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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책망한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세상의 지혜, 육신의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망은 오늘날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사도를 빌미로 분열했다면 지금은 교리나 세례 방식 등 신앙적 이슈로 분열되어 있다. 복음과 신앙을 이유로 복음이 분열된 것이다. 세상의 지혜와 가치관으로 성경을 조명한 결과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람의 생각과 일, 곧 공력에 대해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심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을 견디는 공력의 말씀>이다. 각 사람의 공력이 쌓으나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공력이 있고, 또 한편으로 금과 은, 보석과 같은 공력이 있다는 것이다. 문맥상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일으킨 생각으로 쌓은 공력은 불에 견딜 수 없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복음을 이유로 복음을 분열시키는 사람의 생각을 책망하는 글이라는 걸 생각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가 생각하는 공력 역시 그렇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공력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그건 바로 공력을 쌓는 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터를 자신이 닦은 터,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믿는지에 따라 그 위에 쌓는 공력도 정해진다. 쌓는 건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같아야 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는 하나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바울 사도 뿐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 그렇다. 따라서 복음을 이유로 분열된 생각 위에 쌓은 공력은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다. 즉 복음적인 이슈, 신앙적 이슈로 분열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공력은 설사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지푸라기 같은 공력에 불과하다. 즉 세례나 교리와 같이 신앙 가치관을 기준으로 분열된 오늘날 기독교가 생각하는 공력은 다 지푸라기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1:13)

 

그러므로 세례, 교리, 예식 심지어 교단의 조직 구조 등을 이유로 분열된 교회 안에서 정의되는 공력은 한 마디로 모두 지푸라기며 불법이다. 사도를 빌미로 분열한 고린도 교회나 세례를 가지고 분열한 오늘날 교회나 천로역정에 나오는 담 넘어 들어온 순례자와 같이 출발이 거짓되었으므로 다음의 모든 건 다 거짓이다.

 

유일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분열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력이 그들의 거짓을 증명한다. 새벽기도회나 땀 흘린 식사 봉사 열심히 공부한 성과로 얻은 목사 자격증과 같이 열심히 수고한 육신의 공로를 귀한 공력으로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육신의 수고가 공력의 기준이다. 분열을 일으키는 내가 더 옳다는 생각과 DNA가 같다. 그러나 이건 세상의 가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는 낮아진 존재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존귀하다고 믿는다지만 정작 귀함의 기준은 세상 기준이다. 신앙도 육신으로 더 수고하는 걸 공력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신학을 더 공부한 사람이 목사가 되고, 헌금 많이 하고 육신으로 수고를 더 많이 한 사람이 장로 권사가 된다. 신앙도 a little higher, a little more가 의로움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생각과 달리 그리스도의 가치는 낮은데 있다. 가장 존귀한 예수님의 존귀함은 알고 보면 세상 가치로 가장 낮은 십자가다. 즉 높아지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생각하면 안 된다. 기독교인의 생각처럼 남들보다 더한 신앙적 수고와 공로가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이 아니다.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터 위에 쌓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맞아야 한다. 그리스도라는 생명과 그 본성에 합당하지 않는 건 아무리 쌓아도 쓰레기다. 다 치우고 버려야 한다. 다 불타 없어진다. 육신의 수고로 이루는 새벽기도, 신학공부, 봉사나 선교활동이나 해박한 성경지식 등은 그리스도와 본성이 다르다. 그런 건 모두 불타는 지푸라기나 쓰레기일 뿐이다.

 

남다른 신앙적 공로를 가지고 서로 갈라선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책망이 이것이다. 내가 더 낫다는 명분으로 사도를 옹립하여 분당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다 불타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 말씀은 남보다 더 많은 수고와 공로를 상급이라 생각하는 오늘날 신앙인에게도 동일한 책망이자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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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27-38) 나를 누구라 하느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0. 31. 15:27 Writer : 김홍덕

변화산 사건 전, 더 의미 있는 시점으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기 전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다. 아마도 모르실 리 없었을 것 같지만. 제자들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는 걸 전했다. 그때 예수님께선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물음에 베드로가 유명한 고백으로 답한다. “주는 그리스도라고.

 

교회를 조금만 다녔다면 이 말씀을 모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 말씀을 바로 안다는 건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안다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자신이 죄가 없다는 걸 확신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처럼 되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다. 바로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불가피하게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앙을 소환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시는지, 내가 원하는 것 예수님께서 내게 베푸시게 하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믿으며 신앙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의 이 질문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나는 너에게 누구이냐?(어떤 존재이냐?)”라고 묻고 계신다. 이 질문에는 “그럼 넌 나에게 어떤 존재며, 어떤 의미냐?”도 포함되어 있다. 이걸 함축하면 ‘너와 나는 어떤 관계냐?’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겼다. 엘리야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였다. 그것도 민생의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하는 선지자였다. 그리고 선지자는 자신들의 행위를 책망하는 사람이었다. 즉 예수님을 자신들의 행위를 교훈하는 선지자로 알았다는 의미다.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답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다. 이를 말리는 베드로를 사탄이라 책망하시면서까지 말씀하신 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에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함을 대입하면 우리의 구원인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존재란 것이다. 이게 우리 인생의 목적이며 존재의 의미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논한다. 안다고 말한다. 심지어 매일 회개하는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겨우 기름 부은 받은 자라는 단어의 의미나, 그 의미가 곧 메시아(구원자)라는 걸 안다고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안다고 여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건 그 구원이 대신 지불이란 개념의 대속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을 죄는 내가, 벌은 그리스도가로 아는 게 그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거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물음 속에는 너희와 내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You)’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사람들(Who)’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셨다. 우리를 정체성이 같은 존재로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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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를 어린아이 같이 대한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자존심을 긁는 말일 수 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신령한 사람이라 여기는 교만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어린 아이와 같다고 일갈했다. 이유는 육에 속한 사람이란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당을 짓고 자신이 속한 당에 바울, 아볼로, 게바와 같은 사도의 이름을 붙였다. 바울 사도는 이런 현상을 세상의 지식으로 신앙을 조명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고 육에 속한 상태라고 정의했다.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와 같은 사도의 성향을 따라 당을 이룬 것을 그 증거로 삼았다. 그리스도파는 아마도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의 모임이었을 것이다.

 

분열하고 당을 이루는 이유는 사실 복잡하지 않다. 단 하나다. 너는 그르고 나는 옳다는 생각이 원인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같은 이들이 모여 당을 짓고 자신들의 생각과 비슷한 사도를 도용해 자신들의 생각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게 분열의 통일된 생리다.

 

사실 오늘날 세례의 형식을 두고 갈라진 교회도 이와 같다. 또 다른 이유로 교파가 갈라지는 것도 같다. 교회가 둘 이상으로 갈라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이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사람 간에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여 당을 이루고 분열한다. 이건 사실 선악과의 문제인데 그건 다른 곳에서 많이 다루었다. 분명한 건 사도들은 그 누구도 여하의 이유로 분열을 원치 않았다. 육에 속한 사람들로 인해 졸지에 분당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분당은 하나의 이슈일 수 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가진 모든 문제의 뿌리에서 비롯된 증거로 본다. 그 뿌리는 육에 속한 생각, 세상의 지혜라고 정의하고 책망한다. 뒤이어 언급하는 간음이나 스스로 섰다고 여기는 교만이나 우상의 제물과 같은 모든 문제는 이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나 아볼로나 모든 사도는 하나님의 동역자며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밭과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씨를 뿌리는 자나 물을 주는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말한다. 결국 씨 안에 있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이건 자신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형상이고 본질이자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의미다. 더 간략하게 표현하면 자신은 형식이고 복음이 내용이란 의미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도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형상으로 본다는 건 신령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할 형상이고, 표현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만드는 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걸 볼 수 있다는 건 자신이 그런 사람이란 의미다.

 

사도에 대한 인식 = 자기 정체성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형상으로 보려면 자기 안에 표현할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육신의 노력으로 그 의를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 가지를 지키다 한 가지만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긴 게 된다. 하지만 생명이라면 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본성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어길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사도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고 분당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에 속한 사람이며 신령한 것으로 먹이지 않았다고 한 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사람이 아니란 말씀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기도하는 오늘날 신앙인 역시 스스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나 육에 속한 사람이다. 그들은 성경은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성으로 하는 게 아니다. 본성으로 하는 게 아니란 건 생명이 아니란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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