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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8) 성령 세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 29. 09:37 Writer : 김홍덕

세례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선포했다. 뒤에 오시는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복음의 시작이다. 물세례가 있고 복음이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 확증한다. 성령 세례가 복음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복음의 시작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성령 세례가 곧 복음의 시작이란 뜻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성령 세례가 복음의 시작인지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을 이해할 없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마음에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은 달라졌다. 진정한 성령의 강림이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 세례에 대해서 신앙인들은 오류에 빠져 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신비한 일을 경험하는 것을 성령 세례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성령 세례로 인한 현상이지 성령 세례의 본질이 아니다. 성령 세례의 본질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가치로 아무런 가치 없는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실 성령에 대한 성경의 소개는 일정하다.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했고, 우리의 구원을 성령으로 거듭남이라고 했으며, 예수님께서 베푸는 세례를 성령 세례 했고,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이라고 했다.

 

모든 표현은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령 세례, 성령강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모두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난다는 것을 표현하는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된다는 것이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것이 마가복음 시작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사는 것이니 어떤 존재보다 그리스도를 분명히 아는 것이니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성령 세례다.

 

그렇다면 성령이 오시면,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그것이 성령 세례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쉽게 말하는 구원을 받았다면 성령 세례는 이미 받은 것일 아니라, 자신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 구원이 성령 세례이므로 그건 구원을 받지 못한 증거다.

 

성령 세례는 구원의 증거다.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사건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이 전하신 그리스도라는 생명이라는 것을 부인할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믿으려 노력하고, 예수님 같이 되려고 노력하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공부하는 모든 것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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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8) 광야의 물세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 23. 11:17 Writer : 김홍덕

세례 요한이란 말에서 있듯 요한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다. 세례는 회개의 의식이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므로 물에 잠겼다 나오는 것은 이전 것을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세례에 임한다.

 

앞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다. 세례 요한의 모든 것은 광야와 연결되어 있다. 광야는 자유가 있는 곳이 아니다. 출애굽 여정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일어서면 단지 그것을 따라 진행하는 것뿐이었다. 이를 어기면 광야에서 살기 어렵다.

 

그래서 광야는 육신으로 말씀을 지켜내는 율법적인 삶의 표상이다. 광야에 거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은 율법적인 삶의 상징이자 최고봉이다. 그리고 하나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다. ‘물에서 건진 사람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고, 물로 인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베푼 세례는 물세례다. 율법으로 없다는 고백을 하게 하는 세례가 물세례란 뜻이다. 물에 잠기면 죽고, 속에서는 없기에 물에서 나오는 물세례는 물로 상징되는 율법으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세례다. 율법의 최고봉인 세례 요한의 세례는 사람이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낼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세례다.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이 물세례를 받은 사람인가의 문제다. 기독교 안에서 세례를 두고 물에 잠기는 의식을 행해야 한다는 교파가 있고, 머리에 물을 찍어 안수하는 교파가 있다. 세례를 기준으로 교회가 갈라진 것인데, 육신의 행위나 형식에 대하여 죽었다는 고백의 세례의 형식을 가지고 교회가 갈라졌다는 것은 마디로 교회가 세례의 의미를 모른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세례의 의미를 모르는 교회에서 받은 세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례가 리는 만무하다. 일반적인 교회에서 의식으로 행하는 세례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례를 오히려 부인하고 있다. 행위와 형식에 대하여 죽고 다시 살겠다는 고백의 세례의 형식을 중히 여겨 교회가 갈라지고, 세례 유무에 따라 교회에서 대우가 달라지는 (성찬식, 집사 임명 ) 이를 증명한다. 그런 교리 안에서 받은 세례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세례는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찰

 

진정한 세례는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찰이다. 여기서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이라는 생각은 논쟁의 가치조차 없는 어리석은 사고방식이다. 자기 안에 거듭난 본성이 이끄는 행위와 삶이 아니라 성경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행하려 노력한다면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라 해도 율법이 된다. 율법의 정의는 의로워지고 노력이나 신념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의로워지려는 목적으로 노력이나 신념으로 말씀을 행위로 지키는 것

 

따라서 진정한 물세례는 침례나, 물로 안수 받는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지켜야 하는 어떤 이유나 목적을 인하여 성경을 지키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어쩔 없이 지키는 본성 없이 지키려는 자신의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없을 아니라 그것은 죽음과 같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없는 세례라고 해도 아무 의미 없다. 오히려 온전하지 않은 세례를 온전한 것으로 여겨 진정한 세례를 받을 이유를 망각하게 되는 깊은 사망에 빠질 뿐이다.

 

광야에서 베푼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위한 필수적 단계다. 자신이 지금까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 안에 있었다는 고백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될 없다. 복음은 노력이나 신념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 어쩔 없이 성경을 지키게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성경을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킬 수밖에 없는 본성이 자기 안에 없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지 않았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물세례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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