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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병든 것이 비정상, 안정되지 않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반대는 정상적인 상황, 안정되고 평안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을 일반적으로 안식이라고 하고, 안식의 상징은 이다. 여기서 한 가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일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죄가 사함받았다는 말씀하심으로 낫게 했다. 누가 생각해도 병을 낫게 하는 방법으로서 쉽게 이해되는 표현은 아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것이 쉽다고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병든 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예수님은 육신의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이 죄를 사한다는 말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마음으로 참담하게 여긴다는 것도 다 아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는 상대적으로 일반상식적인 표현보다 죄를 사한다는 말이 더 쉽다고 했다. 더 쉽다는 건 더 적합하고 맞는 말이란 의미다.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의 반발을 아신 예수님께선 다시 네 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관점에선 더 쉬운 말일 수 있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선 더 어려운 말이라며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이 말이 예수님께서 태도를 바꾼 걸 의미하진 않는다. 이건 안식이란 관점에서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안식을 얻는다는 말이고, 안식을 얻었다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에게 있어 안식은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 거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존재 목적 안에 들어갈 때 안식을 얻는다. 어떤 일이든 목적대로 완료되면 쉴 수 있고, 일이 끝나고 안식할 수 있는 자리가 집이기 때문에 집이 안식인 것처럼.

 

죄는 자기 자리,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죄가 있으면 안식할 수 없다. 이상하고, 고장 나고 병든 건 쉴 수 없다. 자기 자리, 자기 본연의 존재 목적 상태를 벗어나면 안식을 누릴 수 없다. 학생이 수업 시간에 오락실이나 당구장에 있으면 불안한 이유다. 그러므로 자기 자리를 벗어난 죄인의 상태인 병자에게 집, 곧 안식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죄사함 받았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병이 낫는 기적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이들(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 문둥병자 등을 치유하는 걸 봤다. 단순하게 병이 낫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영광으로 여기시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영광이란 말의 뜻을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먼저는 만약 육신의 병이 치유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신다면 병이 나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광은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이치를 생각하고 성경을 봐야 한다.

 

그리고, 영광의 의미다. 영광은 헬라어로 독사’(δξα)‘라고 하는데, 생각하다, 나타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마라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는 의미다.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과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나타내고자 하신 일을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창조 목적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것이다. 즉 자기 자리를 떠난 죄에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안식이다. 죄인의 모습을 대변하는 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집이라는 안식으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 목적을 떠난 사람이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얻는 것

 

중풍 병자가 고침을 받는 모습, 그것이 죄사함이자 안식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이 나타난 것이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모습인 병자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사람을 안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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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12) 중풍과 죄사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3. 24. 09:10 Writer : 김홍덕

육신은 멀쩡한데 정신을 빼앗긴 귀신 들린 것, 하나님의 말씀을 느끼고 깨닫지 못하는 문둥병,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중풍 같은 육신의 삶. 성경에 나오는 병들은 이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하나님과 사람 관계, 곧 죄로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의 상태를 죄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런 병들을 고친 것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을 보여주심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 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생명이 되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에게 네 죄가 사함받았다.”고 하신 것같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하지만 어지간해선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유는 자신을 볼 때 죄 없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의 행위를 보고 죄라 하지 않는다. 행위는 존재 정체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행위 이전에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정체성,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다.

 

여기서 죄의 개념까지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사람의 생각처럼 행위가 아니라 정체성이 죄의 기준이다.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 아담에게 물으신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 하나님이 보시는 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다면 중풍 병자와 죄사함이란 관점에서 조명해 볼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과 같은 죄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의 죄는 당연히 하나님의 개념이기에 예수님께서 사하시는 죄 역시 정체성에 관한 죄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사람은 행위를 죄의 기준으로 삼기에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니 다른 사람도 죄인인 상황에서 누가 누구의 죄를 사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마주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이것을 보여준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사람, 그것도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이란 천한 동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데, 그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사했다고 말하니 강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혹은 신으로 인식하는 지금도 죄에 대해선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앞서 전도를 이야기할 때, 전도란 거듭난 사람,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과,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자 자기가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모습으로 깨닫고 믿으면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또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임을 설명했다.

 

말씀이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역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보고 믿음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이 거듭남이고 전도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거듭난 사람에게 죄가 없듯, 예수님을 보고 거듭난 사람을 보고 거듭난 사람 역시 죄가 없다. 죄가 있는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있도록 먼저 그리스도로서 삶을 산 사람의 삶은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의 삶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다른 사람을 죄에서 구하고 죄 사함을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자, 곧 사람이 죄를 사하는 권세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 2:10)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보이셨음에도 사람은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심지어 오늘날은 다른 사람의 죄는 고사하고 자신도 죄가 없다고 믿지 못한다. 교회에서 기도를 가르칠 때 먼저 회개부터 하는 것은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믿지 못함이다. 회개는 죄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같이 분명하고 쉬운 복음 앞에서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죄가 무엇인지, 거듭남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신앙인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희망 사항일 뿐 자신도 자신이 죄 없는 존재라는 확신이 없는 상태를 거듭난 상태라고 하는 모순과 어두움 속 희망 고문일 뿐이다.

 

또한 이 어두움 속 신앙인들은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치유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으로만 본다. 병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상태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그 관계의 회복, 곧 죄를 사함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듭남과 구원과 죄와 예수님 치유의 본질적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게 죄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서 노력하는 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이 된 말씀이 없기 때문이고, 삶을 이끌어갈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상태가 죄다. 그리고 우리 육신 곧 삶이 돼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인생의 목적이다. 이것에 대하나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은 죄인의 모습인 중풍 병자 같은 모든 사람 말씀이 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육신이 깨어지므로 육신이 된 말씀을 드러내셨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신을 발견하면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님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다른 사람의 죄도 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래서 중풍 병자에게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고치신 중풍 병자의 모습에서 말씀이 삶이 되지 않은 자신이 발견될 때 구원이 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신 일이 자기 일이 되고 또 남의 죄를 사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신앙의 여정과 고백 없이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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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사도로서 문안하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주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감사하면서 서신을 시작한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이 문안에는 주목할 게 있다. 고린도 교회에는 모든 구변과 지식이 풍족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하며,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는 걸 언급한 점이다.

 

바울 사도의 이 문안은 칭찬성 문안과 권면인 듯 보이지만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와 십자가의 능력을 대비시키는 고린도전서 흐름을 고려하면 구변과 지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은사도 견고하고 풍성하다는 언급은 액면 그대로 칭찬이라 보기 어렵다.

 

구변과 지식과 증거와 은사가 견고하고 풍성하다면 신앙적으로 안정적이고 분쟁보단 화합하는 모습이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지식과 증거와 은사가 풍성한데 분쟁에 휩싸였다. 그것도 신앙적 관점에서. 그들이 가진 신앙적인 지식, 간증의 증거 그리고 많은 은사가 화목이 아닌 신앙적 주장을 펼치며 대립하는 분쟁의 도구가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아주 귀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귀함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을 세상의 꼭대기에 두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세상에 없는 하나님의 이 존귀함은 낮아지는 데 있다는 걸 사람이 모른다. 이 어두움으로 인해 신앙적 가치 기준으로 더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을 높이 올려놓는다. 신학적 자격을 가진 사람을 강단 높이 세우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알고 보면 하나님 말씀의 존귀함은 낮아지는 것

 

고린도 교회도 그랬다. 지식과 증거와 은사의 풍요 정도가 상대에게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의 생각과 가르침을 상대가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내 말이 옳다는 주장이 부딪혀 분쟁이 되기 때문이다. 세례는 침례가 옳다는 것과 안수만으로 된다는 주장이 교단이 갈라진 것도 맥락이 같다.

 

이런 분쟁은 풍성한 신앙적 지식, 증거, 은사의 존귀함이 낮아지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존귀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열어보면 십자가로 낮아지는 것임을 모르면 신앙적인 많음이 권세가 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성령만 오시면 알게 되는 말씀을 몰라서 공부한 신학을 수학했다고 대접받는 목사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의 어떤 요소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려 하고 우위에 서려 하며 대접을 받으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른다는 증거다. 귀한 것은 높아지고 대접받는다는 세상의 가치 기준을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귀한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라는 낮고 낮은 모습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신앙적으로 갈라지고 분쟁하는 이유가 세상의 지식을 좇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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