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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16-17) 하나님의 성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2. 11. 16. 08:04 Writer : 김홍덕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유명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공간, 형상)이다. 성전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개념은 교회 건물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말씀 속 성전은 물리적 건물이 아니다. 이건 사람 이야기다. 사람의 존재 목적과 우리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전반적 흐름 속에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반면 사람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영이신 하나님은 볼 수 없다. 다만 존재하신다는 현상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상은 실체의 모든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다. 하나님을 형상 가진 존재를 통해 표현하시고자 하심이다. 그게 바로 우리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이 의미다.

 

바울 사도는 또한 우리를 질그릇이라고도 했다. 밥그릇은 밥을 담기로 정했기에 밥그릇이듯,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이 담기기 위한 존재다. 그게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우리의 존재 이유를 알고서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을 상고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로,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와 결이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앞서 바울 사도가 언급한 대로 신령한 사람이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다. 육신이란 형상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지혜로 신앙을 조명한 결과 너보다 내가 더 나은 신앙이라는 분열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정당성 확보를 위해 사도의 이름을 도용했다. 세상 지혜가 가치 기준이 되어 신앙마저 삼켜버린 성도를 향한 권면이 고린도전서다.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를 향해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각성시키는 건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실 그릇이요 형상임을 상기시키는 권면이다.

 

집이나 그릇과 같이 그 속에 무언가를 담는 건 담긴 것이 정체성을 결정한다. 콜라가 담긴 잔을 건네 달라고 할 땐 콜라 혹은 콜라잔을 달라고 한다. 밥을 담아둔 그릇을 지칭할 땐 밥그릇이라 한다. 차를 둔 건물은 차고라 하고, 김치를 두는 곳은 김치냉장고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다.

 

구약시대에도 돌로 지은 성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형이고, 육신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이다. 그 안에 가만히 계시기 위한 게 성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하시는 이유는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함이다. 돌로 지은 성전 아닌 호흡 있는 육신 가진 사람을 성전이라 하신 건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9:11)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은 다른 사람과 달리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선민의식을 위한 것이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신앙을 보이지 않는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로 가리기 위한 변명거리가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게 우리 인생의 목적이란 걸 일깨우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육체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본성인 사람이다. 그 삶이 세상의 가치나 지식과 섞일 수 없다. 오직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 의와 뜻,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란 말씀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 말씀하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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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행사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그저 알라딘의 램프 속 요정이거나 차비 대신 내주는 선량한 존재일 뿐이다. 그들이 누군가 물을 필요는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바로 그들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기독교인 당신도 그중 하나일지 모른다. 예수님을 죄가 있어 인생이 형통하지 못하고 벌을 받아야 할 처지에서 자신을 대신해 벌 받은 존재로, 그리스도는 육신의 삶에 마주한 난관을 해결해주는 메시아로 믿고 있다면 재론의 여지 없이 그들 중 하나다.

 

이건 너무나 많이 이야기해 왔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야기할 내용이다. 이 블로그의 독자가 어느 날 눈에 보이는 게 본질이 아님을 알고 예수님이 부르시는 (You)’라는 호칭을 인해 통곡하는 날이 온다면 왜 그렇게 많이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 해 보려 한다. 그건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를 지는가에 관한 것이다. 아마 이건 앞으로 전개될 마가복음 후반부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 이유는?

 

대부분은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 가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는 신념이라 여긴다. 인류를 구원하려는 사랑의 마음을 인한 신념, 그것이 그 엄청난 고통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은혜라 감동한다. 이게 틀리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답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이기 때문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한 이유를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곤고한 육신의 삶에 위로를 삼고, 이를 복음의 본질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게 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란 것이다. 십자가를 지실 때 이미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육신이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라서 못 내려오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기 전 이미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였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 이유를 아는 건 너무 중요하다. 이걸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당연히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신념으로 알기에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도 분명 신념으로 지려 한다. 예수님처럼 되려는, 말씀대로 행하려 귀도에서 십자가를 지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아들인 죄 없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내 삶의 근본과 본성이어야 한다. 예수님과 내가 같은 존재여야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예수님과 같은 본성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면 모두 신념과 외식이다. 이건 신앙적 논쟁이 아니라 상식적 개념이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본성을 가졌기에 어쩔 수 없이 지는 게 십자가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한다.

 

너무나 다행스러운 건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는 게 우리의 존재 목적이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게 바로 이 의미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창조된 존재다. 따라서 이 존재가 아닌 상태가 바로 죄다. 죄가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존재 목적으로 돌아가는 게 회개고 회복이며 구원이다.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맥없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 구원과 믿음에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이 이유를 신념으로 보는 사람은 신념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을 한다. 노력하고 육신으로 지켜내려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시기에 십자가를 진 것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게 바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임을 안다. 이건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신념으로 살아가던 생명이 예수님을 이끈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새로 나는 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자기 안에 있다. 생명이 자라면서 알게 되고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설사 도망치려 해도 어쩔 수 없음을 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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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책망한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세상의 지혜, 육신의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망은 오늘날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를 빌미로 분열했다면 지금은 교리나 세례 방식 등 신앙적 이슈로 분열되어 있다. 복음과 신앙을 이유로 복음이 분열된 것이다. 세상의 지혜와 가치관으로 성경을 조명한 결과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람의 생각과 일, 곧 공력에 대해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심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을 견디는 공력의 말씀>이다. 각 사람의 공력이 쌓으나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공력이 있고, 또 한편으로 금과 은, 보석과 같은 공력이 있다는 것이다. 문맥상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생각으로 쌓은 공력은 불에 견딜 수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복음을 이유로 복음을 분열시키는 사람의 생각을 책망하는 글이라는 걸 생각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가 생각하는 공력 역시 그렇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공력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그건 바로 공력을 쌓는 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터를 자신이 닦은 터,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믿는지에 따라 그 위에 쌓는 공력도 정해진다. 쌓는 건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같아야 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는 하나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바울 사도 뿐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 그렇다. 따라서 복음을 이유로 분열된 생각 위에 쌓은 공력은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다. 즉 복음적인 이슈, 신앙적 이슈로 분열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공력은 설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지푸라기 같은 공력에 불과하다. 즉 세례나 교리와 같이 신앙 가치관을 기준으로 분열된 오늘날 기독교가 생각하는 공력은 다 지푸라기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1:13)

 

그러므로 세례, 교리, 예식 심지어 교단의 조직 구조 등을 이유로 분열된 교회 안에서 정의되는 공력은 한 마디로 모두 지푸라기며 불법이다. 사도를 빌미로 분열한 고린도 교회나 세례를 가지고 분열한 오늘날 교회나 천로역정에 나오는 담 넘어 들어온 순례자와 같이 출발이 거짓되었으므로 다음의 모든 건 다 거짓이다.

 

유일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분열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력이 그들의 거짓을 증명한다. 새벽기도회나 땀 흘린 식사 봉사 열심히 공부한 성과로 얻은 목사 자격증과 같이 열심히 수고한 육신의 공로를 귀한 공력으로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육신의 수고가 공력의 기준이다. 분열을 일으키는 내가 더 옳다는 생각과 DNA가 같다. 그러나 이건 세상의 가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는 낮아진 존재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존귀하다고 믿는다지만 정작 귀함의 기준은 세상 기준이다. 신앙도 육신으로 더 수고하는 걸 공력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신학을 더 공부한 사람이 목사가 되고, 헌금 많이 하고 육신으로 수고를 더 많이 한 사람이 장로 권사가 된다. 신앙도 a little higher, a little more가 의로움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생각과 달리 그리스도의 가치는 낮은데 있다. 가장 존귀한 예수님의 존귀함은 알고 보면 세상 가치로 가장 낮은 십자가다. 즉 높아지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생각하면 안 된다. 기독교인의 생각처럼 남들보다 더한 신앙적 수고와 공로가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이 아니다.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터 위에 쌓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맞아야 한다. 그리스도라는 생명과 그 본성에 합당하지 않는 건 아무리 쌓아도 쓰레기다. 다 치우고 버려야 한다. 다 불타 없어진다. 육신의 수고로 이루는 새벽기도, 신학공부, 봉사나 선교활동이나 해박한 성경지식 등은 그리스도와 본성이 다르다. 그런 건 모두 불타는 지푸라기나 쓰레기일 뿐이다.

 

남다른 신앙적 공로를 가지고 서로 갈라선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책망이 이것이다. 내가 더 낫다는 명분으로 사도를 옹립하여 분당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다 불타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 말씀은 남보다 더 많은 수고와 공로를 상급이라 생각하는 오늘날 신앙인에게도 동일한 책망이자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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