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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 출간 서적 소개 Date : 2022. 6. 14. 14:05 Writer : 김홍덕

 

 

낯선 그리스도

모든 신앙인이 본받고자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변화산 사건 전후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다. 제자들의 혼란은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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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성경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치유에 대한 말씀을 예수를 믿으면 육신의 병을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으로만 국한된 생각을 하고, 또한 그렇게 기도로 병을 고치면 기적이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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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교회는 모르는 빌레몬서

빌레몬서는 아주 짧은 성경이다. 그 내용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아주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단순하게 보면 주인의 돈을 훔쳐서 달아난 종이 바울을 만나서 예수를 믿기로 했으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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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교회는 모르는 <주기도문>

교회가 적지 않게 사회에 유익을 끼치면서도 늘 비판을 받고 있다. 그것은 누구나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려면 돈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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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21-23) 등불은 등경 위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6. 13. 11:00 Writer : 김홍덕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막 4:21)

 

이 말씀은 등불을 말 혹은 평상 아래 두지 않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존재 정체성 역시 빛이므로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이처럼 바로 인식하려면 먼저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게 곧 구원이다.

 

그러나 성경의 행간을 읽기보단 문자 그대로 보고, 세상 역시 눈에 보이는 걸 본질로 보는 일반적인 사람은 빛을 물리적 광원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빛은 인식이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사람에게 시작된다는 의미다.

 

사실 사람은 빛이 인식이란 걸 무의식중에 알고 있다. ‘컴맹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컴퓨터에 밝음이 없는 것을 어둡다고 하는 게 그 예다. 문맹 역시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죄에 빠진 사람, 구원이 없는 사람을 두고 성경이 어둡다라고 하심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는 상태가 어두움이고 혼동의 흑암이며 구원이 없는 죄의 상태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해 어둡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기에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정체성이 사람 중에 높이 들려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이 빛으로서 높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건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다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연히 드러날 빛인 예수님과 말씀이 감춰져 있다는 의미로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을 빛으로 온전히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등불이 들려져 있지 않은 상태란 말이다.

 

실제로 성령이 오신 다음에야 극히 일부 사람에게서부터 온전한 그리스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온전히 사람에게 비췬 건 성령이 오신 이후이므로 그 이전에 예수님은 분명 감춰진 빛이었다. 성령이 오시긴 전엔 심지어 제자들조차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물론 예수님은 처음 오실 때부터 온전한 빛이셨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겐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므로 알지 못했다는 의미다.

 

성령이 오시기 전엔 빛이신 예수님께서 높이 들리지 못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서 제대로 등경 위에 올려진 건 바로 십자가다. 하나님의 아들이 금면류관 쓰고 왕이 되어 높이 들린 게 아니라 십자가에 들리신 게 빛으로 높이 들리신 일이다.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놋뱀과 같이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높이 들린 등불이 모든 사람을 비추듯 십자가에 들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에게 영생이란 빛이 비췬단 것을 말씀하심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구원은 있어선 안 될 어떤 자리, 위험에서 해방되었단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하려면 구원 이전의 상태부터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처한 어떤 상황이 구원이 필요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상황에선 누구에게 어떤 구원을 청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놀랍게도 구원받았다는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사실상 모른다. 말이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구원받았다면서 기도할 때마다 죄를 회개하는 건 너무 명백한 모순인데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어두운 게 사람이다. 빛이 비취고 모든 걸 인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모든 걸 알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들리시므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이고 십자가에 들리심이 등불을 높이 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의 핵심은 역시 십자가다.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자리는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바로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데서 구하시는 구원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예수님께서 등불처럼 십자가에 들리시므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아 높이 들린 등불이 비취므로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빛이 비취듯,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서 자기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게 된다. 그게 구원이고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신 이유다. 등불과 같이 십자가에 들리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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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1-20) 씨 뿌리는 비유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6. 9. 11:27 Writer : 김홍덕

좋은 땅

교회는 씨 뿌리는 비유를 가지고 성도들에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 방법을 설교한다. 하지만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좋은 땅이 되는 거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은 길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지도 못할 심령, 자기 의로움이나 세상 걱정이 많은 심령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이건 쉬운 게 아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사람들의 생각이나 기대와 달리 오늘날 기독교인 대부분은 새가 와서 씨를 다 먹어버리는 길가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기도 하니 씨가 뿌려져 싹이 나고 있다고 여기지만, 십자가를 지고 낮아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힘입어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심령에 심길 리는 없다. 즉 심령에 하나님 말씀이 심기지 않는다. 그나마 떨어진 흔적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설교하는 백배의 열매 맺는 방법은 모두 신기루고 희망 고문이다. 백배가 아니라 최소한의 열매라도 맺으려면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 싹이 나야 하는 데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을 싹트게 하는 말씀이 높아지고 이기려는 마음에서 싹을 피울 순 없다.

 

또한 교회가 추구하는 방법이 성경을 지키는 거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성경을 지킨 공로로 인해 세상에서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믿음을 가진 심령에서 십자가를 지는 말씀이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명백히 방향이 반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능하다고, 그렇게 하라고 외치는 게 설교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방법이라 말하는 말들은 사실상 무덤에 회칠하는 것에 불과하다.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의 흔적을 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열매가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는 당연히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열매다. 그 기준을 가진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세상의 실패자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을 나타내는 열매라는 믿음은 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의 삶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는 십자가에서만 열린다. 따라서 좋은 땅,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 맺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열매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며, 또 그 삶을 통해 거듭나게 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이 열매는 지겹도록 설명한 바와 같이 낮아지는 삶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더 옳지만 옳지 않은 자들의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본성, 더 온전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자들의 주장에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낮아지는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삶이 열매고, 이렇게 낮아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좋은 땅이다. 그 좋은 땅은 시절을 좇아, 삶을 살아가면 갈수록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하루하루를 산다는 게 십자가를 지는 삶이므로 살수록 열매가 배가 된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본성, 낮아지고, 어리석은 주장 앞에 육신의 수고와 육신을 내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이고, 그 삶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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