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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5-39) 전도하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3. 13. 05:00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장모의 열병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과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 사이에 예수님께서 전도하러 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것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는 것이 육신의 병을 회복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과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육신의 건강과 복락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 하시고 제자들을 만났다. 그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마을로 가서 전도하시면서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앞서 가버나움 회당과 같이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았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을 때 사람들은 새 교훈이라 했고, 전도하러 가자고 하신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았다. 그러니까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도하시는 예수님의 일에서 우리는 전도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배울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전도는 교회에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다. 이 저변에는 교회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믿음과 신뢰가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말하는 구원이 과연 예수님이 전하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계속 회당에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는 것이다. 회당은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당이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귀신 들린 자가 들어왔었다. 처음 들어 온 것이었다면 바디메오를 막듯 소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늘 드나들던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고, 예수님의 전도 여행에서도 회당에 귀신 들린 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 교회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회가 가진 구원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고, 구원의 능력이자 법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가 말하는 구원은 육신의 곤고함과 어려움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전부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가하고 압박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뜻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을 이기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이라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이 가하는 어리석음 앞에 육신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 낮아진 십자가가 구원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은 제대로 귀신 들린 것이다.

 

전도, 곧 전할 도는 바로 십자가의 도다. 십자가에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할 형식 가진 존재로서의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로 드러난 곳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보았다면 낮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알면 성령께서 육신이 그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사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니까 전할 것은 십자가의 도고, 십자가의 도는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오늘날 교회가 추구하고 자랑하는 세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끌고 가는 세상 앞에 육신의 수고와 생명을 내어주는 모습이다. 그게 전도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엉터리, 아니 거짓되고 가증한 전도를 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은 이 목적에 수렴한다. 그리고 오신 목적이 완벽히 집적된 곳이 십자가다. 낮고 낮은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정수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은 이 목적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예수님의 구원이나 도움을 바랄 것이 아니다. 당연히 낮아지는 것과 달리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된다고 전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복음,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이 도가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 없는 걸 전하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삯꾼 목자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낮아지는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도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삯꾼이다. 이름만 목사나 전도자일 뿐 삯꾼이며 속이는 자며 예수님의 십자가 본질과 다른 것을 전하니 적그리스도다.

 

예수님은 그 삶이 전도다. 공생애 동안의 말씀과 기적과 능력도 전도지만 결국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전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 역시 그렇다. 우리가 세상의 주장 앞에 예수의 이름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수고와 삶을 내어 줄 때 그 모습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전도다.

 

결국 전도는 자신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외치는 것, 교회에 안 가면 지옥 간다는 것과 같이 사람을 겁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낮아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 모습이 인생의 목적임을 알게 하는 삶을 전하는 것이 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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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에게 가셔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일을 성경이 기록한 것은 소경, 문둥병과 같은 불치병을 고치시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병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각양의 병은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하지 않은 사람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만약 병자들을 고치신 일로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부각해서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면 그것은 성경을 아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설교자 대부분이 이렇게 설교하고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전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살려 놓은 사람 중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에서 주목할 것은 장모라는 점이다. 베드로에게 장모는 여자를 낳은 여자다. 베드로와의 관계에서 그렇다. 그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다. 이는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아들이란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육신으로 여자가 남편의 유전자를 받아 남편의 아들을 낳는 것과 같다. 아니 육신의 이 일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법의 모형이다.

 

그런데 여자가 여자를 낳았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 되지 않고 계속 사람이 옳다는 의를 좇는 사람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귀신 들린 자가 인생의 목적을 상실한 사람이듯 하나님 앞에 여자인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 병이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외에도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고 마가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다른 복음서도 그렇다. 앞서 잠깐 설명한 것처럼 병자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모습이다. 병이란 것이 이상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이상하다는 것은 정상이라는 기준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것을 뜻하는 것과 상통한다.

 

굳이 건강의 문제가 아니어도 정상이라는 기준, 곧 존재의 목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다 이상하고 아픈 것이고 죄다. 이동을 위해 만들고 구매한 자동차가 이동하지 못하거나 안정적인 이동을 할 수 없는 상태를 고장 났다고 하는 것처럼. 이같이 자기 존재 목적, 자신을 만들거나 구매한 존재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 죄고 병이고 고장이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뜻하신 것과 다르게 사는 것이 죄고 병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성경이 기록한 것은 예수님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으로 회복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과 늘 반대로 살아간다. 심지어 그 그릇된 딜을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기가 찰 노릇인데 사람은 그것을 좋은 신앙,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에게 기대하신 낮아지는 하나님의 본성을 보이시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사람은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열병을 앓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자가 여자를 낳는 열병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낮은 자리, 십자가로 이끄시는 주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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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일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주목할 것이 있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가 소리 치기 전,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가르침을 권위가 있고 서기관과 다르다고 말했다는 것과 귀신 들린 자를 치유했을 때 병이 나은 기적에 놀랐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새 교훈에 놀랐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 귀신을 내어 쫓은 것과 연관성이 있는 내용임을 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으로 귀신을 물리 칠 수 있다는 것을 본 것이다. 이것은 흡혈귀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앞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아닌 것을 좇아 사는 모든 삶이 귀신 들린 것임을 설명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핵심, 곧 인생의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주관하고 있는 인생의 목적 아닌 것을 내쫓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 뜻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뜻대로 삶을 사는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 되려면 성령이 잉태케 해야 한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 되셨다는 것이 이것이고,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 이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교훈과 삶과 십자가는 성령으로 잉태한(거듭난) 하나님 말씀이 본성이 된 삶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교훈이 아닌 것을 듣고 믿으며 따른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 교훈을 전하기 위해 십자가 지고 순교했는데 사도들에게 들은 예수님의 일을 듣고서 어리석게도 반대로 육신의 정욕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에서 잘 되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위해 산다. 이것이 바로 육신이 목적대로 살지 않는 귀신 들린 삶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치유한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은 여럿이었다. ‘우리가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소리 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 아닌 많은 것을 삶의 지표로 삼는다는 의미다. , 명예, 이성, 평안 등과 같이 사람이 추구하는 수없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런 것을 좇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귀신 들린 삶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것은 이같이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 아닌 것을 좇는 사람을 회복시키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직임이란 것을 보이신 사건이다. 그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삶의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거해야 하는 존재인데 그것 아닌 것은 자기 자리가 아니니 나오라고 하신 것이다.

 

재밌는 것은 귀신들의 말이다.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말씀 아닌 세상의 가치로 삶을 주관하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과 자신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지 사람만 그것을 모른다. 귀신 들리면 그런 것을 알 수 없는 상태인 것이 당연하다.

 

귀신들, 곧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으로서 인생을 주관하는 것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과 상관 있을 수 없다는 포괄적 이론으로 인지하면 안 된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며,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서 나사렛 예수님처럼 자신은 귀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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