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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회개를 촉구하는 전도 여행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의도대로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을 뿐 아니라 많은 병자를 기름을 발라 낫게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육신의 질병이나 정신적 이상이 죄로 인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역사적인 뿌리도 깊고 참 고치기 어려운 사람의 관념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육신이 멀쩡한 사람은 회개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정도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을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육신의 질병을 고치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육신의 질병이나 귀신 들린 건 회개할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은 사람인 건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귀신 내쫓는 권세는 육신에 행하는 권세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의 질병은 구원의 증거나 기준이 될 수 없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영적 구원의 예표로 육신의 질병을 고친 것이다.

 

많은 글에서 설명했듯 귀신 들렸다는 건 정신 이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조성한 육신은 하나님의 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주관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 아닌 다른 게 육신의 삶을 지배하고,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게 바로 귀신 들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귀신 내쫓는 권세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데 사람을 주관하고 있는 것, 그것을 내쫓는 권세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걸 추구하던 삶에서 돌아서는 것, 그것이 회개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질병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예표다. 맹인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귀머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며, 중풍은 하나님의 의가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며, 귀신 들린 건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게 삶을 주관하는 것의 예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와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기름을 발랐다는 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육신이 병든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상태에서 돌아서는 회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한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말이다.

 

제자들을 보내시며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게 있다. 지팡이 외에 양식이나 전대(돈주머니)는 물론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뉘 집에 들어가면 떠나기까지 머물라고 하셨다. 반대로 회개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고 떠나라고 하셨다.

 

끝까지 머무른다는 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복음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다. 회개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선택하여 인생의 길을 바꾸어 기름 부은 자인 그리스도로 거듭났기에 기름을 발랐다. 반면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의 집에선 즉시 나와서 발의 먼지를 털어내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다. 증거는 복음을 전했으나 사람이 스스로 배척했다는 증거를 말한다. 이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때 핑계치 못하게 된다.

 

제자들의 전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결과는 이때까지 삶이 귀신 들린 삶이었다는 말씀을 영접하느냐의 차이

 

예수님의 말씀과 구원은 강제된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구원을 얻는 건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이다. 제자들이 끝까지 머무르는 사람과 발의 먼지를 털어 증거를 삼는 사람의 차이는 단 한 가지다. 지금까지 너의 인생은 귀신 들린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영접하느냐의 차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강요하지 않는다. 간절히 바라시고 예정하셨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그 무한한 능력으로 우리 정신을 무력화하여 최면 걸린 상태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건 어렵지 않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건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법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렇다.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시인하고 순종할 수 있는 모범을 보이는 게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본성은 거역할 수 없으므로 강제하지 않고 모범을 보일 수밖에 없는 생명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그런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완성된 존재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 사람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이자 성품이다. 십자가로 끌려가신 예수님은 하늘의 천군을 불러 군병을 물리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도 그리스도의 본성 때문이다.

 

무한한 창조주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사람이 자신을 섬기도록 강제하시지 않는다. 예수님도 복음을 전하실 뿐 강제하시지 않았다. 고향에서도 그랬고 제자들을 보낼 때도 그랬다. 그 무한한 능력에도 사람에게 전할 뿐 아니라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이셨다.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 목적이 그와 같음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사람이 순종하면 끝까지 함께 하시나, 듣지 않으면 상관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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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고향으로 가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 가르침에 사람들은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권능이 그곳에서 소용없었다. 예수님께선 그 이유가 선지자가 고향에서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막 6:4)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을 언급하며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예수님을 정의했다. 예수님의 겉모습을 기준으로 너나 나나 별것 없는 존재 아니냐?’라는 생각이다. 회당에서 가르치신 말씀의 놀라움보다 예수님 육신의 신분이 더 중요했다. 한 마디로 내용보단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이다.

 

사람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는 그 속에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껍데기밖에 없으므로 내용을 볼 수 없다. 이건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사람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의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담을 그릇이요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으로 창조된 사람 안에 당연히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없으면 모든 걸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서 생명이 된 사람 역시 그렇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는 건 하나님의 안목,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걸 보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존재를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학력이나 재력이나 신분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육신의 품행이나 경건한 모양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기준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즉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다는 하는 건 같은 본성이다.

 

예배 시간에 지각하니 하나님께서 벌주신 거다’, ‘신권으로 헌금하면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처럼 육신의 모양, 행세, 공로와 업적을 보고 하나님께서 상이나 벌을 주신다는 생각은 분명 겉모습이 기준이다. 말씀 선포에 목사 같은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대표적 현상인 셈이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도 그랬다. 목수 주제에 놀라운 말씀을 전해봤자 목수의 말일 뿐이라는 그들의 가치관이나 목사가 아니면 설교할 수 없다는 건 완전히 같은 가치관이다. 그런 가치관에 동조하는 신앙인들 역시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건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 없는 외식하는 신앙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무력화된 구원 없는 신앙임을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그 속에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심령에서 생명이 되게 예수님 말씀이 아무런 권능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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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귀신을 치유하고 오시는 예수님 앞에 야이로란 회당장이 엎드려 죽을 지경이 된 자기 딸의 구원을 청했다. 그의 청대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향했으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아이는 죽었고, 이미 장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시니 오히려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죽은 게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건 예수님이 보실 때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은 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죽음은 잠자는 것과 같다.

 

예수님 앞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은 잠자는 존재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망 가운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보이셨다. 죄로 인하여 죽었으나 살리기 위해 오신 예수님 앞에서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모두 자는 자와 같다. 야이로의 딸은 죄와 사망으로 죽은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그뿐 아니다. 예수님께선 직접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바울 사도는 이를 두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모든 성도 역시 잠자는 자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성경의 이런 맥락은 죽은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 앞에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자는 아이가 일어나듯 죄와 사망이 결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새롭고 거듭난 생명이 주어진다는 걸 보여준다. 죄와 사망이 예수님 앞에선 자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기적에는 죽은 딸이 살아났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딸을 낳은 회당장 야이로다. 야이로는 회당은 말씀이 선포되는 회당의 장이라는 것과 그가 아들 아닌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오는 과정에서 혈루증으로 잉태치 못하는 여인을 고치신 일도 결을 같이 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남자 여자 역시 육신의 성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사람은 육신의 성별과 무관하게 하나님 앞에서 여자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자 씨가 흙인 육신 안에 심겨 하나님 아들이란 거듭난 생명을 낳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이것이 성별과 무관하게 육신 가진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으면 남자, 형식만 있으면 여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가 그의 신부인 이유다. 성경의 행간을 알지 못하니 이슬람처럼 여성이 억압받기도 하고 반대로 어머니 하나님 같은 멍청한 말을 하는 이들도 생긴다.

 

성경 속 남자(아들)는 의를 가진 존재를, 여자(딸)는 의를 표현할 형식을 의미한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가 딸을 낳았다는 건 그의 회당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내용은 없고 예수님께서 외식이라고 하신 형식만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고, 거듭나게 하지 못하므로 죽은 신앙이다. 그 죽은 신앙이 그의 딸로 표현된 것이다.

 

회당장이 딸을 낳았다는 건, 말씀에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았다는 것

 

그러나 야이로는 자신의 그 상황을 알고 있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회당장이 길거리에서 왕도 제사장도 총독도 아닌 사람에게 엎드린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야이로는 자신에게 하나님 의가 없으며 자신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란 것을 예수님 앞에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이 딸을 살렸다. 그리고 그건 자기 신앙의 회복을 의미한다.

 

내용은 없고 외식만 남은 신앙은 죽은 것

 

잉태할 수 없는 여자인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잉태할 수 없는 질병인 혈루증을 고친 여인의 일 역시 야이로의 딸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간에 끼인 것 같지만 같은 일이고 하나의 말씀이다.

 

혈루증 여인과 사람을 하나님 아들로 거듭나게 하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회당의 장이지만 딸을 낳은 야이로 그리고 그마저도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고 죽은 딸은 모두 죄와 사망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의 모습이다. 바로 우리 모습을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혈루증 여인, 야이로와 그의 딸의 모습과 상황이 예수님 만나기 전 나의 모습임을 발견해야 한다. 그 발견은 곧 예수님과 만났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우리의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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