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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1-20) 씨 뿌리는 비유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5. 21. 05:58 Writer : 김홍덕

씨뿌리는 비유의 배경

사람 안에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생명이 되면 비유든 아니면 직설적인 화법이든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이해된다.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본성, 같은 뜻, 같은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난다는 건 바로 그런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굳이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아도 되는 사람, 곧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그리스도로 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대로 알아듣고 살게 된다. 무엇보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생명은 그런 존재다. 따라서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신학이란 학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려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인자가 사람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씨앗, 곧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심겨야 한다. 씨 뿌리는 비유는 이 법 안에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선 사람을 향해 항상 말씀하고 계신다. 항상 씨를 뿌리신단 뜻이다. 이 말씀이 사람 안에 심기는 건 사람에게 달렸다. 사람이 순종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신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온전함을 순종하고 마음에 두는 게 듣는 거다. 이게 믿음이다. 순종하면 말씀이 심령에 심긴다. 믿음으로 심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신다. 이런 상태가 되지 않는 게 성령 훼방이다. 무엇보다 말씀이 생명이 된 그리스도가 되는 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고,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씨 뿌리는 비유 속 땅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심을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서 이루어지는 건 창조의 최종목적이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이고 뜻이다.

 

씨 뿌리는 비유 속 땅은 돌밭, 가시밭, 길 가, 그리고 좋은 땅 이렇게 4가지인데 누구나 알 듯 사람의 마음 상태를 비유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의 모습을 4가지의 땅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길 가, 돌밭, 가시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다.

 

반면 좋은 땅은 뿌려진 씨가 풍성한 열매가 되는 땅이다. 씨 뿌리는 이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사과를 기대하고 사과를 심은 농부에게 좋은 사과를 내어놓는 땅이 순종하는 땅이듯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게 순종하는 사람이고 좋은 땅이다. 한 가지 착각하면 안 되는 건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거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한다는 생각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땅은 땅에서 자란 생명을 따라 땅의 이름, 곧 정체성이 바뀐다. 사과를 심으면 사과밭이 되고, 복숭아를 심으면 복숭아밭이 되는 게 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심령에 심긴 말씀이 성령으로 인하여 생명이 되는 게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법이다.

 

길 가와 같은 사람

이제 4가지 땅을 이야기해 보면, 길 가는 뿌려진 씨를 새가 와서 먹어버리듯 사탄에게 말씀을 뺏기는 사람이고, 돌밭은 뿌려진 씨가 돌 곧 자신의 의가 크고 많아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니 금방 시들어 버리는 이며, 가시밭은 가시와 같은 세상의 근심이 많아 말씀이 생명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명하셨다.

 

길 가는 엄밀히 말하면 씨가 심기지도 않은 땅이다. 새가 와서 먹을 정도면 씨와 땅이 하나가 된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심기지도 않은 사람에 대한 말씀이다. 말씀을 인생을 사는 하나의 옵션으로 여기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4가지 땅 중 여기에 속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아마 많은 기독교인은 길 가에 속한 사람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심기지는 않았으나 씨는 뿌려졌다. 말씀은 들었다는 의미다. 말씀은 들었는데 심령에 심기지 않은 사람, 이게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말씀이 심긴다는 건 심령에 순종했단 뜻인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말씀이 심기면 그 말씀이 씨가 땅에서 썩듯 갈등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갈등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낮은 곳으로 끌고 가는데 사람은 높은 곳을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갈등은 없다. 왜냐하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여 세상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낮은 데로 가려는 본성을 가진 씨가 높은 데를 앙망하는 땅을 만나 그 속에 들어갈 수는 없다. 씨가 뿌려졌지만 심기지도 않았단 건 교회에 다니면서 설교를 들었지만 한 번도 심령에 심겨 자신이 원하는 바와 다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느껴보지도 못한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이 여기 해당한다.

 

많은 신앙인에게 신앙은 옵션이다. 삶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긴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세상에서 도덕적인 사람으로 살기 위해 가져야 할 덕목 정도로 여긴다. 사람의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 착한 사람으로 살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고, 그 보답으로 복된 삶, 성공한 삶을 주실 것이라 믿는 신앙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생활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하게 사는 삶을 도울 도구로 가지고 있다는 게 드러나는 게 신앙인들의 소망과 기도다. 이런 소망과 신앙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길과 반대다.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씨가 심어질 수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자신이 씨 뿌리는 비유 속 길 가에 속한다고 생각하진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이 낮고 낮은 십자가로 자신을 인도하는 게 신앙적 관용구 정도일 뿐 자신을 괴롭게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하게 이끌어 주시길 기도하고 있다면 명백히 예수님의 비유 속 길 가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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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부르심을 입는다라는 말은 어떤 부르심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는 의미다. 간혹 어떤 이들은 부르심을 사회적으로 반복된 실패를 신학을 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고, 그 목적이 자기 삶이 되고,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는 세상 지혜의 어리석음을 권면하면서 하나님께서 미련한 자, 약한 자 그리고 천하고 멸시받는 없는 사람을 불러서 있는 자들을 멸하신다는 말씀을 인용한다. 성경에 이런 맥락의 말씀이 많아서 간혹 하나님은 Underdog를 좋아하신다는 착각을 낳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방신학이다.

 

하나님께서 없는 자로 가진 자를 이기게 하신다는 건 가졌다는 육신의 어떠함이 자랑거리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나 세상 가치 기준으로 강한 것이나 세상의 부유함은 육신의 어떠함이지 하나님께서 본질로 여기시는 인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나 강함, 그리고 부유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신 본질이 아니다.

 

우리가 눈여겨볼 건 이 말씀을 분열을 겪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권면에 인용한 사실이다. 이는 세상의 지혜로 신앙을 투영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세상 지혜가 옳다고 여기는 걸 하나님은 어리석게 여기심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세상의 지혜는 세례의 형식, 어느 사도를 옹립하는지로 신앙을 가늠한다. 어떤 것이 더 높고 좋으며 강한 것인지를 따지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에게 책망받는 고린도 교회나, 세례의 형식으로 교단이 나뉜 오늘날의 기독교가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례를 형식 아닌 본성이 죽고 다시 살았는지 본질을 보신다.

 

이 세상의 지혜를 십자가를 매우 어리석게 여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높아지는 게 아니라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세상 지혜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우리에게 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이게 예수님의 부르심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부르심을 입는다는 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그 생명의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다. 이 생명으로 나는 게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낮아지는 생명만을 자랑한다고 했다.

 

부르심을 입는다는 건 높은 곳을 앙망하는 세상 지혜와 달리 낮아질 수밖에 없는 생명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란 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본성에 이끌려 낮은 자리에 가치를 둔다. 이 생명은 낮고 낮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이 드러나는 것을 본능으로 안다.

 

그리고 가치를 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긴다는 가치를 안다. 그래서 이것만 자랑한다. 자기 생명의 본성이자 가치며, 인생의 목적이다. 또한 낮아지는 본성은 분쟁이나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다. ‘네가 옳다인정하는데 분쟁이나 다툼이 일 수는 없다. 분쟁 속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 부르심과 십자가의 도를 권면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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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과 귀신에 대한 논쟁을 거치면서 예수님께선 시비를 거는 이들을 성령 훼방이라고 강하게 책망하신 이후 특별한 시비는 줄고 예수님이 주도하는 시간과 사건들이 이어진다. 비유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시며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등 주도적으로 복음을 전하신다.

 

특히 복음을 비유로 전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눈에 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어떤 이들이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 말씀이 그것이다. 마가복음의 구성으로 본다면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을 겨냥한 말씀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그들로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막 4:12)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께서 특정한 이들을 배제하는 모양새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성령 훼방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아니라 상태다. 생각해보면 성령의 훼방하는 상태나,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는 같은 상태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결과도 같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구원에서 배제하시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죄와 사망에 빠져 있다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성령을 훼방하는 상태, 예수님을 보아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인생을 산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이 오시기 전,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형성되는 만남 이전에는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이고 말씀을 들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둘로 나뉜다. 자신의 가치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살아왔던 자기 삶이 그릇된 것임을 알고 돌이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돌이키는 사람은 구원받고 비유의 말씀도 자기 것이 되나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에 머문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전해졌으므로 지금 인류는 그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건 오늘날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상태다. 누구나 동의하듯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구원을 받은 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구하고, 육신의 정욕에 속한 먹는 것, 시험 치는 것, 연애나 자녀 그리고 육신의 건강과 같은 걸 구하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걸 보면 대부분이 이런 사람이다.

 

육신의 필요를 구하고 세상에서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기 전이나, 다니는 지금이나 여전히 세상의 것을 구하는 사람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변화가 없는데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는 없다. 먹이가 같고, 본성이 같으며, 소망과 평안과 안식이 같은데 다른 생명이라고 할 순 없다. 이같이 육신의 정욕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건 거듭난 게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빌미로 세상 사는 자기 육신의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들에겐 비유를 포함한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은 자신이 구하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얻는 방법, 도구, 지혜, 가이드일 뿐 자기 본성에서 비롯된 삶의 모습은 아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전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

 

이처럼 너무나 아쉽게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대부분은 구원도 없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셔서 알아듣지 못하게 하겠다는 사람에 속한다. 너무도 분명히 예수님은 낮고 천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음에도 세상에서 높여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이게 바로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낮고 천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게 예수님을 보고 들어도 알지 못하는 것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심은 복음을 차별적으로 전하시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만 구원하시겠다는 고약함을 가지셔서가 아니다. 비유든 직설적 화법이든 예수님과 같은 생명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란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성령께서 역사할 여지가 없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바로 심기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방식의 설명도 의미 없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이상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그들에겐 바로 이야기해도 비유로 들린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어두움이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안목, 같은 생각을 하는 존재로 났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하나님께선 낮고 낮은 십자가에서 사람 지으신 뜻을 보이셨는데, 그 십자가를 이용해 세상에서 높고 평안한 곳으로 가려는 생각으론 그 어떤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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