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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렸다는 것은 현대의학적 병명은 아니다. 오늘날 현대의학에 의한 병명은 아마도 정신병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굳이 귀신 들린 자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있어야 할 정신이 없다는 관점이 아니라, 있으면 안 되는 것, 자기 것이 아닌 것이 육체에 깃든 것에 관한 말씀이 바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기적의 말씀이다.

 

성경은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이 육신을 주관한다는 관점에서 말씀하신다. 즉 사람의 육신을 주관해야 하는 것 아닌 것으로서 인생과 육신을 주관하는 모든 것은 귀신이라고 말씀한다. 사람의 육체는 육체를 주관할 분명한 주체가 있는데 그것 아닌 다른 것이 주관하고 있으면 그것이 귀신 들린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기적은 단순하게 불치병을 고치는 기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생은 온전한 것의 주관 아래 있는지, 우리 육신의 삶을 주관해야 할 온전한 주체가 나를 주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정신병자의 이야기로만 듣는다면 성경은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있어 그 인생을 주관해야 할 온전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존재 목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중에서 자신이 존재를 존재라는 관점에서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는 사실상 사람이 유일하다. 즉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려고 노력한다. 존재의 목적을 찾아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인생의 의미. 삶의 목적이라고도 한다.

 

문제는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존재 목적을 스스로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신을 조성하거나 창조하거나 생명으로 잉태케 한 것이 아니므로 스스로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존재임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자신을 존재하게 하지는 않았으므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 자기 안에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심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려면 자신을 조성한 존재가 알려 줘야 한다. 여기서 사람은 신, 곧 하나님을 만난다. 성경에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날 것이라는 말씀은 이것이다. 인생이 누구라도 존재하고 있는 육신의 필요가 아닌 자기 존재 목적을 자기 밖 자기 이상의 존재에서 찾는다면 찾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반면에 귀신 들렸다는 것은 사람이 존재 목적이 주관하는 삶이 아닌 존재로서 필요한 것을 추구하는 삶, 육신의 필요와 스스로 조성하지 않은 자기 생각과 의를 추구하려는 생각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살고 있는 모든 삶이 귀신 들린 삶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존재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모든 삶이 귀신 들린 사람의 삶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는 것은 결국 사람에게 존재 목적을 보여 주시고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알게 된 존재 목적대로 사는 삶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보이심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이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가 베푸는 구원이 그것이다. 육신의 모든 기대가 무너진 곳에서 육신의 존재 목적이 드러난 곳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보고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게도 육신의 모든 것, 인생의 모든 것이 무너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육신의 일을 구한다.

 

사업하는 것, 결혼, 진학, 건강과 같은 것을 구한다. 그런 것이 행여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갈까 전전긍긍하고,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이 되면 그 상황이 구원을 받아야 할 상황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여 주시길 구한다. 그리고 때로 자기 희망대로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계획대로 되어 세상에서 성공이라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한다. 이게 바로 귀신 들린 삶이다. 이런 것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게다가 실패 중의 실패한 육신의 표상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이것을 구하는 것은 기만이자 더할 나위 없는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생의 목적을 구하지 않는 사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모든 사람은 귀신 들린 자다. 예수님을 인생의 이런 모습을 회복시키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모습이고,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 곧 인생의 목적을 몸소 보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일은 예수님의 삶 전체가 가진 의미를 보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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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모두 어부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렀을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장면은 예수님께서 부르시니 마치 홀리듯이 따라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이 자기 하던 일을 두고 새로운 가치를 좇는다는 것은 실제 엄청난 일이다. 이것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사는 일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을 수밖에 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릴 성전에 가신 일이 있고,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자랐다는 말씀이 있다. 이미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음을 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타사서 나를 따라오라하니 따라간 것이 아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동생 안드레의 인도에 끌려 예수님을 먼저 만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전개로 바닷가에서 부르시기 이미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만난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말씀을 들은 적도 있었고 자신들이 평소에 듣고 배운 것과 다른 말씀을 이미 듣고 있었다. 실제로 요한 안드레 빌립 상당수는 예수님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세례 요한이 직접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했다.( 1:40)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라는 한마디에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옳은 것인지 심령에서 씨름하는 세월을 거쳤고, 결과 자기 삶을 던지기로 결정을 하였기에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오늘날 신앙인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세례 문답에 정해진 답을 인정하는 것으로 가볍고 쉽게 구원을 받아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전하신 말씀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자신도 십자가를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부름에 따라 나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마가복음 후반에 나오는 소경 바디매오가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예수님이 부르시니 옷을 버려 두고 뛰어 것과 같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신분이자 재산이었던 것은 차치하고 소경이 뛰어가는 정도의 대단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것이다.

 

어부의 전재산인 배와 거물을 버려 두고 따라 나선 제자나 앞이 보이지 않는데 예수님이 부르시니 뛰어나간 바디매오 같은 마음이 아니면 제자가 없다. 무엇보다 모든 재산과 자기 삶의 가치를 버리고 떠날 정도의 가치를 좇는 일이 순간 결정할 일은 아니다. 이것은 삶의 가치가 바뀌지 않고서 없는 일이다. 삶의 가치가 바뀌는 것은 거듭나야만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것은 이만한 갈등의 과정을 거쳐야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옵션을 하나 추가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인생을 거는 일이다. 어부의 배를 버리고 따라가는 일이며, 보이지 않는 소경이 뛰어갈 정도로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제자로 나서기 , 자신이 가졌던 모든 가치 기준이 뒤집히는 일이며, 이전과 전혀 다른 본성으로 사는 일이다. 그것을 알고 제자가 되려 해야 하고,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긴다면 인생을 걸고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십자가를 져야 함을 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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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한 대로 제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땅에 보내신 목적을 깨달은 사람이다. 낮고 낮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임을 깨달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르치고 보이신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들로 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 된다는 것은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말한다.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란 형상으로 나타났으니 그게 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셨다는 예수님이 부른 사람이 하나님 아들로 거듭났다는 뜻이다. 제자를 부르신다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말씀을 들은 사람이 하나님 아들로 거듭났다는 것은 같은 의미다.

 

제자를 부르신다는 것과 복음을 전하신 것은 같은 의미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나를 따라오라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이다.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라 있다.

 

가룟 유다는 여기에 이르지 못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예수님을 팔았다. 어디까지 이르러야 제자인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라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면 제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전한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제자를 부르신 것과 복음을 전하신 것은 같은 의미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하여 밝히 알고 그것이 자기 삶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모르는데 없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데 제자가 없다. 십자가를 모르면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려면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생명 본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아닌데 십자가를 수는 없다. 혹시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십자가를 진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달린 강도같이 자기 죄를 인하여 지는 것이지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세상 사람들이 인생의 어려운 일을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자기 죄로 인해 지는 십자가다.

 

십자가에서 중요한 중의 하나는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끌려서 십자가를 졌는지 이유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자신도 예수님처럼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게 것을 말한다. 이게 바로 거듭남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자로 부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다는 것은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인데 순순히 십자가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로 부르시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가 되려면 부르심에 답해야 한다.

 

예수님은 낮아지는 것에 순순히 자신을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부르시기 위해 몸소 그것을 보이셨는데,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심각한 어두움이다. 심지어 세상에서 높아지고 평안을 얻기 위해 신념이나 의지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를 부르신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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