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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1-20) 군대 귀신(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7. 16. 16:59 Writer : 김홍덕

소리 지르는 귀신 들린 자

군대 귀신 들린 자는 무덤 사이에 거하며 소리를 지르고 다닌다고 했다. 무덤 사이에 거한다고 하신 건 죽음과 함께 한 상태란 의미다. 귀신 들렸다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아닌 다른 게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삶은 죽은 것이란 말씀이다. 귀신 들린 자는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 아닌 걸 좇아가는 삶이 죄와 사망임을 보여준다.

 

성경은 의학적, 생물학적 호흡이 있는 상태를 생명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호흡이 멀쩡한 사람을 두고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항상 존재 목적과의 부합성이다. 그러므로 존재 목적은 상실하고 평안과 성공 같은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사는 귀신 들린 삶은 무덤 사이 즉 죽음의 상태다.

 

소리를 지르며 다닌다는 건 의미 없는 말만 하며 산다는 뜻인데 역시 구원이 없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리가 알아듣기 힘들거나 궤변 같은 말을 들을 때면 무슨 소리?’라고 말하듯 의미 없는 말을 소리라고 하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말이 곧 소리다. 헛소리라는 말도 그렇다. 당연히 있어야 할 내용 없이 하는 말을 소리라고 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사람이 쓸데없는 농담부터 놀라운 지식까지 온갖 말을 하며 살지만,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 아닌 게 삶을 주관하고 있다면 그의 모든 말은 그냥 소리일 뿐이란 걸 이 군대 귀신 들린 자가 보여준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존재 목적과 다른 삶을 살면 그 삶의 모든 말은 그냥 의미 없는 소리란 것이다. 귀신 들린 자가 소리 지른다는 건 이것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지 않는 사람의 모든 말은 그저 의미 없는 소리

 

 

돌로 몸을 상하게 한다는 건?

군대 귀신 들린 자는 또한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건 참 묘한 표현인데, 성경에서 돌이 율법을 의미한다는 관점에서 조명하면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니까 돌로 몸을 상하게 하는 건 율법이 몸을 상하게 한다는 의미다. 율법이 몸을 상하게 한다는 건 행위로는 이룰 수 없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육신을 사용하는 걸 의미한다. 육신이 이룰 수 없는 수고를 시키는 게 상하게 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봤다는 것은 이 사건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고 하지만 의롭게 되려고 성경을 육신으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게 그렇다. 아무리 노력해도 육신의 행위로 성경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없음에도 육신으로 노력하는 건 돌로 몸을 해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에겐 변명거리가 있다. 자신들은 지금 예수님이 오신 다음 시대인 신약시대를 살고 있으니 구약의 율법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게 그렇고, 자신들이 말하는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할 때 성경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므로 율법적인 신앙도 아니며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게 바로 어두운 소경의 모습이고 회칠한 무덤의 모습이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은 신약 구약을 가리지 않는다. 행위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것이란 생각으로 하면 번제를 드리는 것이든, 기도하는 것이든 가릴 것 없이 모두 율법이고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고 기록한 사도들에게 신약 구약 구분이 있었던 게 아니다.

 

신약성경이든 구약성경이든 무관하게 행위로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돌로 몸을 상하게 하는 귀신 들린 자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면 명백히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다. 이를 증명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 동전의 뒷면이라면 앞면은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가 된다. 무엇은 기도이기도 하고, 전도이기도 하며, 봉사이기도 하며, 성경 읽는 것이기도 하고, 심지어 목사의 말을 듣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알고도 오늘 자신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무엇보다 단지 자신을 속이는 정도로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건 구원이 없는 것이며 귀신 들린 것임을 성경을 쉬지 않고 말씀하시고 있다. 성경의 그 말씀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을 가졌다고 고백하고 길을 구하는 게 진정 성경대로 사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군대 귀신 들린 자는 오늘 신앙인들에게 이것을 깨우치게 하는 교보재와 같다. 군대 귀신 들린 자는 바로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발견하면 군대 귀신 들린 자가 회복되었듯 자신도 회복되고 구원을 얻겠지만, 이 말씀을 단지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으로만 보고 자기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된다. 발견하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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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1-20) 군대 귀신(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7. 11. 12:44 Writer : 김홍덕

우리에게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일로 알려진 예수님의 치유를 몇 차례에 걸쳐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이야기에 앞서 귀신 들린 상태의 정의를 다시 정리하고 가면 좋겠다. 귀신 들렸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듯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성경이 말한 온전하게 육신의 삶을 주관하는 정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따라서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목적 아닌 세상의 가치와 같은 다른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이 귀신 들린 것이다. 간단하게 구원받지 못했다면 귀신 들린 자로 정리해도 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구원의 기준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그 하나님의 기준은 낮아지는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이런 내용을 명심하고 이 사건을 묵상하면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라는 지방에 가셨을 때 만난 귀신 들린 자가 이 사건의 중심에 있다. 그는 무덤 사이에 살았고, 쇠사슬도 스스로 끊어버릴 정도의 초인적 괴력을 가졌다. 여기에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스스로 해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귀신은 물러가고 치유된 사건이다. 예수님께선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말씀하신다.

 

먼저 눈에 띄는 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봤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소리쳤다. 언뜻 예수님을 바로 알고 존대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상관하지 말고 그냥 가라는 말이다. 다른 귀신 들린 자와는 다른 태도다.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바로 인식했다는 건 주목할만하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바로 아는데 귀신 들렸다는 건 아주 특이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하게 귀신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안다고 하거나, 귀신도 알아보는 예수님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그 사실상 모순이다.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지한다는 건 모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려주신 예수님을 알면서 목적을 상실한 귀신 들린 상태가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인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귀신 들릴 수 없단 의미다. 따라서 이 귀신 들린 자는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작 그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상실한 사람의 모습이다.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상투적인 신앙 비판인가? 싶겠지만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귀신 들렸는데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지하는 같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라는 낮고 천한 자리에서 육신 가진 사람에게 인생의 목적을 말씀하셨는데 그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높고 귀하고 이기고 성공한 자리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인 것을 안다고 하는데 정작 귀신 들린 모습의 군대 귀신 들린 자의 모습이다.

 

이처럼 오늘날 신앙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의와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낮고 천한 십자가에 보내셔서 의와 뜻을 나타내시고 예수님은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높은 곳에 오르려 한다. 반대로 믿고 있는 증거다. 십자가로 보이신 우리 육신의 삶을 지배해야 할 온전한 정신이자 인생의 목적 아닌 다른 게 삶을 지배하고 있으니 귀신 들린 것이다.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와 믿음은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지하는 것과 같은 것

 

따라서 세상 가장 실패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오늘날 신앙인의 모습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지하고 있지만 실상은 귀신 들린 상태다. 이 귀신 들린 자의 일이 오늘날 신앙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이렇듯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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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광풍이 이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일은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그리고 기독교인 대부분은 이 본문으로 적어도 한 번 이상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설교 내용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은 인생을 살면서 광풍과 같은 세상 풍파를 만나면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 구하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성경의 주제나 흐름은 흔히 듣는 설교의 주제와 궤를 같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세상의 풍파를 잠잠하게 한다는 걸 믿으라는 게 이 이적의 본질이 아니란 뜻이다. 이유는 예수님은 강제로 죽임당하는 세상 풍파 앞에서 끌려가셨다는 게 가장 핵심이고, 삶의 풍파의 뿌리는 모두 의식주에 있는데 예수님께선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문제이므로 사람이 걱정할 게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 세상 풍파의 대표인 가난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선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책망한 제자들의 믿음, 없다고 하신 믿음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풍파를 해결하신다는 걸 믿는 믿음이 아니다. 이게 보이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고 있지만 의도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예수님을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자기 삶에 혹시 닥칠 불행의 예방이나 꿈꾸는 일의 성취를 도와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이적을 가지고 세상의 풍파는 예수님께서 해결하시니 두려워 말고 믿으라고 설교하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광풍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셨다는 건 분명히 세상의 풍파를 잠잠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 건 맞다. 문제는 책망이다. 믿음이 없다는 책망 속 믿음이 문제다. 왜냐하면 광풍과 풍랑은 예수님께서 평안히 주무실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세상의 풍파는 두려움이나 안식을 깨는 요소가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평안을 깬 것은 광풍이나 파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두려움이었다. 이걸 주목해야 한다.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건 광풍과 파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두려움

 

세상의 풍파로 대변되는 바다의 풍랑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패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풍파가 자신을 삼키는 걸 두려워하는 건 성공과 평안에 대한 삶의 기대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에 휩쓸려 가듯 살게 될까 염려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사람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세상의 패자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그리고 우린 그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거나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의 풍파를 예수님께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게 온전한 믿음이라 생각한다. 이건 믿음이나 신앙의 영역 이전에 상식의 영역에서 이미 모순이다.

 

앞서 주목해야 한다고 했던 것, 예수님을 깨운 건 광풍과 파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두려움이란 걸 또 생각해보자.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세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독립의 문제는 물론이고 가난과 질병과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겐 예수님과 함께 해결해야 할 세상의 문제가 자신들을 죽게 할 수는 없었고, 또 자신들의 믿음이 이루어지기 전에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

 

예수님께선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세상의 풍파를 자신에게 의지하는 오늘날 신앙인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사람은 세상 풍파를 만났을 때 의심하지 말고 예수님을 찾는 게 믿음이라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 생각을 믿음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책망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기준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풍파가 두렵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미 파도가 치고 있는데 주무시고 계셨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세상 풍파를 두려워하여 평안히 쉬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깨웠으니 책망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은 세상 풍파를 예수님께 의지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걸 구원으로 믿는다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그게 구원이란 것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전한 말씀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처럼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평안한 삶을 산다는 믿음이고,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세상의 풍파를 해결하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믿는 믿음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세상의 패배자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요 우리도 그와 같아질 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세상일 해결을 돕는 주님으로 믿는 게 아니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세상의 풍파를 두려워하여 세상 풍파 앞에 평안한 그리스도를 깨우고 의지하는 건 믿음이 없다는 걸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므로 보여주셨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건 세상의 패배자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요 우리도 그와 같아질 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참 잘못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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