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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2:1-7) 룻과 보아스의 만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13. 10:28 Writer : 김홍덕

이제 주인공은 룻으로 전환된다. 나오미라는 시어머니, 자기와 종족도 다른 시어머니가 자신의 신이 은혜를 베푼다는 소문에 의지하여 자기 땅으로 가는 것에 의지해 자기 고향을 떠난 룻의 그 결단이 어떻게 보면 이 룻기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에 이 룻기를 대하더라도 자신에게 온전한 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그 하나에 의지하여 자기 인생을 건 결단을 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고 어떤 면에서 전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룻기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모두 과부 룻과 같은 존재이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에 다닌다고 남편 있는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룻은 모압 여자라는 것이 그것을 설명한다. 모압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종족이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진 신앙의 표본이다.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나님께서 뭔가 은혜를 베푸시지 않아서 그렇다는 하나님 탓을 하면서, 그 하나님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기도하는 모양인데 그것이 모압과 같은 모습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룻과 같은 결단과 신앙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룻기는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1장의 내용이라면 이제 2장부터는 그런 결단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은혜를 입는지를 설명하시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룻기는 1장의 배경만 다 이해한다면 사실 거의 다 이해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장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형식만 남은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어떤 은혜가 어떻게 임하는지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다.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그가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보면 오늘날 서구화된 사회에서는 좀 문제가 있지만 당시 계대결혼(후사를 이을 남자가 아들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나 친족이 그 후사를 이어주는 결혼)이 정통적인 문화였다. 이 계대결혼은 대표적으로 예수님께 부활 논쟁을 벌인 사두개인들의 질문 속에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풍습은 그 자체가 논점이 되기를 바람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나 연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외식하는 신앙의 전형이다. 이 룻기의 결말은 이방 여인인 룻이 예수님의 계보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되고, 또 그리스도를 낳는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즉 형식적인 신앙,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신앙을 가진 한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의 결단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생전 처음 베들레헴에 거주하게 된 룻, 이 두 과부는 스스로 생계를 이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법에는 추수할 때에 곡식을 거두는 과정에서 남은 이삭을 거두지 말고 과부와 고아를 위하여 두라고 한 율법이 있었다. 이에 의지하여 룻은 이삭줍기하기를 나오미에게 고하고 갔는데 마침 그곳이 보아스의 밭이었다. 이것은 우연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행운과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각 사안별로 특혜로서 베푸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새벽기도회 다니면서 공부한 사람이 좋은 대학이나 직장을 가면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다닌 정성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새벽기도회에 가는 행동, 즉 행위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 율법적인 신앙이 그 배경에 있다. 새벽기도회를 가는 행동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새벽에도 기도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율법적인 신앙,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룻기도 같은 맥락에서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나선 룻의 행위가 우연을 가장하여 마음씨 좋고 결국 자신의 남편이 되어 줄 보아스를 만나도록 하나님께서 구성하셨다고 믿는 것이다. 룻도 사람인데 자기 마음에 동하는 것 없이 행동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룻에게 남편이 간절했듯,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의를 찾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길을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길을 나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신 계획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경영하심,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그 약속대로 삶이 전개되는 것이다. 자신이 삶을 그렇게 전개해가니 하나님께서 복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인생의 행동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 곧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기본도 모르는 신앙이다.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구원도 거듭남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신앙이라는 의미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고 또 아들을 낳기까지의 과정은 잘 각색된 드라마와 같이 우연과 행운이 연속적으로 겹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룻과 관련된 일을 사사건건 룻에게 유리하게 간섭하시듯 전개한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 하나님을 찾겠다는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전개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부선에 올려 진 기차가 앞으로 가면서 우연히 대구와 대전을 지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경부선이라는 철로가 대구와 대전을 지나 서울로 이어진 것이듯, 룻에게 일어난 일은 룻이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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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15-22)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12. 10:12 Writer : 김홍덕

나오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룻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된다. 죽는 것 이외의 일로는 나오미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와 함께. 이런 룻의 모습을 합리적 사고로 접근하면 분명, 과부 혼자서 살기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룻기는 성경이다. 육신의 문제를 논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룻의 모습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연결된 사람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룻의 모습이 더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방인 과부로 사는 것보다는 고향이 그나마 더 편했을 것이기도 하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에 대하여 베들레헴의 사람들은 환대를 한다. 생각해보면 이방인에게 아주 냉소적인 유대인들이 자기 살자고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가서 거기서 며느리들도 다 이방 여인으로 얻은 나오미를 멸시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요즘 신앙인들의 관점에서 이런 일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을 떠나서 살더니 쫄딱 망해서 왔구만!”이라고 타산지석을 삼으려 할 것이다. 사람들은 육신에게 일어난 표면적인 일을 하나님의 은혜나 심판으로 보기 때문이다. 욥을 보듯. 그것이 외모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는 것과 자기 신앙이 외식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도 모른 체.


밥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으로 두 과부가 돌아왔다. 이는 밥이라는 것과 과부라는 신분이 연결된다. 남편이 없어서 온 곳이 밥집이라는 것은 그 남편이 곧 밥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밥은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밥집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오신 곳이다. 그리고 나오미가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었음을 듣고 돌아온 곳이다. 


즉 여기 베들레헴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생의 남편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원하신 사람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인생은 과부와 같고, 먹을 것이 없는 인생인데, 그 인생이 돌아가야 하는 곳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 하나님의 의를 먹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나오미는 말한다. 자기가 풍족할 때 떠났었다고. 그러나 그가 떠난 것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결하겠다는 땅으로, 그 자리로, 그 의의 세계로 떠난 남편, 곧 그것을 의로 여기는 세계를 좇아 떠났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는 죽고, 그 의를 이을 아들도 죽고, 더 이상 그 의가 육신이 될 수 없는 상태에서 의는 없이 신앙의 형식만 남았음을 상징하는 과부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방인인 며느리 룻이 동행을 했다는 것이다. 롯은 이방여인, 그것도 과부다. 이는 남편 곧 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의가 없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의도 없다. 그것에 더하여 신앙의 형식마저도 이방 곧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가 없을 때도 제사나 절기나 규례는 모세가 전한 것을 준수했다. 의가 없지만 형식은 그나마 하나님의 법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오미다. 그러나 룻은 그마저도 아니다. 그 삶의 형식까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룻이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에 왔다는 것이다. 즉 남편이자 의를 찾아 왔다는 것이다. 자기 조상인 모압이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걱정한 결과로 태어난 모압이었기에 하나님의 일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이방인으로 살았는데 그 집을 떠나서 이제 베들레헴으로 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남편으로 삼는 것에 있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모압족속의 법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룻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이야기다. 신상명세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기입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모압 이상의 이방적인 신앙이다. 완전히 세상과 간음하여 위대해진 네피림을 신봉하고 있다. 세상의 가치에 만족하는 방식으로 신앙이 진화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크고 화려한 것을 이긴 것으로, 또 의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니 교회를 크게 건축하고, 세상이 판검사, 의사, 교수를 찬양하니 교회의 교인이 그 자리에 오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하고 있고 그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모압 땅이나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이 가진 신앙이고, 하나님 앞에서 세상과 간음한 신앙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떠나야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룻기를 성경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룻과 같이 이방인의 형식만 남은 신앙에서 진정한 남편이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인생을 얻기 위하여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 세대에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룻기가 아직 성경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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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7(15:16-20) 조롱당하시는 예수님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1. 11. 10:19 Writer : 김홍덕

조롱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혹하기까지 하지만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그런 감정이 말씀의 본질이 아니라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이유로 조롱을 당하는 사람인지가 본질이다.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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