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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또 다른 주제로 교회 안의 일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놀랍다. 바로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 두고 세상의 일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판결하고 심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세상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자니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분별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법정에서 교회 일을 다투는 건 이제 흔한 일이다. 바울 사도의 의도를 알고 나면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상했는지 알 수 있다. 세상 법정에서 판단하겠다는 건 세상 지혜에, 세상 가치에, 세상 기준에 의해 신앙을 조명하는 본심의 발로다.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이 세상 지혜의 법에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으로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세상 법정이든 어느 법정이든 가서 판단을 받겠다는 건 해결해야 할 문제와 다툼이 있다는 의미다.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가치관, 옳다는 주장이 충돌하고 다투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 한 분이며 고린도 교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역시 하나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 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5-6)

 

바울 사도는 성도는 오히려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말씀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난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스스로 성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세상의 판단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판단할 정도로 세상의 모든 이치와 지혜를 아는 사람인지 반추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이 성령 안에서 씻고 깨끗한 사람이며 이미 있다고 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그리고 이 말씀은 신앙의 다른 부분을 조명할 수 있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육신이 당면한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이나 심지어 영빨 있는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모습도 복음을 세상 법정에 가져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나서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 겪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건 모든 측면에서 모순이다.

 

육신의 삶에서 마주한 세상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역시 복음을 세상 법정에 가져 가는 것

 

그런데 이런 모순이 옛날 고린도 교회에도, 또 오늘 우리 옆에 있는 교회에도 있다. 이 모순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한 불의를 행하는 것이고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났다면 세상의 이치를 알 것임에도 세상 법정에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가져가 다투는 건 하나님의 의와 다른 모습이니 악행이고, 세상의 이치를 알지 못해 세상에서 송사하는 주제에 자신을 성도라 하니 자신과 상대를 속이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세상의 이치는 세상 이치와 달리 낮아지는 것이다. 서로 낮아지려는 이들끼리 다툴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모습이 그렇다. 예수님의 그 모습이 본성이 된 사람이 성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치와 지혜가 육신이 된 분이고, 그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당연히 세상 이치를 밝히 아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사람이 어떻게 세상 이치를 다 알 수 있는가?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절대 성도가 아니다. 모든 이치라고 할 때 그 범주를 아주 높고 귀한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알기 원하는 세상 이치는 낮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그 법 안에서 보면 정말 세상의 모든 지혜와 이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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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14-28) 능치 못함 없는 믿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2. 30. 06:41 Writer : 김홍덕

산 위에서 베드로가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 앞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선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 말씀만 들으라고 하셨다. 반면 산 아래에선 어릴적부터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부모가 데려와서 제자들에게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셨다.

 

할 수 있다면 고쳐 달라는 간청의 말에서 불과 물에 넘어지는 벙어리를 고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아니라 믿는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아이를 고치신 한편 제자들과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3)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믿는다. 살아가며 겪는 원치 않는 문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믿어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문제 해결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고 계신 게 아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다.

 

사람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이나 그리스도를 믿는다. 육신이 겪는 삶의 문제가 인생의 문제고 그리스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 대부분이 예수님을 이런 존재로 믿는다. 육신이 겪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육신의 능력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기적을 기대하고, 육신이 율법을, 성경을 잘 지켜 행하는 정성이 그 기적을 부른다고 믿는다. 불과 물에 넘어지는 게 이것이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게 이것이다. 사람의 이런 믿음에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통해 믿음을 재정립하고자 하신다. 

 

지금 이 두 사건이 진행되는 시간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고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건 그리스도는 육신이 겪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씀하신다.

 

반면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한 이유다. 사람의 이렇듯 육신의 일을 인생의 본질로 여긴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고 믿는 이유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은 육신의 어떤 문제라도 예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문제는 육신이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 육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전하러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전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인생의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걸 믿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건 곧 우리의 모습이자 존재 목적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다. 사랑 아들이니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심이 이런 뜻이다.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임을 믿는 믿음

 

그리스도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믿으니 육신 이상의 능력인 불같은 기적을 기대하고, 이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역사해줄 마음이 들도록 성경을 율법처럼 행위로 지켜내려는 신앙생활을 한다. 이런 믿음과 신앙을 바탕으로 육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 믿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가진 가장 크고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존재가, 그것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하는 존재인 사람이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이상의 문제는 없다. 예수님은 바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능치 못함 없는 믿음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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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5장에선 지금이라면 용납되지 못할 일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간음한 자가 교회에 버젓이 다니는 게 용납되는 일이다. 특히나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건 간음한 자들은 뉘우치지 않고, 교회는 세상 지식화한 복음으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일이다.

 

복음을 세상 지혜와 같은 법으로 대하면 생기는 문제가 있다. 복음은 문장으로 보면 행간에, 법률로 보면 법리에 본질이 있다. 반면 세상 지혜는 문장 구조와 맞춤법 혹은 화려한 구사를 지향한다. 법률은 암기와 응용, 활용이 능력이다. 이런 관점으로 복음을 다루면 결국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하는 게 복음적이란 결론에 도달하려 한다.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간음한 자를 교회에서 용납한 일이 그렇다. 명백한 죄인 간음을 용납하려면 기술적으로 복음을 이용해야 한다. 담배 피는 사람이 성경에 담배 피지 말란 말이 어딨느냐?는 식의 항변 기술이 있어야 한다. 이런 기술이나 개념은 복음을 세상 지혜로 조명하면 생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이런 어리석음은 교만함이라고 부연한다. 자신이 전한 복음에 없는 일을 의롭게 여긴다는 건 복음보다 자기들의 생각이 더 옳은 것이라 생각한다는 의미다. 간음한 자를 용납하는 명분을 생산하는 생각과 그 생각의 동력인 세상 지혜가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있다는 책망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었다면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이런 자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구원을 얻게 하할 것이란 다소 난해한 말씀을 이어간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오늘날도 이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바울 사도의 책망이 간음 자체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는 걸 알고서 보면 낫다. 지금 책망은 간음도 간음이지만 간음한 사람을 버젓이 수용하는 명분과 명분 생산의 동력인 세상 지혜다.

 

고린도전서는 줄곧 세상 지혜를 경계하라고 말씀한다. 바울 사도가 사탄에 내어 주라는 사람은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여 자의적으로 복음을 해석하여 간음한 자를 용납하는 게 복음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단에게 내어 준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렇게 해야 교회에 온전한 구원이 있다는 말씀이다. 세상 지혜를 경계하라는 권면의 연장선 위에 있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누룩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누룩은 아주 작지만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드는 것의 상징이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세상의 지혜, 세상 지혜로 복음을 조명하는 신앙, 이런 것들은 교회 안에 작은 부분이지만 누룩과 같다. 더욱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서 당연하게 받아진다. 그러나 이건 명백히 하나님 지혜에 반하는 것이다.

 

언제나 언급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낮아질수록 영광이나 세상 지혜는 높아지는 걸 추구하고 인도한다. 이건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너무 익숙한 진리와 명분이다. 그래서 교회도 이걸 진리처럼 여긴다. 신학이란 세계 안에서 경쟁해서 이기고 높아진 사람이 더 큰 교회의 목사가 되는 법 그 하나가 교회가 세상 지혜라는 누룩으로 상했음을 증명한다.

 

바울 사도의 때에 고린도 교회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자들을 용납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그럴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것을 책망한다. 그러나 이 간음한 자를 용납한 건 하나의 대표적 사례다. 교회가 너무나 많은 것을 세상 지혜에 의지하여 용납한다. 더 비싼 전자오르간을 설치하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는 생각으로 대변되는 수많은 누룩이 교회와 복음을 잠식했다. 바울 사도는 이 모든 것을 사탄에게 내어주고 구원을 얻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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