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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23-28) 안식일의 주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4. 9. 20:49 Writer : 김홍덕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밀밭을 지나다 이삭을 자른 일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또 시비를 걸어왔다. 안식일에 하면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최종적인 답변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이었다.

 

얼핏 성경 말씀은 행위 규범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성경을 경전으로 삼은 모든 종교가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여긴다. 물론 말로는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믿음도 행위로 가늠한다. 새벽기도회 참석과 같은 행위를 좋은 믿음으로 판단한다는 자체가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인데 눈 감고 아웅 하듯 믿고 있다.

 

안식일 논쟁은 이같이 행함을 의로 여기는 사람들,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성경의 의가 본성이 된 예수님 간의 논쟁이다. 형식이 의로워지면 내용이 의로워진다는 사람과 의로운 내용이 의로운 형식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갈등이다.

 

안식일 논쟁은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대한 말씀

 

유대인은 일하면 안 되는 안식일에 이삭을 자른 제자들의 행위 자체가 율법을 어긴 일로 보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를 말씀하신다. 안식일은 달력의 날짜가 아니라 안식하는 존재인 그리스도로서 사는 사람의 모든 날이라고 답하고 계신 장면이다. 유대인들의 말은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되나?‘라는 말로 바뀌어있다. 안식일과 제자들의 행동이 이 갈등의 촉매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유대인들은 성경대로 행하면 의로워진다는 모든 시대, 모든 가치관의 상징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주일(안식일) 성수한답시고 7일마다 돌아오는 달력의 일요일에 정해진 행동을 준수하려고 노력한다. 이 모습은 어떤 행동은 주일을 지키는 것이고, 어떤 행동은 주일을 범하는 게 된다는 종교인들의 생각이 녹아 있다. 바로 행위로 안식일을 지키는 신앙이다. 형식이 목적과 의, 곧 내용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정통 신앙이 되어 있다. 이것이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라 존재 규범

 

하지만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라 존재 규범이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다. 안식일은 일하지 않으므로 지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안식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이 이루어져 하나님께서 그에게 안식하고 만족해야 안식이다. 그런 존재가 되는 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달력의 어느 날이라도 그에겐 안식일이다. 즉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안식일이 형성되므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어느 날이나 그로 인해 안식일이 되므로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하는 존재, 그리스도의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되므로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

 

결론적으로 안식일은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는 특정한 날이 아니다. 안식하는 사람에겐 모든 날이 안식일이다. 날이 기준이 아니라 그날을 사는 사람이 기준이다. 그래서 인자가 주인이다. 그리고 피조물인 사람은 혼자 안식할 수는 없다. 주인이 쉬지 않는데 쉬는 종이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안식할 때 비로소 사람도 안식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존재로 거듭났을 때,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생명이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안식하신다. 창세기에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대로의 사람으로 거듭났을 때 그 사람과 하나님이 안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거듭난 사람, 그가 바로 그리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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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레위의 집에서 먹고 마시는 일로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논쟁이 있었고 이어서 요한의 제자나 유대인은 금식하는데 왜 먹고 마시느냐는 논쟁이 이어졌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신랑이 있으면 금식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함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씀으로 시비를 일갈했다.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신랑이 있으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답도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데, 이어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말씀은 더 어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어색한 예수님의 답변 안에는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혼인 잔치 속 신랑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남자인데 제자들이 신부, 곧 여자로 비유된 이유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비단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신부와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육신이 십자가에서 향유 옥합처럼 깨져 쏟아진 말씀()과 피(생명, 그리스도의 본성)를 본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면 여자의 몸에 남편의 유전자가 들어가듯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심기고 그 말씀을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게 하나님의 법이기에 성경이 말씀하시는 결혼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신랑이다.

 

그리고 금식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게 없을 때 간절함으로 구하는 의식이다. 존재를 인식하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건 존재 목적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금식해야 할 상황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인생의 존재 목적 아닌 다른 게 것을 비워내고 간절하게 구할 것이 있을 때다. 그것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금식할 이유는 없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음식을 먹고 활동하게 만드셨고, 먹고 마실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함께 있다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이 신랑을 빼앗길 것이라고 하셨다.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는 이 말씀 속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설명되고 있다. 더 깊은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신 변화산 사건 이후에 하겠지만, 여기서도 간단하게 살펴본다면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 자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던 그리스도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기대하고 믿었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그런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는 메시아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그런 그리스도라 여겼다.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지 않은 그리스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신랑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므로 자신들이 생각한 그리스도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제자들의 믿음과 무관하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고, 가룟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변함없었다. 다만 그리스도는 십자가 따윈 지지 않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유대인의 왕이 되어 가난한 사람 하나 없는 나라를 만드실 분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제자들의 신랑은 그렇게 빼앗긴다.

 

빼앗기는 신랑은 사람의 그리스도

 

문제는 오늘날 신앙인들 역시 제자들이 빼앗긴 신랑인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되게 해 준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속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잘되도록 하는 밑거름이 된 분 정도로만 생각한다. 기도하는 게 증명한다. 하지만 그런 그리스도는 반드시 빼앗긴다. 그렇다면 금식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신랑, 곧 모든 사람에게 존재와 인생의 목적을 알려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과 의와 뜻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금식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이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체성,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냐는 또 다른 문제다. 당시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아닌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가난도 질병도 없는 나라의 임금으로서의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신랑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신랑을 빼앗아 간 것이다. 더욱이 신랑인 그리스도를 빼앗아 간 이는 다름 아닌 자신들, 자신들이었다. 자신들 맘대로 생각한 그리스도의 기준이 신랑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의 기준이다. 진정한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이 신랑은 반드시 빼앗긴다. 진정한 그리스도를 간구하는 금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그랬다.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변화산 이후 제자들은 한 번도 웃지 못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그들의 마음은 신랑 있는 혼인 잔치 같진 않았다. 자신들이 생각한 그리스도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그리스도가 없어진 것은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대로 제자들을 버려두진 않았다. 성령이 오신 것이다. 성령이 오시자 제자들은 달라졌다.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갔던 제자가 아니라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케 하는 사람이 되었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로 다시는 금식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정말로 목욕한 사람의 진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성령이 오신 제자들이 바로 새 술이 담긴 새 부대다. 새 술은 이전에 없던 그리스도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이긴 자지만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세상 기준에 가장 천하고 악한 죄인이었다. 십자가를 그 이유로 지신 것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세상에 없던 새 술과 같은 분이 그리스도고, 성령으로 인하여 그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으로 거듭난 육신 가진 사람이 새 부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십자가를 지는 본성, 너 옳다고 인정하게 되는 본성, 낮아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신랑 없는 신부다. 인생이 혼인 잔치처럼 아무리 즐거워도 껍데기일 뿐이다. 세상에서 이기게 하는 그리스도를 믿어 풍요롭고 평안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들 아무 소용 없다. 오히려 금식해야 한다. 낮아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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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대표적인 죄인이라면 세리와 창녀였다. 창녀야 어느 시대나 죄인의 부류에 넣지만 세리는 꼭 그렇지만 않다. 다만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 상납할 세금과 무관하게 세리의 재량으로 징수한 뒤 자신의 부를 축적했기에 지배국 로마에 세금을 내는 유대인들은 세리를 매국노로 여겼다.

 

의가 같지 않으면 밥도 같이 먹지 않는 유대인들의 문화상 세리와 함께 먹는 것, 그것도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는다는 건 난 이들과 같은 의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세리 마태와 함께 먹는 예수님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다. 죄를 사하는 의로운 자가 죄인과 함께 먹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에게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므로 이들의 비난을 일갈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이 짧은 사건은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이 전부인 것 같다. 하지만 병자를 고치는 의사가 같은 병에 걸릴 것까지는 없는데,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중요하다. 그런 예수님이기에 지금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 취급한다는 것을 아심에도 죄인과 먹고 마시고 계신 것이다.

 

의인이신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이건 의롭다면서 죄인과 먹고 마시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의 가치관과 다른 하나님의 법이다.

 

그런즉, 기독교인들이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과 말씀에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법리가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일반적 상식, 세상의 지식으로 보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면 건강한 의사가 병자를 돌보듯 의인인 상태에서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면 된다. 이것이 세리와 먹는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이 가치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고 외친 사람들의 가치관과 맥을 같이한다.

 

이 말씀을 단순하게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명제 아래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짧은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법이 그대로 녹아 있다. 자신을 구원받은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이 법이 그대로 보이고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과정을 거친 사람이어야 이 말씀 속에 있는 예수님 구원의 법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육신은 우리와 같으나 그 육신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만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육신이 십자가에서 옥합처럼 깨어지니 그 속에 있는 물(말씀)과 피(생명)가 드러났고, 그것을 본 사람이 자신도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가진 말씀과 뜻이 자기 삶이 되어야 함을 깨달음으로 구원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의인이심에도 죄인이 되신 것이다. 자신은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니지만 세리, 창녀와 먹고 마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 속에는 죄인들의 자리에 함께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죄인의 형틀이기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죄인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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