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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중반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웠다는 말씀이 있다. 하지만 이미 제자들은 많이 있었고, 함께 전도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런데 새삼스레 다시 제자를 세웠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요한 사도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예수님에 대해 다 기록할 수 없다고 말씀할 정도로 효율적인 말씀이 성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이런 중복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잘 살펴보면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을 세웠다는 말씀은 마가복음의 구성상 오묘한 위치에 있다. 연이은 안식일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지만 피하신 말씀과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는 건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라는 시비 사이에 제자들을 세웠다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바알세불에 대한 답변으로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는 성령 훼방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귀신 내쫓는 권세

예수님은 세운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귀신 들렸다는 건 머리(정신) 곧 목적을 상실한 사람의 상태란 걸 앞서 설명했다. 하지만 육신의 병이나 가난 해결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에게 귀신은 육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귀신을 내쫓는 권세는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는 권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는 육신을 괴롭히는 귀신을 물리치는 권세가 아니다. 인생의 목적을 상실하여 목적대로 살지 못하므로 귀신 들린 자 같은 사람에게 인생의 존재 목적,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깨닫게 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런 권세를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다.

 

하지만 서기관(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권세는 예수님과 다르다. 귀신 중에 더 높은 이가 졸병 귀신을 제어하는 형태로 보고 있다. 생각을 가지고 이들의 말을 보면 귀신 내쫓는 권세가 사람 사회의 권력에 투영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크고 강한 게 이기는 세상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아닌데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의 기준이 귀신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는 퇴마 초능력 같은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는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세는 인생의 목적을 몰라 귀신 들린 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 전했을 때 듣는 사람이 순종하면 인생의 목적이 회복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자 뜻이 곧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 아닌 것에 사로잡힌 삶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삶을 회복시키는 게 귀신 내쫓는 권세다.

 

무엇보다 이 권세가 예수님 제자의 정체성이자 자격이다. 이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바로 귀신 내쫓는 권세며, 이같이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제자다. 따라서 제자를 세운다는 말씀과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은 같은 의미다.

 

 

성령 훼방

그리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다는 서기관들의 시비가 있었다. 제자에게 귀신 내쫓는 권세를 주신 데 대한 대응인 셈인데 예수님께선 이 시비를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할 죄인 성령 훼방이라 하셨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건 성령의 직임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훼방을 알려면 가장 먼저 성령의 직임, 성령의 정체성과 그 본성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훼방도 알 수 있다.

 

성령 훼방은 지금도 중요한 신앙 논점 중 하나지만 크게 오용되고 있다. 교회가 결정한 일에 따르지 않는 것, 목사가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는 일을 성령 훼방이라고 협박하는 게 그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직임을 육신의 일, 세상의 일이 기대와 다를 때 이를 바로잡는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 벌어진 일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달리 성령의 직임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 사람의 심령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도록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고,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뜻이 여기 있다.

 

성령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

 

성령의 직임은 기적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에 있는 하나님 말씀이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잉태시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그리스도로 살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따라서 성령이 그 직임을 행사할 수 없다면 거듭날 수 없으므로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원히 죄사함을 얻을 수 없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잉태시키는 성령의 직임을 훼방하는 게 어떤 것이냐다. 먼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영이시니 환경이 조성되었는데 직임을 수행하지 못하는 무능한 분이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성령께서 직임을 행하실 수 있도록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있다면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은 반드시 오시고, 성령이 오시면 생명으로 잉태되고 그리스도로 거듭난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한다는 건 성령께서 역사할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즉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없는 것, 그 자체가 성령 훼방이다. 이것이 성령 훼방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로 살도록 창조되었음에도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시킬 말씀을 듣지도 않고 순종하지 않는 건 성령의 직임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로움, 세상의 가치,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는 어두운 안목이 육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귀신 들린 것으로 표현된 삶을 회복시키시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귀신 들린 삶을 회복시키는 권세를 보이시고 제자들에게도 주신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하는 행동이라 하는 서기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는 성령 훼방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으로 봐도 같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셨는데,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는 세상 가치로 높은 곳에 계신다고 믿고 있다.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낮고 낮은 곳에 계신데 사람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높은 곳에 있어 성령이 역사할 수 없으니 이 또한 성령 훼방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어떤 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인지 궁금해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훈련하기도 한다. 귀신을 내쫓을 정도의 영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어떤 <행위>가 성령 훼방인지, 어떻게 행하면 제자가 되는지 연구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다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렇게 해선 절대로 제자가 될 수 없다. 성령의 능력도 가질 수 없다. 행위, 행동을 기반으로 고찰하는 사람은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성령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성령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니 삶 자체가 성령 훼방이다.

 

성령 훼방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성령 훼방은 성령께서 역사하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심령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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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자 바리새인들은 분노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이야기란 걸 알아들었기 때문에 분노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이익에 반한다는 걸 알았기에 분노했다.

 

그리고 사람들(백성들)도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을 만지기라도 하면 병이 나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런 일로 인해 예수님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또 한 부류,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이나 백성들은 물론 귀신까지 예수님을 알았다. 하지만 다들 목적은 달랐고, 목적이 다른 만큼 대응도 달랐다.

 

이렇듯 많은 부류가 다른 모양으로 예수님을 인식했지만 정작 어느 것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인식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피하시고, 자신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사람이 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천하실 때는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셨다. 그 사이에 성령강림이 있다.

 

사실 예수님의 정체성, 정확히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부활하신 이후까지 사람들에게 정립되지 않았다. 심지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금하시면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심도 같은 이유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요한복음 21장의 장면 속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오셨지 사람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되려고 오신 게 아니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생이 가진 문제를 크고 높고 강한 능력으로 해결하는 존재로 믿는다. 사람은 낮은 위치에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 구원자, 메시아, 영웅이다. 바리새인과 병 낫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그리스도가 바로 이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이런 그리스도를 전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낮아지는 그리스도며, 네가 옳다고 말하고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전하시려 한 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성령이 오시므로 사람이 알게 된다. 이건 제자들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않았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그런나 예수님이 있으실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대부분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높은 존재고, 사람 이상의 능력으로 사람을 강권하면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와 반대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 적용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이 있으실 때 바리새인, 백성들은 물론 귀신들이 알았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사람이 가진 이 그릇된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와 믿음을 바꾸기 위해선 말씀이 된 육신이 깨어지므로 그 속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을 보여주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오늘도 최소한의 문명이 전달된 사람이라면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안다고 구원받을 순 없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하고 신앙을 배척하는 반응의 뿌리에는 모든 사람의 생각 속 그리스도는 초인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일반인과 다른 없는 모습을 보일 때 심한 비난을 한다. 기독교인들조차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기에 벌어진 일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주장에 끌려 십자가를 지신, 초인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임을 안다면 욕할 일도 없고, 욕먹을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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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1-6) 안식일, 손 마른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4. 16. 07:32 Writer : 김홍덕

안식일은 특정한 날이 아니며, 안식일을 지킨다는 건 특정된 날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안식하는 사람의 모든 날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어야 한다.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3장에서 2탄으로 이어진다. 이번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로 예수님을 송사한다. 예수님께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을 송사하는 자들의 마음은 완악하다고 말씀하셨다. 앞서 지붕에서 내린 중풍 병자를 고칠 때 죄사함 받았다는 말에 참담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마음을 악하다고 하신 것과 궤를 같이한다.

 

먼저 살펴볼 게 있다. 안식일에 고친 병자는 손 마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한 손 마른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선 마른 손이 오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 속 하나님의 손은 항상 오른손이다. 즉 성경 속 오른손, 오른쪽은 의롭고 바른 손이다. 그리고 손은 모든 행위의 상징이다. 따라서 오른손이 말랐다는 건 의로운 행위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행위가 없다는 건 행위를 이끄는 본성, 곧 생명이 없다는 의미다. 야옹이라는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건 고양이가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가 없다면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오른손 마른 사람은 바로 거듭나지 못하여 안식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고 안식이란 관점에서 봐도 오른손이 제구실을 못 하니 육신이 안식할 수 없고, 의로운 행위를 이끄는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했으니 하나님께서 안식하는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자신도 안식이 없다. 생명 본성에 의지하지 않고 의로워지려고 성경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여기 해당한다.

 

행위 규범을 지켜 주일을 지킨다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오른손 마른 자

 

따라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일은 손 마른 사람으로 대표되는 사람인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행위를 이끄는 생명이 없는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이자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 같은 모든 사람에게 의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보이신 사건이다. 예수님은 그게 직임이고, 안식일에 모여서 간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절실한 일이 바로 이 치유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게 먼저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이 안식일 논쟁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안식일의 규례나, 율법이나, 절기의 규례는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면 그 삶이 모든 계명을 지키는 삶이 된다. 더 정확히는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오른손이 회복된다는 건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는 책이기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규례를 지켜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안식하는 사람의 삶은 모든 날, 모든 순간 안식의 계명을 지킨다. 이게 안식일의 주인이고, 안식일을 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의 삶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 방향에서 성경에 접근하는 건 죄다. 거듭난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모습을 기록한 책이 성경인데 행위로 지키려는 건 방향이 반대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며 악이다. 무엇을 하라는 성경 말씀은 그 행위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이게 행간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아는 거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예수님께 시비를 건 사람을 악하다고 하신 건 그들이 안식일을 정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모르는데 안식일을 누리는 삶의 모습인 안식일의 규례만 지키려 했고 그런 자기 생각을 주장하며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유대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교회에서 의외로 가장 많이 싫은 소리를 듣는 게 바로 주일 성수에 대한 규례다. 또 교회에서 어떤 행동은 안 된다는 거다. 이는 주일을 성수하지 않았을 때, 교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을 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벌을 두려워하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자신이 안식하는 존재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걱정이다. 안식일의 주인,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오른손(의로운 행위)이 회복된 사람은 그런 걱정 따윈 하지 않는다. 모든 날이 안식일인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사람을 살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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