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의 두 자부 오르바와 룻은 모압 여인이다. 하나님의 일을 스스로 해결해보겠다는 신앙의 형식(여자)이라는 의미이다.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는 신앙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나오미는 자기 안에 형식뿐인 신앙의 내용을 채울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찾으려는 자부들에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남편과 같은 의를 보일 수 없다고 말하고 그러니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만류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미는 솔직했다. 그리고 첫 번째 며느리 오르바는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룻은 그렇지 않았다. 룻은 그 시어머니인 나오미 안에 자신의 남편과 같은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한 가지 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계기, 곧 이유였다. 이것은 룻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후일 보아스와의 관계에 대하여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권유에 순종하고 보아스와의 관계에 순종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룻은 지금 나오미에게 남편과 같은 의가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나오미가 고향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나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에 의지하여 돌아가려는 것에 의지했다.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았다. 지금 나오미는 비는 아니지만 구름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룻이 은혜를 입은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생각했고, 불확실했지만 자기의 안목 안에서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길로 무작정 떠난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이 없는 신앙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른 여인이 되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자기 신앙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머무른다. 사람은 온전해질 수 없고, 그러니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에 매몰되어 있다. 문제는 언제까지, 또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데도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길을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룻은 달랐다. 자신은 이방인 그것도 이방여인에 과부로 어디 비빌 곳도 없을 텐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소식만 듣고 나서는 시어머니와 함께 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신앙인들은 자기 신앙에 대하여 스스로 양심적으로 생각하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겁쟁이들이다. 자기가 있는 자리가 온전한 신앙이 아니라면 어차피 그곳에 있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님은 너무 자명한 것이다. 스스로가 생각할 때 자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이렇게 있으면 될 거야?’라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그 자체로 위안을 삼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자기 확신이 없는 상황이니 사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는 것이다.


룻은 형식만 남은 신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적어도 나오미를 따라 나서고 보아스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그런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신앙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곳으로 간다는 여인인 나오미를 따라서 나섰다. 나오미도 남편 없는 과부이니 의는 없고 형식뿐인 것은 자신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곳으로 간다는 그 하나의 차이에 룻은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일면 비참할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룻이 모압 땅에 남아서 또 더 나아질 것도 없지 않는가? 자기 신앙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 머무른다고 달라질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이 룻기는 이 배경이 그 내용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신앙, 그나마도 의는 없고 형식만 남은 신앙에서 남편 곧 의를 찾아서 그 의가 육신의 삶이 되는 아들과 같은 신앙으로 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효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룻이 보여준 그 모습을 보고 오늘 자신의 신앙을 반추해 보는 것이 룻기를 온전히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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