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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는 교회가 여러 계파로 분열한 이유에 대한 책망이 전체에 녹아 있다. 시작부터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했다. 바울 사도는 높아지는 것을 가치로 여기고 이를 추구하는 세상 지혜로 조명하고 가늠하며 서로 주장하기 때문에 생겼다고 말씀한다.

 

이와 같은 바울 사도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 지혜를 좇는 것은 하나님께 맞서는 것이고, 또 하나님 말씀 밖으로 이탈한 것이다. 이는 바울 사도만의 관점은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는 그 의미 자체가 자리를 벗어난, 자리를 이탈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 말씀 밖에서 가치와 정체성을 탐구하는 게 바로 죄다. 바울 사도는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하라는 말씀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문자로, 구전으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의가 표현된 하나의 형식이다. 문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성경의 행간에 담긴 하나님의 의가 말씀의 본질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말씀 밖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말씀의 본체이자 완전체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지혜가 추구하는 높아짐과 달리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따라서 높아지고 크고 위대해지는 걸 추구하는 게 바로 말씀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세상 지혜로 분열된 교회를 책망하는 바울 사도 말씀의 본질이다.

 

바울사도는 성도들이 스스로를 구별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 공로 아닌 은혜로 얻은 것인데 받지 않은 척, 즉 스스로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고 책망한다. 이어 복음을 전한 바울 사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하신 양 고생하고 헐 벗고 매맞으며 말씀대로 살고 있건만, 전한 말씀을 들은 이들은 왕처럼 스스로 구원을 이룬 사람처럼 생각한다고 꾸짖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다는 고린도전서 410절의 말씀은 언뜻 칭찬 같아 보이지만 고린도 교회의 교만을 책망하는 말씀이다. 스스로 왕이 되고, 스스로 구분하여 계파를 형성한 신앙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목해 볼 건 스스로 구분()하고 받은 것을 받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는 말씀인데, 이는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하는 책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구별하는 이른 바 선민 사상은 사실 상 오늘날 신앙인들의 시그니쳐다. 그리고 받은 구원을 받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건 자신들이 행위로 드림이 있기 때문에 가지는 자긍심이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같은 일을 해도 더 나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편향적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한 자신을 다른 사람과 스스로 구별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는 같은 일을 행하고 더 나은 결과를 얻기는 커녕 창조주 하나님 말씀의 본체임에도, 그 말씀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하는 수고에도 십자가에 달리고 순교 당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과 사회의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구별하는 건 하나님 말씀 밖으로 완전히 나간 것이다.

 

또한 다들 말로는 은혜로 받은 구원이라고 말하나 실상은 의롭게 되려는 자기 행위를 생각한다. 본전심리 그 이상이 신앙을 지배하고 있다. 자기가 행위로 드린 바를 생각하는 만큼 자기 신앙은 받은 게 아니라 이룬 게 됨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는 이런 모습의 총화를 교회에서 본다. 바로 목사다. 신학에 대한 수고와 경쟁에서의 승리에 부여한 가치다. 가치를 한껏 부여한 목사라는 자리는 스스로 공부하고, 신학도 간 경쟁에서 이긴 결과를 얻는다. 정상적 상식만 있다면 그들의 모습은 받은 게 아니라 이룬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한 모습의 참 사례다.

 

오늘 우리 신앙 세계 안에 만연하다 못해 정설과 진정한 신앙으로 둔갑한 이런 모습들은 하나 같이 말씀 밖으로 나간 모습이다.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구별되지 못하고 오히려 천해졌고, 스스로 왕이 되기는 커녕 십자가에 달린 자신을 구하지도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이것을 알면 말씀 밖이 어딘지 알 수 있고, 어디로 가면 안 되는지 알 수 있다. 이게 올바른 말씀 묵상이고, 이게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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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부끄럽게 여기실 것이라 하셨다. 문제는 그 시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점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다. 사람은 대게 이때를 세상의 종말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인 시점에서 그 말을 듣고 있는 이들을 향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 일을 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는 지금도 재림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믿는다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당시 사람 중에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이란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천지창조가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일이듯, 예수님의 재림도 각 사람에게 예수님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본성으로 임하는 일이다. 그리고 종말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세계 이전에 각 사람이 가진 세계와 그 가치관의 종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많은 성경의 약속처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강림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다. 기회의 축복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육신이란 영원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게 다시 오시겠지만 본질은 각 사람이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재림의 본질은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각 사람에게 다시 오시는 것

 

오늘 우리는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구원을 얻을 수 있듯, 언제일지 모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볼 수 없어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림이 있어야 한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은 그 이전에 각 개인에게 임한 재림이 재림의 본질임을 확정하기 위함이다.

 

이 본질적 재림은 초림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듯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000년 전에 the Christ로 오셨고, 지금은 the Christ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각 사람에게 임한 재림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의 수가 이제 많으므로 구름 같다고 하신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많은 사람은 교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시점은 사람이 교회를 만날 때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교회다. 교회를 만나서 자신이 예수님 말씀과 달리 세상의 영광을 좇았다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순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때 함께한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교회를 만났고, 성령이 임하시니 회개했다. 회개한다는 건 이전의 자기 삶이 부끄러운 삶이었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와 신앙은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을 부르고, 실패한 사람이 온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기려고 하고, 이겼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 믿는다. 이런 교회를 만나 세상에서 이기려 한 사람이 자기 삶을 부끄럽게 여길 수는 없다. 그러니 재림도 기다린다. 아직 그들에겐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게 복음일 수 있다. 이건 자기 죄를 시인하는 일이다. 낮아짐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몸소 보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영광을 좇았던 자기 삶이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는 건 예수님이 자신에게 재림하는 일이자 진정한 교회를 만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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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시작부터 책망해 온 바울 사도는 이제 본격적인 교훈을 전한다. 지금부터 너희를 교훈할 것인데 이런 나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마땅히 여겨야 한다는 말로 시작하는 건 어쩌면 4장의 시작은 책망을 하는 본인의 자격을 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이라고 밝힌다. 이는 세상 지혜에 의지하여 신앙을 조명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와 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지혜로 신앙을 조명하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바울 사도의 말이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바울 사도의 자격만이 아니다. 바울 사도의 의도는 이 말씀을 듣고 보는 모든 사람 역시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따라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란 말씀은 바울 사도 자신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충성하고 있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비밀을 맡게 되는 누구라도 충성을 구하여야 한단 말씀이다. 그리고 비밀을 맡는다는 말 속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도 녹아 있다. 하나님의 비밀이 우리 안에 내재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헬라어에서 충성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믿음이라면 반대 방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순종을 인정하시는 게 바로 충성이다. 따라서 충성은 믿음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므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온전히 순종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기신다. 이게 바로 맡은 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바울 사도는 이런 자신은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게 그리 큰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비밀을 가졌기에 양심에 거리끼는 게 없으며 세상이 자신을 심판하는 건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단 것이다. 세상 사람 보기에 그럴 듯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오늘날 신앙인의 모습과 완전히 상반된 고백이다. 오늘의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걸 충성스런 일로 여기지만, 세상에서 바울 사도는 처형을 당한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앞에 영광스런 사람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울 사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한 것은 오늘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의도와 같이 과연 양심에 걸림 없는 사람, 세상의 판단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인가 비추어보면 좋을 것이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 곧 순종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받아 간직한 사람인지 깨닫게 한다. 이렇게 성경을 봐야 나의 말씀이 된다. 즉 성경의 약속이 나에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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