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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께서는 들판에 모인 사람들과 제자들을 각각 돌려보내셨다. (남자만) 오천 명의 사람은 각자 자기 삶으로, 제자들은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기도하러 가셨다. 그리고 기도 후에 바다를 건너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다 힘겹게 노 젓는 그들을 보고 그들을 향해 가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다. 제자들은 부는 바람에 힘겹게 노를 젓고 있다가 다가오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으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임을 밝히시고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잔잔하게 되었다.

 

이 말씀으로 설교를 들은 사람은 대부분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바다와 바람을 다스리시는 분, 곧 세상의 모든 일을 다스리는 능력 가진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과 그와 함께 세상을 항해하면 풍파 없이 평안할 것이라는 게 주제였을 것이다.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평안함이 어떤 평안이냐는 또 다른 문제다. 사람들은 육신의 평안을 생각하고 있겠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바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탄 배가 광풍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잠잠하게 하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님은 함께 하시지 않고 있다. 그리고 풍랑 이는 바다를 걸어오셨고,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다가 잔잔해졌다. 다시 한번 그리스도가 세상의 풍랑을 잔잔케 한다는 걸 보여주신 것이다.

 

바다의 풍랑을 다스리고 바다 위를 걸으시므로 건 그리스도(인)는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을 전하심

 

특히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건 그리스도는 세상 풍파라고 하는 인생의 어려움들 위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사람들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 허우적대지만,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걸 자랑하시기 위해 바다 위를 걸으신 게 아니라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긴다는 걸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다른 복음서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얼마간 바다 위를 걷다가 풍랑 이는 바다를 보고 두려워하니 바다에 빠졌다고 했다. 예수님을 믿고 있을 때는 세상의 풍파를 이기지만 세상을 보고 두려워하면 두려워한다는 그 자체로 세상의 풍파에 빠진다는 걸 보여준다.

 

문제는 세상의 풍파는 무엇이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듯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세상의 풍파를 이겨낸다는 건 어떤 것인지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고 세상일이 평탄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닌다고 월급이 오르거나 병이 낫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그렇게 세상의 풍파를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세상 풍파의 극치인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평안한 삶을 누리고 맞은 평안한 죽음이 아니라 강제로 죽임을 당했는데 세상을 이기셨다고 하심을 잘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 아들인데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는 심판을 받아 당한 죽음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풍파를 제거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 순종하는 생명 본성으로 거듭난 존재

 

그렇다면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실 뿐 아니라 그 위를 걸으시며 보여주신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은 보여주시고 세상을 이겼다는 예수님은 어떤 세상을 다스리고 이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이겼다는 세상은 분명 육신의 삶이 겪는 세상의 어려움을 이겼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문제 해결 개념은 문제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기도하면 없던 돈이 생기고 아픈 몸이 기적적으로 낫고 봉착한 사업의 어려움이 눈 녹듯 해결되는 걸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란 말씀처럼 그런 문제들은 잠시 잠깐 진정시킬 순 있지만 제거할 수는 없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을 이긴 이김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다. 즉 문제에 변화가 생기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하는 것이다. 내가 거듭나는 것이지 세상이 거듭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내 관점의 기준인 내 의가 문제다. 그 문제가 없는 존재로 다시 나는 것, 그게 거듭남이다. 생명이 바뀌면 세상과 사물을 보는 모든 의과 가치관과 관점이 바뀐다. 아니 거듭나야만 그렇게 바뀐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을 십자가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십자가가 우리를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말씀과 기적은 모두 십자가에 수렴하고, 십자가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과 세상 같은 바다와 그 풍랑을 잠잠하게 다스리심 역시 십자가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건 세상을 개조하러 오신 게 아니다. 가난이나 나라의 독립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오신 게 아니라 가난이나 부유함이나 자유나 구속된 상태 그 모든 상황을 대하는 나 자신의 관점과 안목과 가치관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므로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긴다는 걸 보여주신 예수님이 보여주고자 하신 이김은 세상의 문제를 없애는 게 아니라 문제 앞에 있는 나를 바꾸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거듭나는 것, 이것이 바뀌는 것이다. 거듭나서 그리스도가 되면 그리스도와 같이 바다와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남이 곧 세상을 이긴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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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30-44) 오병이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8. 29. 07:42 Writer : 김홍덕

오병이어는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 이 블로그에서도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에서 모두 다루었었다. 물고기, 보리떡, 12 광주리에 대한 의미들은 많이 설명한 바 있다. 기적 속에 있는 숨은 뜻에 대해서는 몇 번 이야기한 셈이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에서는 이 오병이어 기적이 가지는 전체적인 의미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마가복음의 흐름으로 볼 때 오병이어 전후로 연결된 이야기가 있다. 오병이어 기적에 앞서 제자들이 전도하러 갈 때는 먹을 것이나, 돈이나 옷을 더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비슷하게 말씀을 전하는 자리인 들에서는 전도 여행 다녀온 제자들에게 음식이 있는지를 물으셨다. 앞서는 음식을 챙기지 말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음식이 있는지 물으셨다.

 

외형적으로 변덕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조롱하는 분이 아니란 걸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란 게 먹는 음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이렇게 보는 게 예수님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절대자로 믿는 관점이다.

 

하지만 굳이 그게 아니어도 제자들에게 요구한 음식은 육신의 먹거리가 아닌 걸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관점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만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알고 하나님께 의식주나 세상의 일을 간구하는 사람에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음식은 육신의 먹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주라고 하신 음식은 육신의 먹거리가 아니다. 우선 들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보기 위해 나왔다. 제자들이 귀신 내쫓는 권세를 가지고 사람을 만날 때 음식이 필요 없었듯 지금도 필요한 건 전도 여행을 다녀와서 예수님께 말씀드린 체험과 간증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예수님께서 수가성에서 과부를 만났을 때 제자들은 음식을 구해 왔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을 따로 있다고 하셨다. 그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까지 해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지고 있는 음식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랬더니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에 남았다. 하나님 말씀은 부족함이 없이 전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또 하나 이 오병이어 앞에 있는 일 중에 고려해야 할 게 있다. 그건 바로 세례 요한의 죽음이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세례 요한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훨씬 이전에 죽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회개케 한 일로 다시 소환되었다.

 

세례 요한이 오병이어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이 흐름을 한 개인의 신앙 여정에 대입해 보면 이유는 선명해진다.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건 한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 육신으로 의로워지는 세계가 종식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에 맞추어 오병이어의 기적은 날이 저물 때 일어났다. 날이 저물었다는 건 지금까지의 밝음은 어두움이 되고 새로운 밝음을 기다리는 시점이다.

 

들판에 모인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세례 요한이 자기 신앙의 모델이었던 밝음이 저물고 예수님을 인하여 밝아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하늘의 양식이지 육신의 양식이 아니다. 예수님께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하늘 양식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선 귀신 내쫓는 권세로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대로 회개를 전파하였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회개를 세례 요한의 회개로 여기긴 했지만, 그것도 분명한 변화와 현상이 있었기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자신들이 체험한 일을 고한 것 역시 회개가 일어났다는 걸 설명한다.

 

그렇게 회개한 사람들에겐 새로운 말씀이 필요하다. 세례 요한의 신앙, 즉 육신으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 끝나면 날이 저문 들판에서 주린 것과 같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이 주신 권능으로 일어난 체험의 간증이다.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이 하늘의 양식을 주라고 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이 온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제자들의 약간은 어두운 이 마음은 풍랑 이는 바다를 건너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인식하는 일로 드러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도 여행을 다녀온 제자들을 사도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제자들의 전도 여행부터 오병이어까지는 육신의 먹거리가 아니라 하늘 양식에 관한 말씀이다. 전도는 인생의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우리 영의 양식을 전하여 우리 양식 아닌 걸 추구하는 귀신 들린 삶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의 세계 곧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선 영혼에 하나님은 하늘의 양식을 주신다. 귀신이 떠나고 예수님이 보이신 인생의 목적을 사는 삶의 은혜가 육신으로 의로워지는 세례 요한의 세계를 떠나서 어두운 들에 머무는 것 같은 영혼에 전하는 하늘 양식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신 음식이자,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신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다. 이 하늘 양식은 언제나 풍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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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시며 주신 권세와 당부하신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을 살펴보았다. 그건 아마도 일반적인 견해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렇게 사람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문하신 게 또 있다. 그건 전도 여행의 준비물에 대해서다. 여행 준비물은 여행 목적을 반영한다. 이 여행의 목적은 바로 <전도>. 회개를 외치고 복음을 전하는 게 목적이다. 예수님께선 전도를 위해서 음식물이나 돈은 물론이고 심지어 옷도 한 벌만 가지고 가라고 하신 건 전도는 재화나 용역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귀신 내쫓는 권세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전도에 필요한 건 예수님이 주신 권능, 그것뿐!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의 전도 목적은 귀신을 내쫓고 회개를 외치는 것이다. 귀신 들렸다는 게 정신질환이라는 외적인 육체의 일이 아니듯, 전도 역시 용역이나 재화라는 물리적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앞선 글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귀신 내쫓는 권세는 사람이 자기 존재 목적을 발견하게 하는 권세와 능력임을 설명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귀신 내쫓는 권세의 궁극적 실체는 십자가에 있다. 소위 말하는 십자가의 능력이 진정으로 귀신을 내쫓는 권세란 의미다. 재화나 용역, 그 모든 게 소용없는 십자가에 구원이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인생의 목적을 깨닫게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모습이 인생의 목적이란 걸 보이셨으니 이를 보고 자기 존재 목적을 깨닫는 사람의 삶을 지배하던 돈이나 명예와 같은 귀신을 내쫓는다. 이게 전도다.

 

십자가가 귀신 내쫓는 권세의 모든 것

 

십자가로 성취된 구원의 전도는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열쇠다. 먼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가는 그리스도의 자리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로 끌려갔는지에 대해 우리가 아는 대부분 교회는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감 때문이라고 하고, 그보다 낫긴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건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기에 하는 어리석은 소리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가진 본성은 의인이 죄인을 위해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더 힘세고 능력 있는 아빠가 어린아이에게 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부모의 본능처럼.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건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본성에 전도의 본질이 숨어 있다. 전도가 다른 사람이 또한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건 전적으로 십자가의 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땀이 피가 될 정도의 간절함으로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이라고 기도했지만, 방법은 십자가뿐이었다. 즉 전도는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전도하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려면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 내가 옳지만 너의 주장에 내 육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나서 살아갈 때 그 모습을 보고 사람이 마음에 회개하고 자신도 그리스도로 사는 걸 인생의 참 목적으로 삼게 되는 게 바로 전도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사람의 기준으로 하나님 아들에게 너는 하나님 아들이 아니다라고 판결한 판결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이 보고 구원을 얻은 것과 같은 법이다. 인생의 존재 목적이 높이 들리니 귀신처럼 존재 목적 아닌 게 지배하던 삶이 온전케 되는 이게 전도의 본질이다. 이것 외에 다른 건 전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업이 풀리지 않거나 병든 이들에게 교회 가서 예수 믿으면 다 잘 된다며 데리고 오는 건 전도가 아니다. 또 가난한 이들에게 재화나 용역을 제공하여 교회로 이끄는 것 역시 전도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의 전도는 전대나 음식이나 두 벌 옷이 필요 없다는 말씀에 비추어보면 전도가 아니라 외식이다. 굳이 좋게 말해야 한다면 인도(引導)’ 정도일 뿐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는 그리스도라는 생명만 있으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에 달리셔서 육신이 깨어져 육신이 되어 육신 안에 있던 말씀이 드러나니 사람이 그것을 보고 구원을 얻듯, 내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로 살면 그게 전도다. 전도의 준비물도 그리스도요, 전도의 본질도 그리스도다.

 

전도란?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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