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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27-38) 나를 누구라 하느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0. 31. 15:27 Writer : 김홍덕

변화산 사건 전, 더 의미 있는 시점으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다. 아마도 모르실 리 없었을 것 같지만. 제자들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는 걸 전했다. 그때 예수님께선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물음에 베드로가 유명한 고백으로 답한다. “주는 그리스도라고.

 

교회를 조금만 다녔다면 이 말씀을 모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 말씀을 바로 안다는 건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안다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자신이 죄가 없다는 걸 확신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처럼 되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다. 바로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불가피하게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앙을 소환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시는지, 내가 원하는 것 예수님께서 내게 베푸시게 하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믿으며 신앙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의 이 질문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나는 너에게 누구이냐?(어떤 존재이냐?)”라고 묻고 계신다. 이 질문에는 “그럼 넌 나에게 어떤 존재며, 어떤 의미냐?”도 포함되어 있다. 이걸 함축하면 ‘너와 나는 어떤 관계냐?’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겼다. 엘리야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였다. 그것도 민생의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하는 선지자였다. 그리고 선지자는 자신들의 행위를 책망하는 사람이었다. 즉 예수님을 자신들의 행위를 교훈하는 선지자로 알았다는 의미다.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답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다. 이를 말리는 베드로를 사탄이라 책망하시면서까지 말씀하신 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에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함을 대입하면 우리의 구원인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존재란 것이다. 이게 우리 인생의 목적이며 존재의 의미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논한다. 안다고 말한다. 심지어 매일 회개하는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겨우 기름 부은 받은 자라는 단어의 의미나, 그 의미가 곧 메시아(구원자)라는 걸 안다고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안다고 여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건 그 구원이 대신 지불이란 개념의 대속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을 죄는 내가, 벌은 그리스도가로 아는 게 그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거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물음 속에는 너희와 내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You)’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사람들(Who)’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다. 우리를 정체성이 같은 존재로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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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를 어린아이 같이 대한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자존심을 긁는 말일 수 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신령한 사람이라 여기는 교만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어린 아이와 같다고 일갈했다. 이유는 육에 속한 사람이란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당을 짓고 자신이 속한 당에 바울, 아볼로, 게바와 같은 사도의 이름을 붙였다. 바울 사도는 이런 현상을 세상의 지식으로 신앙을 조명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고 육에 속한 상태라고 정의했다.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와 같은 사도의 성향을 따라 당을 이룬 것을 그 증거로 삼았다. 그리스도파는 아마도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었을 것이다.

 

분열하고 당을 이루는 이유는 사실 복잡하지 않다. 단 하나다. 너는 그르고 나는 옳다는 생각이 원인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같은 이들이 모여 당을 짓고 자신들의 생각과 비슷한 사도를 도용해 자신들의 생각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게 분열의 통일된 생리다.

 

사실 오늘날 세례의 형식을 두고 갈라진 교회도 이와 같다. 또 다른 이유로 교파가 갈라지는 것도 같다. 교회가 둘 이상으로 갈라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이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사람 간에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여 당을 이루고 분열한다. 이건 사실 선악과의 문제인데 그건 다른 곳에서 많이 다루었다. 분명한 건 사도들은 그 누구도 여하의 이유로 분열을 원치 않았다. 육에 속한 사람들로 인해 졸지에 분당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분당은 하나의 이슈일 수 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가진 모든 문제의 뿌리에서 비롯된 증거로 본다. 그 뿌리는 육에 속한 생각, 세상의 지혜라고 정의하고 책망한다. 뒤이어 언급하는 간음이나 스스로 섰다고 여기는 교만이나 우상의 제물과 같은 모든 문제는 이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나 아볼로나 모든 사도는 하나님의 동역자며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밭과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씨를 뿌리는 자나 물을 주는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말한다. 결국 씨 안에 있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이건 자신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형상이고 본질이자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의미다. 더 간략하게 표현하면 자신은 형식이고 복음이 내용이란 의미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도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형상으로 본다는 건 신령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형상이고, 표현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만드는 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걸 볼 수 있다는 건 자신이 그런 사람이란 의미다.

 

사도에 대한 인식 = 자기 정체성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형상으로 보려면 자기 안에 표현할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육신의 노력으로 그 의를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 가지를 지키다 한 가지만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긴 게 된다. 하지만 생명이라면 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본성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어길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사도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고 분당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에 속한 사람이며 신령한 것으로 먹이지 않았다고 한 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사람이 아니란 말씀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기도하는 오늘날 신앙인 역시 스스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나 육에 속한 사람이다. 그들은 성경은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성으로 하는 게 아니다. 본성으로 하는 게 아니란 건 생명이 아니란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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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22-26) 벳새다의 맹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0. 23. 14:3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시니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청했다. 예수님께선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칠 때처럼 또 침을 뱉어 그 사람을 치유하셨다. 그런데 짧은 시건 속에 치유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맹인이 단번에 치유된 게 아니고 단계적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논란이 되는 말씀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열리는 게 구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 예수님께 맹인은 사람이 보이며 나무 같은 게 걸어가는 게 보인다’고 하고 이어서 다시 안수하시니 만물이 밝히 보이게 되었다고 했다. 보통은 단번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게 일반적인데 맹인이 체험한 치유의 과정을 제법 상세히 기록한 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열리는 과정을 설명하심이다.

 

기독교인들은 구원이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어느 날 교회에 출석해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고, 육신으로 겪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주로 믿는다고 말만 하면 바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은 단숨에 태어나는 게 아니고, 우리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출애굽은 자그마치 40년이 걸렸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구원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는 건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란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성경을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처음 안수했을 때 맹인은 사물이 분명하지 않았다. 특히 사람이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또 한 번 안수했을 때 사람을 바로 인식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곧 열리라고 하신 건 결국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대한 인식이며, 그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우리가 알 건 구원의 시작은 순간적이나 완성은 과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여정을 설명한 출애굽이 그렇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사람의 생각처럼 구원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건 쉬운 게 아니란 뜻이다. 구원은 적어도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만 성취되는 사건이다. 그 구원으로 얻는 영생은 더더욱 단순하지 않다.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인식과 그의 아들을 아는 게 영생이자 구원이다. 

 

특히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안다’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한 말에서 보듯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내가 체휼하여 나의 생명 본성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고 나 역시 예수님과 같은 생명 본성을 가진 존재로 살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란 의미다. 아마 조금만 양심이 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이 말하는 구원엔 이게 없음을 고백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양심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

예수님은 치유한 맹인을 집으로 돌려보내시면서 한편으론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 집이 마을 안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동네가 벳새다란 것이다. 여러 제자의 고향이기도 한 벳새다는 ‘어부의 집’이란 의미의 말인데, 우리가 주목할 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안타까워한 곳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회개하기 전 자리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성경에는 어떤 장소를 두고 ‘떠나라’, ‘가지 마라’는 말씀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너의 본토 고향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고, 결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부모를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유한 몇몇 병자에게 이 본문의 말씀처럼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다.

 

성경 속 장소는 지도상의 지점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건 정체성의 이야기다. 아브라함이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적지도 지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지 말라고 한 마을은 지점이나 지역,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지 않은 존재, 그리스도의 양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사람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돌아가지 말아야 하는 마을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는 상태

 

성경은 근본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가 거듭나야 할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구원을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말하는 이유다. 성경의 의도가 이것이므로 성경 속 시간과 장소는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리적 장소와 절기와 시간은 모두 그 그림자, 비유, 형식이다. 이것을 알면 돌아가지 말라는 마을이 장소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 침을 발라 안수했을 때 맹인은 흐릿하게 보였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신세계를 발견한 듯해도 자세히 알려고 하면 많은 게 흐릿하다. 성경이 존재론에 관한 말씀임을 알았을 때, 육신의 평안함이 신앙의 목적이나 은혜의 척도가 아닌 걸 아는 건 맹인에게 흐릿하게라도 뭔가가 보이는 것 같은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전혀 보이지 않다가 흐릿하게라도 보이는 건 처녀와 기혼녀의 차이와 같다.

 

하나님의 복음도 그렇다. 생명이 없을 때는 육신의 평안함이 은혜의 척도이자 신앙의 목적이다. 그러다 거듭나면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다 뭔가 보인다. 하지만 그게 선명하게 보여서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건 많은 과정을 겪어낸 다음의 은혜다.(사람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건 인생의 목적과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의미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 안식하라는 의미, 동네로 돌아가지 말라는 건 구원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의미

 

그런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 안식하란 의미다. 그러나 동네 곧 복음을 전해도 회개치 않는 벳새다로 돌아가지 말라는 건 다시 보이지 않는 때,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경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생각하면 된다.

 

신앙의 여정은 단순하지 않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게 쉬운 거면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다. 당장 사람들이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신앙에서 돌아서는 것부터 엄청나게 힘들다. 그건 구원이 없는 것이지만 구원인 줄 알고 있다.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아는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이다.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맹인이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어두움에서 벗어난다. 이게 구원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다른 안목으로 본다. 생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이게 맹인의 밝아짐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나무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그리고 말씀을 계속 들어 모든 게 선명해진다. 사람과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양식,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영생 이 모든 게 밝아진 삶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이다. 이건 풀이 늑대에겐 양식으로 보이지 않아도 양에겐 양식으로 보이는 것같이 그리스도란 생명만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장성하면서 사람과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 쉽지 않은 과정을 보내고 다시 회개하지 않는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시니 사람들이 맹인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청했다. 예수님께선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칠 때처럼 또 침을 뱉어 그 사람을 치유하셨다. 그런데 짧은 시건 속에 치유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맹인이 단번에 치유된 게 아니고 단계적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논란이 되는 말씀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열리는 게 구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 예수님께 맹인은 사람이 보이며 나무 같은 게 걸어가는 게 보인다’고 하고 이어서 다시 안수하시니 만물이 밝히 보이게 되었다고 했다. 보통은 단번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게 일반적인데 맹인이 체험한 치유의 과정을 제법 상세히 기록한 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열리는 과정을 설명하심이다.

 

기독교인들은 구원이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어느 날 교회에 출석해서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고, 육신으로 겪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주로 믿는다고 말만 하면 바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명은 단숨에 태어나는 게 아니고, 우리 구원의 여정을 설명하는 출애굽은 자그마치 40년이 걸렸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구원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는 건 곧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란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성경을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처음 안수했을 때 맹인은 사물이 분명하지 않았다. 특히 사람이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또 한 번 안수했을 때 사람을 바로 인식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곧 열리라고 하신 건 결국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사람에 대한 바른 인식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대한 인식이며, 그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우리가 알 건 구원의 시작은 순간적이나 완성은 과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여정을 설명한 출애굽이 그렇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사람의 생각처럼 구원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는 건 쉬운 게 아니란 뜻이다. 구원은 적어도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야만 성취되는 사건이다. 그 구원으로 얻는 영생은 더더욱 단순하지 않다.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인식과 그의 아들을 아는 게 영생이자 구원이다. 

 

특히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안다’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한 말에서 보듯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내가 체휼하여 나의 생명 본성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로 거듭나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고 나 역시 예수님과 같은 생명 본성을 가진 존재로 살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란 의미다. 아마 조금만 양심이 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이 말하는 구원엔 이게 없음을 고백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양심은 쉽게 찾을 수 없다.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

예수님은 치유한 맹인을 집으로 돌려보내시면서 한편으론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 집이 마을 안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목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동네가 벳새다란 것이다. 여러 제자의 고향이기도 한 벳새다는 ‘어부의 집’이란 의미의 말인데, 우리가 주목할 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안타까워한 곳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회개하기 전 자리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성경에는 어떤 장소를 두고 ‘떠나라’, ‘가지 마라’는 말씀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너의 본토 고향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고, 결혼에 대해 말씀하실 때 ‘부모를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치유한 몇몇 병자에게 이 본문의 말씀처럼 다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다.

 

성경 속 장소는 지도상의 지점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건 정체성의 이야기다. 아브라함이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적지도 지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지 말라고 한 마을은 지점이나 지역,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지 않은 존재, 그리스도의 양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사람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돌아가지 말아야 하는 마을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보지 못하는 상태

 

성경은 근본적으로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우리가 거듭나야 할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구원을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말하는 이유다. 성경의 의도가 이것이므로 성경 속 시간과 장소는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리적 장소와 절기와 시간은 모두 그 그림자, 비유, 형식이다. 이것을 알면 돌아가지 말라는 마을이 장소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 침을 발라 안수했을 때 맹인은 흐릿하게 보였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신세계를 발견한 듯해도 자세히 알려고 하면 많은 게 흐릿하다. 성경이 존재론에 관한 말씀임을 알았을 때, 육신의 평안함이 신앙의 목적이나 은혜의 척도가 아닌 걸 아는 건 맹인에게 흐릿하게라도 뭔가가 보이는 것 같은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전혀 보이지 않다가 흐릿하게라도 보이는 건 처녀와 기혼녀의 차이와 같다.

 

하나님의 복음도 그렇다. 생명이 없을 때는 육신의 평안함이 은혜의 척도이자 신앙의 목적이다. 그러다 거듭나면 그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보이지 않다 뭔가 보인다. 하지만 그게 선명하게 보여서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건 많은 과정을 겪어낸 다음의 은혜다.(사람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건 인생의 목적과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인다는 의미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 안식하라는 의미, 동네로 돌아가지 말라는 건 구원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의미

 

그런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 안식하란 의미다. 그러나 동네 곧 복음을 전해도 회개치 않는 벳새다로 돌아가지 말라는 건 다시 보이지 않는 때,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경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생각하면 된다.

 

신앙의 여정은 단순하지 않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게 쉬운 거면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다. 당장 사람들이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신앙에서 돌아서는 것부터 엄청나게 힘들다. 그건 구원이 없는 것이지만 구원인 줄 알고 있다.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아는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이다.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이게 맹인이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어두움에서 벗어난다. 이게 구원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다른 안목으로 본다. 생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이게 맹인의 밝아짐이다. 처음에는 사람이 나무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그리고 말씀을 계속 들어 모든 게 선명해진다. 사람과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양식,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영생 이 모든 게 밝아진 삶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이다. 이건 풀이 늑대에겐 양식으로 보이지 않아도 양에겐 양식으로 보이는 것같이 그리스도란 생명만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장성하면서 사람과 하나님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 쉽지 않은 과정을 보내고 다시 회개하지 않는 마을로 돌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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