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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이나 세상 관원이 알 수 없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태초부터 정해졌으나 감춰진 비밀로 만약 관원들이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란 게 그 이유다.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와 관련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고의로 감추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향한 생각과 뜻을 감추시지 않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면서까지 말씀하시는 분이다. 다만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세상을 보니 하나님의 생각이 보이지 않아 감춰진 같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니 창조 계획과 목적과 뜻은 창조 전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혜인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창세 전부터 영원히 하나님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창세 전부터 있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논하는데 관원을 언급한 여러모로 관원은 세상 지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추구하는 지혜에 능통할수록 높은 관원이 되는 생각하면 쉽다. 문제는 관원으로 상징되는 세상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없는 이유다. 이유가 특히 중요한 고린도교회 성도와 오늘날 신앙인들 역시 세상 지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태초부터 있던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되었고 그 중에서 사람은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표현할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의도대로 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다고 했는데 육신이 된 말씀이 드러났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에 드러났다는 의미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이렇게 하나님의 비밀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났는데 감춰져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사람이 십자가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과 관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한 것이라 말씀하신 이유다. 하지만 세상에서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심지어 많은 종교인들이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 믿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정확히 새겨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로 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의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다.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본성 때문에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본성을 인하여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말씀대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인지를 반추해 보면 된다. 이것을 돌아봄에 양심이 필요하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고 할 때 그 양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바울 사도는 사람의 사정을 그 속에 있는 영만 알 듯 하나님의 사정 역시 하나님의 영이어야 알 수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으로는 알 수 없고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간주하지만 성령의 가장 본질적인 직임과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알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잉태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인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우리의 구원이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지혜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인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는 생명이다. 따라서 성령 없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만 알 수 있다. 또한 바울 사도가 말씀한 온전한 자가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사람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라는 창세 전부터 있던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이 되는 게 하나님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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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1-10) 4,000명을 먹이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0. 5. 13:02 Writer : 김홍덕

오병이어와 비슷한 것 같은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사실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신 일부터 연결된 일이다. 앞선 제자들의 전도 여행, 오병이어,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신 일, 바리새인들과 논쟁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과 에바다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을 그 즈음에라는 말로 연결한 것만 봐도 그 연관성을 알 수 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와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은 상당히 유사해 보이지만, 오병이어는 연결된 흐름의 시작을,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무리다. 제자들의 전도 여행으로 회개한 사람, 자기 안에 있던 귀신을 내쫓고 나니 비어버린 심령이 된 사람은 그 자체로 광야에서 굶주린 상태다. 광야에 모인 오천 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반면에 사천 명은 에바다 이후에 모인 사람들이다. 귀와 입이 열린 사람들이란 의미다. 이들은 오천 명과 달리 사흘 밤낮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의 본질이 열리지 않고선 함께 할 수 없는 시간과 열정이다.

 

오천 명은 심령이 공허한 사람들
사천 명은 귀와 입이 열린 사람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도 다르다. 오천 명이 굶주렸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합니까? 이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합니다.’고 했다. 반면 귀와 입이 열린 사천 명의 때엔 너희가 가진 떡(양식)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니 떡이 7개 있다고 했다. 다들 알고 있듯 성경 속 숫자 7은 완전수다. 제자들 안에 온전한 양식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도 틀리지 않는다.

 

제자들의 전도 여행으로 회개한 오천 명은 마음을 비워낸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귀신 내쫓는 권세 앞에 회개했다는 건 귀신이 떠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 아닌데 인생의 목적과 성공인양 좇던 많은 것들을 비워낸 게 회개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전도로 회개했다는 건 이때까지 자기가 신앙하던 것에서 돌아섰다는 의미다. 공허한 광야에 모인 오천 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때까지 인생을 채우고 있던 것을 비워낸 공허로 인한 굶주린 우리의 모습이다. 신앙이 시작될 때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공허한 광야에 모인 오천 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때까지 인생을 채우고 있던 것을 비워낸 공허로 인한 굶주린 우리의 모습

 

반면에 사천 명은 성격이 좀 다르다. 사천 명은 에바다, 곧 열린 사람들이다. 무엇이 큰 믿음인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인지가 열린 사람들이다. 이게 열리지 않았는데 사흘 밤낮을 먹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리는 없다. 인생의 목적이 예수님의 말씀에 있지 않은데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3’이라면 하나님의 숫자다. 달력으로 3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시간을 거쳐내었다는 의미다.

 

사천 명을 먹이실 때는 먹을 게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떡이 일곱 개(물고기 두어 마리 포함) 있다고 지체 없이 제자들이 답한다. 이 광야에는 먹을 게 없고 음식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이라 답한 오병이어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았다. 자기 안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하늘 양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은 이런 놀라운 능력의 주로 믿고 자기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면 해결된다고 기대하고 믿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그건 거듭난 게 아니다. 더 심각한 건 예수님이 사회적 민생 문제 해결에 관심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걸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육신이나 육신이 속한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다. 그런 건 육신 가진 인생의 목적을 알면 절로 해결된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면 다 해결될 문제다.

 

오병이어를 육신의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기적으로 보면 안 된다.

 

오천 명 때나 사천 명 때나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육신의 양식 문제가 아니라 하늘 양식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말씀하실 때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하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 곧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육신의 양식은 육신 안으로 넣는 것이나, 하늘 양식은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우리가 간과하거나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사람, 거듭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예수님처럼 되라고 만든 존재가 사람이고, 그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할 뿐이지 예수님처럼 될 수 있나?’라는 말이 얼마나 무식하고 어리석은 말인지 알 수 있다.

 

오병이어와 사천 명을 먹이신 건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이며, 하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일을 이루는 삶게 하는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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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31-37) 에바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9. 28. 07:47 Writer : 김홍덕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대로 그 딸을 고치신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주기를 간구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소 이상한 행동으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셨다. 안수를 청했는데 따로 데려가서는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무엇보다 침을 뱉고 그 사람의 혀에 손을 대시고는 하늘을 우러러 ‘에바다’라고 하시며 그를 고치셨다.

 

이 말씀은 앞선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모욕적인 행위인 침을 뱉는 행위로 사람을 치유하신 거나 이방인이란 이유로 개에 빗대는 건 당연히 연결된 사건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과 함께 보는 게 온전한 이해를 돕는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열리다고 하신 건 단지 사람들이 데려온 귀먹고 어눌한 사람만이 아니란 거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이 땅에 와 십자가에 달리셔서 말씀하셨음에도 순종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들리지 않고, 그 말이 모순되고 어눌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 무엇보다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가 열리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구세주가 침을 뱉어 사람을 고친 게 이상한 일인가?

이 사건과 비슷한 일로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에 바른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심으로 고치신 일도 있다. 이런 모습은 사실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왜 그랬을까?’에 주목한다. 그러나 진정 주목해야 하는 건 예수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 이다. 누군지가 분명하면 행동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 보기에 때로 엄마가 이해되지 않을지 몰라도 엄마는 항상 아이를 위하는 사람인 것과 같다.

 

침을 뱉는다는 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모욕을 주는 행위다. 그런 이유로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님께서 굳이 이런 행동으로 병을 고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그 생각이 우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고, 우리에게 하늘의 뜻이 열리도록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분이라는 걸 먼저 주목하고 있다면 쟁점은 ‘왜 굳이 침을?’이 아니라 ‘그래서 뭐가 열려야 하는 건가?’가 된다.

 

우리는 이 말씀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이 말씀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보여준 믿음과 순종이 우리에게 열리기를 바라시는 말씀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라고 하고 침을 뱉어 사람을 고치는 걸 이상하게 여기며 ‘왜 그랬을까?’ 고민하다 못해 학문으로 연구하는 귀먹고 어눌한 이들에게 순종과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가 열리기를 구하시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엄청난 착각 속에서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를 알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예수님 앞에 나는 죽고 주님은 산다’고 곧잘 하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죽은 사람은 어떤 저항, 어떤 자존심, 어떤 모욕도 느낄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 앞에 죽은 자와 같다는 걸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필이면 침을 뱉어 사람을 고쳐? 더럽게’ 같은 관점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산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침을 뱉어 사람을 고치는 게 이상할 리 없다.

 

정말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산다는 게 진심이라면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고치시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왜 하필 침을 뱉어서…?’가 아니라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다. 왜 하필 침을 뱉어 사람을 고치느냐 보다 정말로 이상한 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까지 나를 살리느냐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고치신 일이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신 일에서 중요한 건 예수님의 표현과 행위 방식이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가가 핵심이다. 이 관계 정립이 정말 분명하다면 모욕적이거나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수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 정립, 그게 바로 <큰 믿음>이란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여신 건 모든 사람의 귀와 입

이 말씀 속 귀먹고 어눌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혼자 고침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귀먹고 어눌한 걸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기에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이다. 이들은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듯 이 사건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이 열리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왜 하필 침을 뱉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을 보고 ‘그래도 그렇지 개라니?’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 그것이 큰 신학적 비밀이라도 되는 냥 연구하고 어려워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믿음이 무엇인지, 올바른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열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열려야 하는 것 ‘왜 침을 뱉어서 고친거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예수님 앞에 나의 존재 정체성 그리고  믿음과 순종에 대한 온전한 개념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께서 정한 나와의 관계와 나의 존재 정체성 회복을 위한 것이란 것을 믿는 믿음이다. 

 

이것을 방향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여 성취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신 말씀은 이게 믿음이고 온전한 순종이란 게 우리 안에 열리기를 원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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