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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12) 중풍 병자의 믿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3. 20. 05:00 Writer : 김홍덕

이제 예수님의 소문은 온 유대 땅에 널리 퍼졌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또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예수님 계신 데로 몰려왔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도를 전하셨다. 예수님이 전하신 도는 십자가의 도다. 그렇게 전하신 도를 마지막에 직접 보이신 것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들자 예수님을 만나기 힘들어졌다. 이에 한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 계신 곳 지붕을 뜯고 병자를 달아 내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치셨다. 그러나 핵심은 그게 아니라 병자를 고치실 때 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에게 큰 문제가 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이 핵심이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

 

죄를 사한다는 말은 사실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보이셨음에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사람들마저 죄를 사한다는 말을 심히 경계하고 터부시하는 건 지금도 같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건 사람이 쉽게 용납하기 힘들다. 그때의 서기관들이나 지금의 기독교인이나 가치관은 같다.

 

사람이 죄를 사하는 것에 앞서 먼저 중풍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중풍은 귀신 들린 것과 반대다. 귀신 들린 것이 머리를 빼앗긴 상태라면 중풍은 반대로 머리의 생각이 육신을 주관하지 못하는 병이다. 머리에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어도 육신이 전혀 그 머리의 생각과 뜻을 이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로 혹은 엉뚱하게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중풍이다.

 

모든 병이 그렇듯 병명을 알고 병을 고치려는 의사가 있어야 나을 수 있다. 자신이 중풍이란 것을 알고 이를 고치려고 해야 고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의 뜻은 이전에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달리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고치려 한다. 이 중풍 병자는 그것을 알았고, 예수님께 고침을 받으려 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기 전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도를 전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을 들었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도와 자기 삶이 상이함을 발견했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 중풍 병자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중풍 병자 역시 예수님의 도가 자기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중풍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지붕을 뜯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 이를 고치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것이 이 사람의 믿음이다.

 

믿음은 사람의 생각을 예수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이 되도록 순종하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셨고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과 자기 삶이 다름을 깨닫는. 자신이 중풍 병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중풍임을 깨닫는 회개고 믿음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인하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시인이다.

 

그러나 이 병자는 예수님을 찾았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중풍인 만큼 예수님을 찾는 게 당연하고 가장 온전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자기 삶이 예수님의 말씀 같지 않음을 인정하는 게 회개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게 믿음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 도를 따르면 자신이 회복된다는 걸 믿는 이것이 믿음이다.

 

중풍 병자의 일을 보면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이 얼마나 어두운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들어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삶이 성경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성경 말씀대로 살기 원하는 자기 생각처럼 육신이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모두가 중풍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지붕에서 달려 내린 중풍 병자와 그 일행과는 다르다. 자신이 중풍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건강하고 구원받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경대로 살려고 여전히, 항상 노력한다. 노력하는 건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어둡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죄와 사망의 상태다.

 

곤경에 처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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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0-45) 문둥병자를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3. 17. 09:16 Writer : 김홍덕

한 문둥병자,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꿇어 엎드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 간청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니 문둥병이 사람에게서 떠나갔다. 아주 중요한 게 아닐 수 있지만 이때부터는 예수님이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이후다.

 

문둥병은 몸의 감각이 없어지는 병이다. 그래서 몸이 썩거나 심지어 잘려 나가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이제는 거의 치료할 수 있는 이 병은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느끼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병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사람에게 그 뜻을 말씀하시는데 사람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썩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병이 문둥병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찾으면 만나리라말씀하신다. 이건 숨바꼭질 같은 게 아니다. 하나님은 숨어 있거나 사람에게 그 존재를 감추지 않는다. 그런데 찾으면 만나리라 말씀하신 건 사람이 마음만 바꾸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 수 있도록 말씀하고 있고, 표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언제라도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 만날 수 있다. 단 육신의 성공을 돕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생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자기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늘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 그게 문둥병이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 너의 존재 정체성이 무엇이며, 너와 나는 어떤 관계인지를 물으신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 여호와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늘 무엇을 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육신으로 성경을 지킨 공로를 드리려 한다. 그렇게 사람은 하나님과 거래 곧 장사하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느끼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멀어져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심각한 문둥병의 상태가 이것이다.

 

흥미로운 건 문둥병자가 찾아와서 예수님이 원하시면자신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며 간청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내가 원한다고 답을 하시니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둥병에서 회복되는 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무감각하지 않고, 민감하게 듣고 순종하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이다.

 

문둥병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병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문둥병이 고쳐지기를 원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당연함이 당연하게 느끼는 이유가 육신의 건강이란 관점이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목적과 그 목적을 기반으로 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즉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걸 예수님이 원하신다는 이해 안에서 당연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께서 고치기를 원하는 문둥병이란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전하러 오신 분이시니,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상태가 회복되어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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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001 - 개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고린도전서 Date : 2022. 3. 14. 06:45 Writer : 김홍덕

고린도전서는 바울 서신중에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성경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유명한 사랑장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신앙의 현실적 부분, 제사음식, 결혼, 이혼, 간음, 헌금 등에 관한 말씀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는 기독교가 간과하는, 어쩌면 간과하고픈 말씀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바로 신앙적 이유로 인한 교회의 분열, 복음의 분열과 다툼이 고린도전서 주제의 뼈대라는 점이다. 바울 사도는 서신의 시작에서 짧은 인사 후 바로 교회의 분열을 책망하는데, 그 책망의 핵심인 분열의 이유가 신앙적 문제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례의 방법 등의 신앙적 이유로 갈라진 게 이와 같다.

 

그런데 현재의 기독교는 고린도전서의 핵심적 책망의 원인과 문제를 제대로 가지고 있음에도 그 책망의 원인은 해결하거나 반성하진 않으면서 태연하게 바울 사도가 제시한 문제 해결 방안만 이야기한다. 근원이 썩었는데 회칠만 계속하고 반추하지 않는 심각한 어두움 속에 있다.

 

고린도전서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4, 5~10장 그리고 11~16장 이렇게 나눌 수 있다. 1~4장에서는 바울, 게바(베드로), 아볼로, 그리스도파로 분열되어 다투는 분쟁의 원인은 신앙을 세상의 지혜로 복음을 투영하기 때문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한다. 교회가 세례의 방식과 같은 신앙적 주제를 이유로 교단이 나뉘고 분열하는 것이 바로 이 책망의 대상이다.

 

그리고 5~10장에서는 세상의 지혜로 살기 때문에 겪는 신앙적 혼란에 대한 복음적 시력 조정, 즉 올바른 관점과 방향을 제시한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신앙적 기본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해도 되지만 자신은 하지 않는 몇몇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자신과 같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이 녹을 받는 게 가능하지만, 자신은 받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것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11장부터 끝까지 신앙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권면한다. 세상의 지혜가 아닌 신령한 심령, 곧 성령과 사랑을 설명하고 소망을 제시한다.

 

정리하자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계기는 신앙적 이유로 인한 교회의 분열로 인한 분쟁과 원인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원인은 나는 바울, 나는 게바, 나는 아볼로, 아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라는 분열이 신앙적 이유다. 이건 오늘날 대표적으로 세례의 방식을 두고 세례와 침례로 나뉜 것처럼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고린도전서를 상고하고 설교하려면 자신들이 이 문제의 당사자라는 성찰과 반성 그리고 돌이킴이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로 복음을 투영하기 때문이라는 바울 사도의 진단에 자신들을 비추어 봐야 한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세상의 각종 지식으로 설교의 설득력을 얻으려 하고 교인들은 그것에 반응하는 모습을 바울 사도는 이미 알고 권면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를 통해 책망하고 권면하는 모습 그대로지만 어떤 반성이나 성찰도 없다. 오늘날 신앙이 바울 사도의 진단대로 세상의 지혜와 가치관으로 복음과 성경을 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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