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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1-20) 씨 뿌리는 비유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6. 4. 11:22 Writer : 김홍덕

가시밭에 뿌려진 씨

씨 뿌리는 비유 속에서 가시밭에 뿌려진 씨에 대해 예수님은 세상의 근심과 염려를 이기지 못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는 생명이 되지 못한 예라고 설명하신다. 이런 사례는 쉽게 이해가 될 순 있지만 생각보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예수님의 비유 속 가시밭에 해당하는 신앙이 되려면 우선 씨가 심기고 싹은 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가는 사람은 사람의 예상과 달리 아주 적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비유 속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속한 땅은 길가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제대로 심기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가장 많다. 아니 대부분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육신의 삶의 성공과 평안을 바라고, 자칭 기독교인 혹은 구원받았다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같은 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즉 성공과 평안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은 씨가 뿌려진 길가에 속하는 사람이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신앙인 대부분은 돌밭이나 가시밭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 속 돌밭과 가시밭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히 좋은 밭은 어림도 없다. 다른 건 볼 것 없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한다는 건 아직 죄인이란 고백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그리스도일 순 없다. 이것 하나면 오늘날 신앙인들의 정체성을 증명한다.

 

하지만 사람은 가시밭을 넘어 좋은 밭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걸 목적으로 사람에게 육신 가진 인생을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그 목적 아래 있다. 씨 뿌리는 비유도 당연히 그 안에 있다.

 

사람이 생명의 말씀을 만나서 기쁨으로 순종하고 살아도 육신은 변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자신은 예수 믿는 사람이므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예수 믿는다는 게 삶의 형편이나 육신의 능력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기도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게 더 좋은 성적을 보장한다.

 

문제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 이전에 알지 못한 그리스도의 본성과 생명을 알고 자신이 그 삶에 빨려들고 있다는 걸 알아도 변하지 않는 육신의 형편을 그대로 순종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근심거리, 걱정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없어지진 않는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냥 피와 물을 흘리고 숨을 거두신 게 이 이치를 설명한다.

 

복음서 후반에 나오는 향유 옥합 사건 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진 않는다는 걸 분명히 하심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육신의 어려운 일을 기도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그 문제들은 창조하시고 경영하신 세상의 이치에 맡기신다. 열심히 일하는 게 문제를 더 잘 해결한단 의미다.

 

사람들이 바로 이 이치를 몰라서 세상의 일이 가시가 된다. 생명 있는 온전한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되면 그 귀함과 그 능력에 놀라고 감탄한다. 그래서 그 놀라움이 세상의 모든 걸 이길 거란 기대로 가득하게 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기대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육신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두 아시며, 아시기에 우리에게 육신을 주실 때 이미 그 문제에 대한 해답도 함께 다 주셨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란 말씀이 그것이고, 염려하므로 키를 자라게 할 수 없단 말씀이 그것이며, 가난한 자는 항상 있단 말씀이 그것이다. 이것을 아는 데서부터 세상의 염려를 이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 주신 걸 되레 문제 삼는 데서부터 가시가 자란다.

 

사실 이 세계는 신앙에 있어 제법 단수가 있는 세계일 수도 있다. 너무나 귀하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보니 그 귀함은 낮아지므로 얻는 것이고, 그 능력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꾸는 것임을 아는 세계다. 이게 말로는 쉽지만, 생명이 많이 자라야 여기에 이른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성경이 욥기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생명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세상과 자신과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바꾸는 능력이고 생명이다. 세상의 일은 염려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하시는 경영이다. 이 비밀을 알아야 그리스도의 생명이 장성한 데 이른다. 이건 아주 놀라운 세계다. 당연히 그만큼 힘들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신앙이 여기까지 이르면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다. 한 마디로 좋은 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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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1-20) 씨 뿌리는 비유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5. 27. 06:58 Writer : 김홍덕

돌밭에 뿌려진 씨

씨 뿌리는 비유 속 4가지 땅 중에 길가와 나머지 땅은 큰 차이가 있다. 좋은 밭은 말할 것도 없고 돌밭이나 가시밭은 모두 씨가 땅에 심기긴 했다. 땅에 심기지도 않고 새가 먹어버린 길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씨가 땅에 심겼단 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에 순종 되었단 뜻이다. 씨가 심겨 싹이 나려면 씨에 생명이 있어야 하고, 흙이 씨를 품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돌밭과 같은 사람의 신앙은 예수님께선 말씀을 듣고 기뻐했으나 뿌리가 없는 신앙이라고 설명하셨다. 뿌리는 깊이 박히기까진 제법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뿌리가 없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에 굳건히 자리 잡지 못했단 의미고,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을 견디지 못했단 의미다.

 

냉정하게 보면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가 전하고 공유하는 신앙은 사실상 온전하지 않다. 오늘날 기독교는 나름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고 말씀은 들은 사람이 거듭난다고 주장은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로 거듭났단 사람들은 항상 죄를 회개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죄가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므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생명이 없는 말씀을 전하고 듣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세상엔 이런 말씀만 있는 건 아니다. 생명 없는 말씀을 듣다 생명 있는 말씀을 접하게 되면 정말로 기뻐한다. 이 블로그나 책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 온 사람들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깊이 뿌리 박히기까지 잘 견디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많지 않다. 어떤 이들은 기쁨에 도취해 모든 것을 맘대로 하는 자유에 빠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한풀이하듯 이전 신앙을 비판한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말씀이 추구하는 바는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싹이 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진 끊임없이 말씀을 듣고 생명의 말씀이 이끄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생명이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은 손바닥 뒤집듯 백배의 열매를 맺게 하시진 않는다. 생명은 그 본성이 이끄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문제는 말씀에 생명이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문제가 어디서 출발했든, 누구에게 책임이 있어 보이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존재가 되느냐에 대한 책임은 결국 각 개인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사람이면 알 수 있게 다 전하셨고, 또 그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어김이 없다.

 

그 약속을 좇아 생명의 말씀을 만나면 그 기쁨은 놀라울 정도다.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기 순간의 기쁨을 기쁨의 전부로 아는 게 아니다. 그와 같은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삼십 배, 육십 배 백배가 될 수 있도록 삶이 생명 있는 말씀이 되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다.

 

생명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의 기쁨이 신앙의 모든 게 아님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 특히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건 신앙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한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얼마간의 신선함으로 자신만의 신앙 세계를 구축하고 신앙은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면 돌 같은 율법이 심령에 내재하게 되어 더욱 그렇다.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 너무 기쁘다. 이 블로그를 보고 많은 이들이 그렇게 고백했었다. 심지어 한달음에 달려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그 기쁨을 이어간 건 아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간이동으로 애굽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게 아니듯 생명의 말씀이 싹이 나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 백배의 열매를 맺기까진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이 이끄는 여정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주도적으로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로 이 비밀을 말씀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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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도만 자랑하고 전한다고 했지만 바울 사도도 처음부터 그것만으로 될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세상 지혜가 권하는 말이 아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성령이 보이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전 2:10)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그러나 고린도 교회나 오늘날 교회의 설교는 그렇지 않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이 세상의 성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에 관한 지혜다. 따라서 이런 설교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모두 세상 지혜가 권하는 말로 복음을 전하고 듣는 사람이다.

 

이같이 세상 지혜가 권하는 설교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와 반대로 가는 사람이다. 십자가는 어느 모로 보나 세상에서 실패한 자리다. 그것도 가장 실패한 자리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전하는데 이기고 높이 올라가는 법의 세상 지혜, 사람의 지혜를 인용하고 의지한다는 건 모든 게 잘못된 것이다.

 

세상에 있는 지혜와 여러 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 있는 일이다. 따라서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의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만 전하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세상의 지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과 그의 일들을 성령과 성경의 증거로 설교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전하는 이들에게 성령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설교를 듣는다. 또 많은 설교들이 있어 자연스레 비교도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설교는 화려해졌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는 의미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아름답고 화려한 말로 설교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들이 망각한 게 있다. 설교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란 거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부할 이유가 없다. 성령만 오시면 모두 알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성경을 공부하는 신학을 만들고, 성경 말씀 성취를 증명하기 위해 세상의 일을 인용한다는 건 모순이다. 바보 거나 사기꾼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 중반 이후 성령의 능력이자 정체성을 전한다. 그 핵심은 성령은 모든 것을 통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엔 성령의 능력을 본질적으로 언급한다. 주목할 것은 성령의 능력은 곧 기적이란 일반적 인식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바울 사도의 관점은 고린도전서 전반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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