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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은 소경 바디매오와 함께 큰 감동을 준다. 의미를 두고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믿음이 크다고 예수님께서 칭찬한 두 명 중 한 명이다.(칭찬은 마태복음 15장) 또 한 사람은 병든 종을 고쳐 달라고 한 백부장이다.(마 8장, 눅 7장, 요 4장)

 

예수님께선 숨어 지내시려 했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았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중에 헬라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있었다.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거절하신다. 이유는 유대인을 구원하는 게 먼저라는 이유였다.

 

더욱이 거절하는 말씀이 매우 매몰차고 모욕적이다.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먼저 줄 수는 없다고 하신 것이다. 딸이 아프니 좀 고쳐 달라는 사람을 개에 비유했으니 요즘이라면 아마 SNS에서 난리가 났을 발언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이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모정의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핵심은 그보다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여인이 칭찬받은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와 그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바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나의 관계 설정은 구원의 열쇠다. 이 이방 여인은 우리에게 오늘 그걸 전하고 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는 게 큰 믿음

 

마태복음을 보면 이 여인은 병든 종의 치유를 예수님께 구한 백부장과 더불어 큰 믿음이라 칭찬받았다. 백부장 역시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전적으로 수동적이고 순종하는 것뿐이란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순종에는 ‘그래도 그렇지?’가 없다. ‘주님 앞에 나는 죽고’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다. 죽은 사람에게 자존심이나 ‘그래도 그렇지’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나는 죽고 주님은 산다면서, 또 하나님께 순종한다면서 그럴 수는 없다. 그런 조건이나 미련이 결합된 마음으로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산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100% 거짓말이다. 이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심이다.

 

예수님께선 이 여인을 집에 기르는 개에 비유했다. 이 정도 멸시면 웬만한 사람에게 딸이 아픈 건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느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게 핵심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는 자신이 순종하는 관계라는 걸 분명히 알고 고백했다. 그녀는 순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았고, 예수님은 이것이 큰 믿음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인들의 믿음과 순종이 이 여인 같지 않다. 이건 믿음의 크기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있느냐 업느냐의 문제다. 믿음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기 때문에 100% 이 여인과 같은 마음이어야 믿음이 있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는 것’ 같은 건 죽어 없는 믿음에 회칠한 것일 뿐이다. 땅이 하늘에 맞추어 변하는 거지 하늘이 땅에 맞추어 변하는 게 아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전적으로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존재다.

 

분명 오늘날 신앙인들의 믿음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 확연히 다르다. 자신들의 기도가 세상과 상황과 일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걸 믿음이라 생각한다. 주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방향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과 반대의 방향성을 믿음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건 신념이지 믿음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수동적이고 순종이지 능동적 신념이 아니다. 내용은 버리고 형식을 지키려는 신념이나 노력은 더더욱 아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예수님께선 기도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땅의 신념이나 상황이나 자존심 같은 건 사소한 고려 대상도 아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걸 알았고, 오늘날 신앙인들은 믿음을 그 반대로 알고 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고 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

 

이런 잘못된 믿음에 대한 생각을 가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도로 상황과 형편을 바꾸려 한다. 실수도 하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을 경영하신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꾸어 달라고 한다.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형편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한다. 이처럼 기독교인의 믿음은 모두 능동적이다. 큰 믿음이라 칭찬한 수로보니게 여인과 모든 게 반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도 움직이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관하시는 분이지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다. 정말로 나의 기도가 행사를 결정한다고 믿는다면 아들을 주신다고 믿었는데 딸을 얻었다면 그 아이가 남자아이가 된다고 믿어야 믿음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세상에 없다. 그건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삐딱한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한 말씀을 두고 ‘그래도 그렇지…’라고 말할 것이다. ‘왜 예수님께선 여인을 개에 빗대었을까?’라며 신학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 역시 같은 부류다. 사람들은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이토록 알지 못한다. 

 

이 어두움은 나면서부터 가진 것이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온전한 믿음을 담을 그릇 같은 존재로 창조된 사람에게 이 비밀이 열리기 전까진 어두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게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다. 그리고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 다음에 ‘에바다’ 곧 ‘열리다’라 말씀하시는 사건이 이어진다. 성경은 이래서 신비롭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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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에 순례의 길을 문이 아닌 담을 넘어 들어온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결국 그는 순례의 길을 완료하지 못한다. 올바르지 않은 출발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결과를 담보한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출발은 거듭남이다. 행동 아닌 생명이 바뀌는 것이 시작이다.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는 이유다.

 

예수님께선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규례를 주장하나 실제로는 악용하는 자들이라 책망하셨다. 모세는 부모를 공경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이라고 했지만, 예수님께 시비 거는 자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드릴 것도 하나님께 드린 것(고르반)이란 핑계로 자기가 취한다고 책망하셨다.

 

놀랍게도 이 시대 신앙인들도 너무나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 부모님의 보살핌으로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하며 결혼까지 도움을 받으면서 단지 교회에 다니는 걸 반대한다는 이유로 모질게 굴고 심지어 집을 나가기도 한다. 부모를 공경하고 가까운 데서 멀리(유대에서 땅끝까지)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멀리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부모와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혼도 하지 말라며 세상 사람을 멀리하려 한다. 이런 모든 게 그나마 스스로 만든 규례마저 악용하는 일반적 모습이다.

 

사람이 이렇듯 그릇되게 행하는 건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자신이 규례를 지켜야 할 존재로 거듭나지 않았는데 규례를 지키려 하니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르고 이에 타협을 통해 또 다른 규례를 만든다. 돼지고기나 주일 성수처럼. 규례는 신념이나 노력이나 하나님을 위한 마음으로 지키는 게 아니라 그 규례가 본성인 생명이 되는 게 먼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다. 장로의 유전이 자기 본성도 아닌데 행위로만 지키기 때문이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6-7)

 

그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자들이라고 책망하신다.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얻을 목적으로 사람이 정한 규례를 지키느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다는 말씀이다. 자기 육신의 복락을 위해 장로의 유전을 지키려고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생명이 되기를 바라시는 뜻은 버린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로 거듭나길 바라신다. 이것이 사람을 향한 유일한 뜻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건 모든 말씀, 모든 규례, 모든 절기를 지키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이게 그리스도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게 우리의 존재 목적이고, 우리 삶의 시작이다. 그리스도 났을 때부터 인생이고 의미 있는 존재다. 그 전은 우리가 알다시피 생명 없는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어두운 존재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그러므로 사람이 종교적 규례를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건 자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건 사실 말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설교를 듣고, 어느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게 불문율이 되었다. 그러나 노력은 이르지 못한 자의 필요다.

 

예수님께선 비단 이 사례뿐 아니라 끊임없이 외식을 책망하셨다. 내용 없는 모든 종교적 신념과 노력과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다. 머리카락 없는 사람에게 드라이기를 선물하는 것같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지탄받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존재가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데 성경을 지킨다고 하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받았다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자신들을 경건한 자로 스스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노력하는 건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주일 성수, 십일조, 착한 말, 밥 퍼주는 봉사, 성가대나 교사를 하는 게 먼저가 아니다. 주일날 돈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는 건 바보다.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자체로 이미 지출하고 있는 것인데 그걸로 성경을 지킬 순 없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숨만 쉬어도 성경을 모두 지키는 사람이란 의미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다. 성경이 자기 육신이 되고, 자기 본능이 되었으며, 자기 생명 정체성이 말씀의 주체인 그리스도인데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이유가 도무지 없다. 이게 거듭남이고 구원이고, 이것을 믿는 게 믿음이다. 그리스도로 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어떤 경건도 모두 외식이다. 예수님께서 책망하는 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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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과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서 배에 오르는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육지에 내리니 병자들이 몰려와 많이 고침을 받았다. (막 6:53-56) 

 

그 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님께 제자들을 성토하는 일이 발생했다.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었기 때문이다.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으면 안 된다는 장로의 유전, 곧 종교적 관습과 규례를 어겼다며 시비를 걸어 온 것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시비는 청결 논쟁은 아니다. 성결에 대한 논쟁이다. 행위와 육신이 깨끗해야 성결할 수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은 제자들은 성결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런 제자를 둔 예수님이 성결한 존재가 아니라는 시비다.

 

사람은 보이는 육신의 삶을 인생의 본질로 여긴다. 그리고 인생의 성패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평안과 풍요다. 따라서 육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인생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을 위한 행동 규례(칙)를 정한다. 결국 육신으로 사는 삶이 사람의 기준대로 성공하기 위해 정한 사람의 법이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각종 종교적 규례와 징크스, 미신의 실체고 본질이다. 결국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추구하고 지키려고 스스로 규례를 정하고, 스스로 구속된다. 손을 씻고 떡을 먹어야 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이렇듯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으라는 규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육신의 복락이다. 손을 씻듯 하나님 앞에 깨끗해야 행동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 생각에 대해 예수님께선 손을 씻지 않고 먹어서 사람이 더럽히는 게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무엇이든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막 7:15)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

 

먹은 게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건 사람 속이 이미 더럽다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형식인 음식이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말과 마음과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다. 

 

말과 마음과 생각은 사람의 의와 가치관, 즉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홀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는 독립된 더러운 행동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체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삶에서 표현되고 비롯되는 모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전하시고 이어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다. 항상 ‘네가 누구냐?’와 ‘너에게 나(하나님)는 누구냐?’다. 어떤 존재로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냐 뿐이다. 손을 씻고 떡을 먹어야 성결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 누가 빵을 먹느냐가 성결의 기준이다.

 

손을 씻고 떡을 먹어야 성결이 아니라 하나님 성전의 떡은 성결한 사람이 먹는 것

 

이 말씀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모양을 심히 강조하고 있다. 주일날 돈을 내고 짜장면 먹지 말라는 것이나, 노래방 가지 말라, 교회 안 다니는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 주일날 쉬지 않는 직장에 가지 말라 등등 이미 불문율 진리가 된 관습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그 많은 종교적 규례를 왜 지키는지 생각해보자. 내가 그런 존재여서 하지 않으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지키는 존재인지 아니면 그렇게 해야 벌 아닌 복을 받기 때문에 신념을 가지고, 의무감 혹은 두려움으로 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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