흐릿하게 보였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신세계를 발견한 듯해도 자세히 알려고 하면 많은 게 흐릿하다. 성경이 존재론에 관한 말씀임을 알았을 때, 육신의 평안함이 신앙의 목적이나 은혜의 척도가 아닌 걸 아는 건 맹인에게 흐릿하게라도 뭔가가 보이는 것 같은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전혀 보이지 않다가 흐릿하게라도 보이는 건 처녀와 기혼녀의 차이와 같다.

 

하나님의 복음도 그렇다. 생명이 없을 때는 육신의 평안함이 은혜의 척도이자 신앙의 목적이다. 그러다 거듭나면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다 뭔가 보인다. 하지만 그게 선명하게 보여서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건 많은 과정을 겪어낸 다음의 은혜다.(사람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건 인생의 목적과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의미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 안식하라는 의미, 동네로 돌아가지 말라는 건 구원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의미

 

그런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 안식하란 의미다. 그러나 동네 곧 복음을 전해도 회개치 않는 벳새다로 돌아가지 말라는 건 다시 보이지 않는 때,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경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생각하면 된다.

 

신앙의 여정은 단순하지 않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게 쉬운 거면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다. 당장 사람들이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신앙에서 돌아서는 것부터 엄청나게 힘들다. 그건 구원이 없는 것이지만 구원인 줄 알고 있다.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아는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이다.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맹인이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어두움에서 벗어난다. 이게 구원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다른 안목으로 본다. 생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이게 맹인의 밝아짐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나무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그리고 말씀을 계속 들어 모든 게 선명해진다. 사람과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양식,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영생 이 모든 게 밝아진 삶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이다. 이건 풀이 늑대에겐 양식으로 보이지 않아도 양에겐 양식으로 보이는 것같이 그리스도란 생명만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장성하면서 사람과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 쉽지 않은 과정을 보내고 다시 회개하지 않는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시니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청했다. 예수님께선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칠 때처럼 또 침을 뱉어 그 사람을 치유하셨다. 그런데 짧은 시건 속에 치유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맹인이 단번에 치유된 게 아니고 단계적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논란이 되는 말씀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열리는 게 구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 예수님께 맹인은 사람이 보이며 나무 같은 게 걸어가는 게 보인다’고 하고 이어서 다시 안수하시니 만물이 밝히 보이게 되었다고 했다. 보통은 단번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게 일반적인데 맹인이 체험한 치유의 과정을 제법 상세히 기록한 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열리는 과정을 설명하심이다.

 

기독교인들은 구원이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어느 날 교회에 출석해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고, 육신으로 겪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주로 믿는다고 말만 하면 바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은 단숨에 태어나는 게 아니고, 우리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출애굽은 자그마치 40년이 걸렸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구원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는 건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란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성경을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처음 안수했을 때 맹인은 사물이 분명하지 않았다. 특히 사람이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또 한 번 안수했을 때 사람을 바로 인식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곧 열리라고 하신 건 결국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대한 인식이며, 그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우리가 알 건 구원의 시작은 순간적이나 완성은 과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여정을 설명한 출애굽이 그렇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사람의 생각처럼 구원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건 쉬운 게 아니란 뜻이다. 구원은 적어도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만 성취되는 사건이다. 그 구원으로 얻는 영생은 더더욱 단순하지 않다.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인식과 그의 아들을 아는 게 영생이자 구원이다. 

 

특히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안다’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한 말에서 보듯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내가 체휼하여 나의 생명 본성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고 나 역시 예수님과 같은 생명 본성을 가진 존재로 살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란 의미다. 아마 조금만 양심이 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이 말하는 구원엔 이게 없음을 고백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양심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

예수님은 치유한 맹인을 집으로 돌려보내시면서 한편으론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 집이 마을 안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동네가 벳새다란 것이다. 여러 제자의 고향이기도 한 벳새다는 ‘어부의 집’이란 의미의 말인데, 우리가 주목할 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안타까워한 곳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회개하기 전 자리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성경에는 어떤 장소를 두고 ‘떠나라’, ‘가지 마라’는 말씀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너의 본토 고향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고, 결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부모를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유한 몇몇 병자에게 이 본문의 말씀처럼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다.

 

성경 속 장소는 지도상의 지점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건 정체성의 이야기다. 아브라함이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적지도 지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지 말라고 한 마을은 지점이나 지역,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지 않은 존재, 그리스도의 양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사람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돌아가지 말아야 하는 마을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는 상태

 

성경은 근본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가 거듭나야 할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구원을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말하는 이유다. 성경의 의도가 이것이므로 성경 속 시간과 장소는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리적 장소와 절기와 시간은 모두 그 그림자, 비유, 형식이다. 이것을 알면 돌아가지 말라는 마을이 장소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 침을 발라 안수했을 때 맹인은 흐릿하게 보였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신세계를 발견한 듯해도 자세히 알려고 하면 많은 게 흐릿하다. 성경이 존재론에 관한 말씀임을 알았을 때, 육신의 평안함이 신앙의 목적이나 은혜의 척도가 아닌 걸 아는 건 맹인에게 흐릿하게라도 뭔가가 보이는 것 같은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전혀 보이지 않다가 흐릿하게라도 보이는 건 처녀와 기혼녀의 차이와 같다.

 

하나님의 복음도 그렇다. 생명이 없을 때는 육신의 평안함이 은혜의 척도이자 신앙의 목적이다. 그러다 거듭나면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다 뭔가 보인다. 하지만 그게 선명하게 보여서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건 많은 과정을 겪어낸 다음의 은혜다.(사람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건 인생의 목적과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의미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 안식하라는 의미, 동네로 돌아가지 말라는 건 구원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의미

 

그런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 안식하란 의미다. 그러나 동네 곧 복음을 전해도 회개치 않는 벳새다로 돌아가지 말라는 건 다시 보이지 않는 때,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경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생각하면 된다.

 

신앙의 여정은 단순하지 않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게 쉬운 거면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다. 당장 사람들이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신앙에서 돌아서는 것부터 엄청나게 힘들다. 그건 구원이 없는 것이지만 구원인 줄 알고 있다.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아는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이다.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맹인이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어두움에서 벗어난다. 이게 구원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다른 안목으로 본다. 생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이게 맹인의 밝아짐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나무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그리고 말씀을 계속 들어 모든 게 선명해진다. 사람과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양식,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영생 이 모든 게 밝아진 삶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이다. 이건 풀이 늑대에겐 양식으로 보이지 않아도 양에겐 양식으로 보이는 것같이 그리스도란 생명만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장성하면서 사람과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 쉽지 않은 과정을 보내고 다시 회개하지 않는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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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말씀대로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지혜인 사람의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안다는 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거듭났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건 곧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있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곧 신령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신령한 사람은 신비롭고 초인적이며 남다른 초월적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실 상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지만 신앙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신령한 사람이지만 거듭났다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면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곧 사망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신이 곧 신령한 사람이란 믿음이 자기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신령(神靈)하다는 건 신의 영이 함께 혹은 지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령함의 성격은 곧 신의 성격이다. 어떤 신을 믿는지에 따라 신령함이 달라진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신의 신령함은 기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신령함은 신비한 기적과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는 건 말 그대로 행위다. 신의 정체성, 곧 의로움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는 의미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신은 어떤 행위는 기뻐하고 어떤 행위는 노여워한다. 성경에 나오는 바알과 아세라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오늘날 아니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믿어 온 하나님의 정체성도 이랬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주일날 짜장면 먹으면 안 된다(벌을 받는다)는 사고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더 큰 쟁점이 있는데 그건 의롭게 행하려는 목적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가져올 이익 곧 육신의 복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육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육에 속한 육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육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신령한 사람에게 육신은 복을 받고 평안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가 된 육신은 말씀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 본연으로 살아간다. 이게 신령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신령한 사람은 이처럼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과 함께 한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본질이 이것이다.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신령함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어리석다. 생명은 날 때 온전한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서 노력한다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 역시 신령함이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이런 육신의 일은 또한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 바울 사도가 세상 지식에 의지하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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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이신 다음에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살짝 생뚱맞다. 하지만 이 말씀의 핵심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아니라 누룩, 곧 외식이다. 사천 명을 먹인 양식이 육신의 양식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많이도 외식을 말씀하셨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표현은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다. ‘독사의 자식들’, ‘회 칠한 무덤과 같은 표현은 정말 거칠다. 예수님께선 공생애 내내 유대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다. 그렇다고 이제 그 책망이 끝났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외식과 다투고 있다.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을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가식적인 율법 준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율법과 오늘날 신앙생활의 규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시 유대인의 십일조와 지금의 십일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근거는 의외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복음의 <시대>, 예수님의 구속이 유효한 시대라는 게 그 근거다.

 

그러나 이건 착각이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당시 유대인이나 지금 기독교인이나 십일조를 내는 목적은 같다. 심지어 예배(제사)드리는 목적도 같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자가 될 복선을 깔고 십일조를 내고 있고, 벌 받지 않고 평안한 삶을 위해 예배를 드린다. ‘예배 안 드리면 안 된다는 말에 오늘날 신앙인의 외식이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또 성경은 당시 유대인이 아닌 오늘날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다. 당시 유대인의 모습이 훗날인 오늘날에도 있을 것이기에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외식을 당시의 일로 치부하면서 예수님의 구속을 믿는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 승리일 뿐 아무 효력이나 가치가 없다. 오늘날도 외식의 시대란 의미다.

 

성경을 통해 외식을 말씀하심은 오늘 우리를 위한 교훈

 

예수님은 기적을 구한 바리새인을 두고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누룩이란 실체보다 부풀려진 것을 의미한다. 유월절 출애굽 시 누룩 없는 빵을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서 먹으라고 하셨음을 상기하면 그 의미와 이유를 알 수 있다. 구원이란 자기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이다. 구원이 그렇다는 건 복음은 그렇게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외식은 왜 누룩인지와 오늘날은 어떤 누룩이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룩은 사실보다 부풀려진 것, 곧 거짓이다. 또한 회칠한 무덤이란 표현에서 보듯 기만과 속이는 것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믿는 것이 누룩이다. 그리고 외식이다.

 

너무 자주 이야기해서 식상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누룩인 이유는 <노력>이란 말이다.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게 신앙이란 말은 언뜻 참 가상하고 거룩한 것 같다. 하지만 노력은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라는 증거다.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형제라는 건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란 말이다. 따라서 구원받고 거듭났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다. 그런데 구원받았으니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기만이고 누룩이다.

 

구원받았으니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게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이자 회칠한 무덤인 증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배에 빵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어떻게 아실까 의논했다. 이때 예수님께선 오병이어와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을 상기시키면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셨다. 오천, 사천 명을 먹이신 양식은 육신의 빵이 아님을 일러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누룩과 오병이어가 어떤 관계기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는 예수님의 양식, 곧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고,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양식이란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바리새인은 그렇지 않은 존재가 된다. 어떤 것을 정의하면 정의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건 자연스레 심판이다. 무엇이 물인지 정의하면 물 아닌 건 모두 물이란 기준으로 심판을 받은 게 된다. 예수님의 양식, 그리스도의 양식을 정의하면 그것 아닌 것을 양식으로 삼는 사람은 다 심판을 받는다. 예수님의 양식 아닌 걸 자기 양식으로 삼으면 모두 외식이란 의미다.

 

예수님의 양식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임이 틀림없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오늘날 신앙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을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여기나 그건 무덤에 회칠하는 것일 뿐이다. 노력은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 곧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채워나가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일만 가지 법을 지키다가 단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으로 미치지 못하는 단 하나, 그것만으로 그는 이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다. 즉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그러나 이건 사람에게 엄청난 도전이다. 어떻게 우리가 성경을 다 지킬까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제가 구원과 믿음의 본질이다. 이 도전의 답은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존재임이 분명하다면 구원받아 하나님 아들이 된 우리 역시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진정 믿음이 필요한 건 이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 책망한 당시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아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 그 자체다. 행위의 받침이 없다면 구원을 불안해하는 사람,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누룩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양식인 자기 생명의 본성이란 의미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 말씀대로 사는 게 본성인데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런 생명의 법이 아닌데 말씀대로 살려 노력하는 그 자체가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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