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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시작부터 책망해 온 바울 사도는 이제 본격적인 교훈을 전한다. 지금부터 너희를 교훈할 것인데 이런 나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마땅히 여겨야 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건 어쩌면 4장의 시작은 책망을 하는 본인의 자격을 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이라고 밝힌다. 이는 세상 지혜에 의지하여 신앙을 조명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와 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지혜로 신앙을 조명하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바울 사도의 말이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바울 사도의 자격만이 아니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이 말씀을 듣고 보는 모든 사람 역시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따라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란 말씀은 바울 사도 자신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충성하고 있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비밀을 맡게 되는 누구라도 충성을 구하여야 한단 말씀이다. 그리고 비밀을 맡는다는 말 속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도 녹아 있다. 하나님의 비밀이 우리 안에 내재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헬라어에서 충성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믿음이라면 반대 방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순종을 인정하시는 게 바로 충성이다. 따라서 충성은 믿음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므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온전히 순종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기신다. 이게 바로 맡은 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바울 사도는 이런 자신은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게 그리 큰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비밀을 가졌기에 양심에 거리끼는 게 없으며 세상이 자신을 심판하는 건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단 것이다. 세상 사람 보기에 그럴 듯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오늘날 신앙인의 모습과 완전히 상반된 고백이다. 오늘의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걸 충성스런 일로 여기지만, 세상에서 바울 사도는 처형을 당한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앞에 영광스런 사람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울 사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한 것은 오늘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의도와 같이 과연 양심에 걸림 없는 사람, 세상의 판단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인가 비추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 곧 순종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받아 간직한 사람인지 깨닫게 한다. 이렇게 성경을 봐야 나의 말씀이 된다. 즉 성경의 약속이 나에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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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어떤 것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대의 음란함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성경을 논하거나 묵상하는 걸 부끄러워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부끄러워하고 외면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선 영광으로 여긴 길을 사람은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물론 기독교인들도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말은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낮아지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 반대로 세상에서 낮아짐을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기고 패자와 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본심이다. 그 본심은 “예수 믿는 사람이 남보다 못한 삶을 살아서 되겠냐?”로 표현된다.

 

낮아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같아지는 걸 원치 않는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직접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기억한다면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는 삶을 외면하는 자체가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세대의 음란함은 무엇인가?

예수님과 사도들은 물론이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는 그가 살던 시대를 음란하다고 말한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는 항상 매춘이나 간통과 같은 일이 있으니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육체적 음란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고 육체적 음란을 무관한 일로 치부하면 안 된다. 육신은 생각을 표현하는 개체기 때문이다.

 

여러 포스팅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남녀의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대변한다. 이것을 논리적 용어로 바꾸면 내용과 형식이 된다. 남자는 의와 내용을 가진 존재, 여자는 형식을 표현하고 낳는 존재란 의미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뜻, 무엇보다 형상이라 표현한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인 관계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의와 가치를 사람이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그 존재 목적을 버리고 다른 의와 가치를 추구하고 자기 의로 삼는 게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이다. 따라서 어느 세대나 늘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는 음란은 세상을 주도했다. 그래서 늘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앞서 설명한 인생의 목적인 낮아지는 십자가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사모하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이다. 하나님께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를 지도록 하면서까지 낮아지는 하나님의 의와 뜻을 보이셨는데,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 높아지는 것이 의로운 것이란 가치를 사모하고 자기 의, 곧 자기 신랑으로 삼은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음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때 이런 사람을 부끄러워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말씀이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표현하는 삶인 낮아지는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세상의 가치를 사모한 사람은 낮아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신 예수님이 보실 때 오히려 부끄러운 삶이다. 

 

그리고 이런 삶이 바로 천하를 얻고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를 좇았으니 세상을 얻은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존재 목적을 부끄럽게 여기고 외면했으니 자기 목숨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그게 바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다.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는 낮아지는 삶이 인생의 목적이란 것을 보이시고, 사람이 그 목적이 회복된 살아 있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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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vs. 현대자동차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2. 11. 21. 08:41 Writer : 김홍덕

일상에서 하나님의 경영을 관찰 하노라면 의외로 재밌는 포인트가 많다. 중에 하나를 이야기 보고자 한다. 바로 신앙인들의 믿음에 관한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언급된 현대자동차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아니다. 주제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산품을 만드는 제조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글쓴이가 늘 반추하는 묵상의 일부기도 하다.

 

가끔식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기독교인들은 사실 하나님보다 현대자동차를 믿는다.”. 농담이나 궤변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교회 대예배 시간엔 나라를 걱정한다. 같은 시간 암송하는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며 하나님 믿는 믿음을 고백해 놓고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기도한다. 사실 이런 궤변이다.

 

기독교인들은 사실 하나님보다 현대자동차를 더 믿는다

 

아마도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차를 타는 사람이 제일 많을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는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물건으로 위험이 상존하는 공산품이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 상당수가 운전석에 앉을 안위를 의지하는 기도를 한다. 물론 자녀나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당부도 한다.

 

한편 신앙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은 육신의 일이다. 먹는 , 입는 , 자는 것으로 대변하거나, 건강이나 성공으로 대변하는 것들이다. 문제는 이런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도한단 것이다. 심각한 기독교인의 기도는 이것 뿐이란 것이다.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다. 믿고 있다면 모든 기도 제목을 점유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현대자동차로 대변되는 공산품들이 고장나면 사람들은 놀라고 화를 낸다. 그래서 제조사나 서비스센터를 가서 화를 내기도 한다. 이렇듯 실망하고 화를 내는 이유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에 대한 배신은 광고와 기업을 믿고 샀는데 이러면 되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표현된다. 생각해보면 공산품에 대한 사람의 믿음이 상당함을 있다.

 

조금 이야기 보자면 심지어 10 혹은 이상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사용할 때도 고장 나면 어떻하지?’라며 매번 염려하며 사용하진 않는다. 어떤 목숨을 위협하기도 하는데도 그렇다. 오죽하면 안전 불감증이란 말이 있을까? 정도로 고장을 염려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만든 물건을 더 신뢰한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만든 물건을 신뢰한다. 궤변이나 억척 같지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 문제의 핵심은 세상의 본질에 대한 관점이다. 사실은 본질이 아니라 나타난 형식일 뿐인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성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이 만들어 완성되어 과거가 형상을 신뢰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히 11:3)

 

예수님께선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아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창조 목적에 필요한 것을 모두 아신다. ‘이동이란 목적으로 자동차를 사는 사람이 주유와 정비가 필요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다만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본질로 여기지 않기에 이를 믿지 않을 뿐이다. 오늘 신앙인들 믿음의 실체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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