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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영상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세상의 지혜 vs. 십자가의 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 중반에서부터 세상의 지혜에 대해 말씀한다. 생각해 볼 것은 교회에 분쟁에 대해 권면의 말을 하는 중에 세상의 지혜를 논한다는 점이다. 그건 세상의 지혜가 교회 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겐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리한 바울 사도는 그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지혜를 멸한다는 이사야 말씀을 인용했다. 십자가의 도와 세상의 지혜를 대립시켰다.

 

이를 종합해보면 고린도 교회가 분열에 휩싸인 건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따랐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세상 지혜를 좇는 게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도와 세상 지혜는 반대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는 낮은 곳에서 영광을 얻었고 세상의 지혜는 높은 곳에 영광이 있을 거라는 허상을 좇는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 사람 곧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십자가의 도는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의 반대쪽에 있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위를 앙망하는데 나 홀로 낮은 곳에 존귀함과 영광이 있다고 반대로 가는 것을 는 세상 사람은 당연히 미련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게 드러났고, 이를 보고 사람이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걸 발견하므로 구원받아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 십자가의 도는 이렇듯 낮고 천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거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지혜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 세상의 지혜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하나님의 지혜는 낮은 데 감추었으니 높은 곳에 올라가는 묘수를 지혜로 여기고 좇는 세상 사람과 지혜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높여 올려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주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좇는 자들을 멸망하는 자들이라 하시고, 그들의 지혜를 미련한 것이라 하신다. 그리고 또 이를 멸하신다고 수없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와 이를 앙망하는 사람이 미련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 구원하시는 걸 기뻐하신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지혜가 판단한 하나님 아들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다. 예수님의 외모를 보고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심판한 세상 지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죄악이다. 반면에 세상의 지혜로 볼 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심판받아 처형되는 건 어이없을 정도로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십자가의 도>.

 

이렇듯 십자가의 도를 알고 보면 세상의 지혜는 어리석게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 지혜가 가진 가치 기준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다.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에서 나서 죄인과 세리와 창녀와 먹고 마시던 남루한 차림을 한 사람을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볼 수 있는 세상 지혜는 없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렇듯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비난할 수밖에 없는 길을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건 흔히들 이야기하는 인류 구원의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본성이 아닌 사명감이나 신념으로 십자가를 질 수는 없다. 그리고 본성은 생명에 종속된 고유한 성질이다.

 

예수님을 이렇게 세상 지혜와 반대의 길로 이끈 그리스도의 본성은 곧 우리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을 보이신 이유가 여기 있다. 누구라도 그리스도로 나야 한다. 세상 지혜가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선 영광으로 여기신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지혜와 영광으로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자기 생명으로 순종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창조 목적 안에 들어오기를 항상 부르시고 있는데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 부르심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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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25)

 

유명한 이 말씀은 때로 육신의 혈육보다 신앙공동체를 우선하라는 말씀으로 적용되기도 한다. 특히 이단, 비상식적 신앙공동체에서 그렇다. 당연히 올바른 방향이라 보기 어렵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선 당장 이 마가복음에서만 부모를 공경하란 십계명을 두 번(7, 10)이나 인용하신다.

 

신앙인이라면 이런 상충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상충하는 말씀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곤란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에 관한 일이므로 사실상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에 대충은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는 게 이 말씀의 핵심이다.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분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에서 말씀LOGOS 즉 계획, 의도, 뜻이란 의미를 가진 말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계획이 육신과 삶이 된 분이란 뜻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요 자매고 모친이란 말씀이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부모이므로 육신으로 혈육은 관심 없는 듯이 말씀하시기도 한 성경 말씀이 언뜻 상충하는 듯하지만, 육신이 된 예수님의 관점에선 너무 당연한 표현이다. 하지만 육신의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자극적인 말씀으로 들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안목으로만 보는 이단들이 오해하기 쉬운 이유다.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신 이 말씀엔 더 깊은 부분이 있다. 우선 혈육으로 형제자매 그리고 부모가 결정되려면 생명이 있어야 하듯 하나님의 뜻으로 형제자매가 된다는 건 하나님의 뜻이 곧 생명이란 의미다. 성경 전반에 기록된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에게 생명인 하나님의 뜻은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진 뜻(창조 목적)이 육신이 된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없는 사람은 육신이 멀쩡하게 살아 있어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이 말씀이 혈육의 형제자매에 관한 말씀이 아님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사람이다. 교회에 가서 세례 문답으로 구원받았다 착각한 상태에서 습관처럼 자신이 예수님의 형제라고 뇌까리는 교회 다니는 이들은 뭔 당연한 소리를 또 하느냐? ‘ 말하겠지만 이건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이 아직도, 오늘도,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한다는 게 문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의미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당연히 그런 상태를 예수님의 형제 혹은 구원받았다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 기도하고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도 알 수 있다. <행한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성경을 육신의 행동으로 지키면 하나님 아들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아들, 형제, 자매, 모친 이 모든 관계는 생명으로 낢이 있어야 형성되는 관계지 행동의 성과로 얻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이게 보이지 않으면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거다.

 

생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뜻이 자기 생명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즉 사람으로서의 생명 본성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이 거듭남을 구원이라 말씀하시는 이유도 이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난 생명이어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다. 교회 다니는 이들이 하듯 성경을 보고 그대로 행하려는 건 로봇이 명령문을 입력받아 움직이는 것만 못 한 것이다. 생명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려면 하나님의 뜻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야…

 

이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란 말씀은 혈육보다 신앙공동체를 우선하라는 말로 이용하는 어리석은 종교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의 뜻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이 자기 생명 본성이 되어야 예수님의 형제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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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는 구변과 증거와 은사가 넘쳤지만 서로 다투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오늘날 세례의 형식으로 교단이 달라지듯 신앙적 이유로 다투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 이유를 세상의 지식을 좇기 때문이라고 책망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의 지혜가 신앙의 분쟁을 일으키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세상의 지혜와 십자가의 도는 방향성이 다르다. 그리고 정체성도 다르다. 세상의 지혜는 높은 것을 좇고 사모하며 추구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낮고 천한 것이다. 낮고 천한 자리에 하나님의 도가 있다. 또 세상은 나타난 것 곧 형식이고, 십자가는 의와 내용이다.

 

특히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인생을 들여 추구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에 부여된 가치를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세례의 형식을 두고 교단이 갈라졌다는 건 세례를 어떤 형식으로 행하느냐에 따라 세례가 유효하거나 혹은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신념과 가치와 주장을 낳는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이랬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다.

 

바로 사람의 이런 생각과 가치관과 주장이 세상의 지식이다. 이 지식에 의해 사람이 추구할 것이 정해지고 추구하는 수단과 방법이 정해지면 결과를 평가한다. 그리고 방향은 높은 곳을 향한다. 세상의 지혜의 기본 유전자는 바로 피라미드 위를 향하는 본성이다.

 

이런 세상의 지식은 반복적으로 언급한 대로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고, 지금도 그렇다. 문제는 그렇더라도 구원이 담보된다면, 그런 문제는 신앙의 작은 부분이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데 있다. 가치관은 생명에서,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독수리와 늑대는 썩은 고기에 진정한 가치를 두지만, 양과 염소에겐 하등의 가치도 없는 것과 같다.

 

더욱이 십자가의 도와 세상의 지혜는 방향이 다르다. 남과 북, 각각을 향해 달리는 것은 근본부터 다르다. 즉 세상의 지혜로 신앙을 보는 건 진정한 구원을 받았다고 하기 어렵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높은 곳이 아닌 낮고 천한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귀하면 세상의 지혜는 천하게 되고, 세상의 지혜를 사모하면 십자가의 도는 천한 것이 되는 관계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이다. 세상의 귀하고 비싼 것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믿고 말하는 것 역시 모순일 뿐 신앙이 아니다. 세례는 어떤 형식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성경은 특정 성경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 같은 건 모두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한마디로 분열이 있다는 자체로 이미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세상의 지혜가 분열을 일으키는 이유는 육신의 정욕을 좇기 때문이다. 육신은 그 자체가 형식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 내용을 채울 형식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중요한 인생의 목적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육신을 위해, 육신의 눈이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고 인생을 산다. 이것이 형식을 본질로 보는 것이고 세상의 지혜를 사모하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위로 갈수록 좁고, 사람이 가진 세상의 가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것을 주장하니 싸움이 나고 분쟁이 일어난다. 바벨탑을 쌓을 때 언어가 달라졌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늘로 가고 싶은 욕망은 같아 보이지만 추구하는 것이 다르니 말이 다르고 이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사건이 바벨탑 사건이다. 세상의 지혜가 일으킨 분열의 상징이다.

 

십자가의 도는 이와 달리 낮아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며, 우리가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이유이자 채워야 할 것인데, 이것과 달리 높은 곳을 추구하는 세상의 지혜로, 자기 육신이 바라는 걸 하나님께 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도와 복음을 보니 다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분쟁의 이유이고,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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