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15-22)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12. 10:12 Writer : 김홍덕

나오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룻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된다. 죽는 것 이외의 일로는 나오미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와 함께. 이런 룻의 모습을 합리적 사고로 접근하면 분명, 과부 혼자서 살기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룻기는 성경이다. 육신의 문제를 논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룻의 모습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연결된 사람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룻의 모습이 더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방인 과부로 사는 것보다는 고향이 그나마 더 편했을 것이기도 하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에 대하여 베들레헴의 사람들은 환대를 한다. 생각해보면 이방인에게 아주 냉소적인 유대인들이 자기 살자고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가서 거기서 며느리들도 다 이방 여인으로 얻은 나오미를 멸시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요즘 신앙인들의 관점에서 이런 일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을 떠나서 살더니 쫄딱 망해서 왔구만!”이라고 타산지석을 삼으려 할 것이다. 사람들은 육신에게 일어난 표면적인 일을 하나님의 은혜나 심판으로 보기 때문이다. 욥을 보듯. 그것이 외모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는 것과 자기 신앙이 외식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도 모른 체.


밥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베들레헴으로 두 과부가 돌아왔다. 이는 밥이라는 것과 과부라는 신분이 연결된다. 남편이 없어서 온 곳이 밥집이라는 것은 그 남편이 곧 밥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밥은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밥집 베들레헴은 예수님이 오신 곳이다. 그리고 나오미가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었음을 듣고 돌아온 곳이다. 


즉 여기 베들레헴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생의 남편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아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원하신 사람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인생은 과부와 같고, 먹을 것이 없는 인생인데, 그 인생이 돌아가야 하는 곳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 하나님의 의를 먹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나오미는 말한다. 자기가 풍족할 때 떠났었다고. 그러나 그가 떠난 것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결하겠다는 땅으로, 그 자리로, 그 의의 세계로 떠난 남편, 곧 그것을 의로 여기는 세계를 좇아 떠났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는 죽고, 그 의를 이을 아들도 죽고, 더 이상 그 의가 육신이 될 수 없는 상태에서 의는 없이 신앙의 형식만 남았음을 상징하는 과부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방인인 며느리 룻이 동행을 했다는 것이다. 롯은 이방여인, 그것도 과부다. 이는 남편 곧 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의가 없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의도 없다. 그것에 더하여 신앙의 형식마저도 이방 곧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가 없을 때도 제사나 절기나 규례는 모세가 전한 것을 준수했다. 의가 없지만 형식은 그나마 하나님의 법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오미다. 그러나 룻은 그마저도 아니다. 그 삶의 형식까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룻이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에 왔다는 것이다. 즉 남편이자 의를 찾아 왔다는 것이다. 자기 조상인 모압이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걱정한 결과로 태어난 모압이었기에 하나님의 일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이방인으로 살았는데 그 집을 떠나서 이제 베들레헴으로 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남편으로 삼는 것에 있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모압족속의 법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룻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이야기다. 신상명세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기입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모압 이상의 이방적인 신앙이다. 완전히 세상과 간음하여 위대해진 네피림을 신봉하고 있다. 세상의 가치에 만족하는 방식으로 신앙이 진화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크고 화려한 것을 이긴 것으로, 또 의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니 교회를 크게 건축하고, 세상이 판검사, 의사, 교수를 찬양하니 교회의 교인이 그 자리에 오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하고 있고 그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모압 땅이나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이 가진 신앙이고, 하나님 앞에서 세상과 간음한 신앙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떠나야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룻기를 성경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룻과 같이 이방인의 형식만 남은 신앙에서 진정한 남편이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인생을 얻기 위하여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 세대에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룻기가 아직 성경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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