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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3:6-18) 정숙한 여인 룻의 기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19. 07:00 Writer : 김홍덕

룻은 시모가 시키는 대로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가서 보아스가 잠잘 자리를 알아 두었다가 그곳에 먼저 누워 있었다. 한편 보아스는 먹고 마시고 즐거운 중에 잠자리에 들었고, 이불 속에 누워있는 룻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보아스는 자신이 룻에게 룻의 남편인 말론의 집안을 책임지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자기 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룻에게 그 사람이 책임지지 않으면 자신이 룻의 기업을 책임질 것이라고 약속하고 돌려보낸다.


이 이야기 안에는 주목할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은 룻의 기업에 관한 것이다. 보아스는 자기 이불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룻을 정숙한 여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는 일이 룻에게는 기업이고, 자신은 그 기업에 책임이 있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특히 과부긴 하지만 허락도 없이 남자의 잠자리에 들어가 있는 여자를 정숙한 여인이라고 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룻의 기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는 기업을 무를 사람이라고 하였다. 즉 룻의 기업을 책임질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룻의 기업이란 남편을 만나 아이, 그것도 아들을 낳는 것이 룻의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보면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는 것이 여자의 일, 기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그것은 형식이고 본질은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의 기업이 무엇이고, 그 기업의 책임자는 누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오미가 모압땅을 떠난 것은 룻에게 혹은 자신이 새로운 남편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베들레헴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간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었다. 그리고 이 룻기가 성경이라는 점도 맥락이 같다. 지금 이 룻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뜻을 말씀하시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 뜻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사람의 일로 그것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룻의 기업인 아들을 낳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 사람의 기업이요 사람의 본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룻이 남자의 허락도 없이 그의 잠자리에 들어가 있는 것이 정숙하다고 하는 것은 육신의 일로 보면 음탕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유대인들의 문화로 표현된 것인데 그 의도하심과 룻의 행위는 일치하기 때문에 그것은 목적 안에서 보면 정숙한 여인, 곧 하나님의 목적을 순종하고자 하는 선한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원래 하나님께서 그 형상대로 지은 존재다. 이는 외형이 하나님과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의와 성품을 사람이 그 육신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뜻대로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그 의미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의 가장 첫머리에 나오는 것인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것부터도 알지 못하고 ‘형상=외모’로 보니 그 신앙이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매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받은 기업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것, 즉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의무이고 부여받은 존재 목적이기에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 빚(debt)이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죄가 debt(채무)로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전부터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면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존재의 목적, 룻의 기업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한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런 존재를 죄인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룻은 아직 죄인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니 아직 안식하지 못한 것이다. 아직 채무를 다 갚지 못했으니 안식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경제적인 채무를 경험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의 먹고 사는 일의 일부인 경제적 채무가 그러한데, 존재의 목적 자체의 채무를 갚지 못하였다면 당연히 안식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언제까지, 어디까지 해야 온전하고 의로워지는지 알 수 없는데 끊임없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직 채무를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안식 없이 늘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할까 노심초사하면서 노력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구원받지 못하고, 거듭나지 못한 삶이라는 것조차 모른 체.


룻이 아들을 얻기 위하여 음란해보이기까지 한 행동을 하는 것은 이것은 육신의 남녀의 문제나, 가문의 혈통에 관한 문제나, 결혼이나 가문의 재산이라는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이 룻기를 대하는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남편 없는 여자와 같기에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과 수치는 성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어리석은 일과 같다하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고 기업이라는 것을 알고 그 책임을 가지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위로 가고, 이긴 자가 의로운 자가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에 반하면 부끄럽고 수치를 얻게 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 되는 것을 향해서 어떤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룻을 정숙한 여인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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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3:1-5) 룻의 안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18. 00:30 Writer : 김홍덕

룻의 시모인 나오미는 룻이 안식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보아스와 동침할 것을 권한다. 서구화된 오늘날 문화로 보면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을 내용이지만 다시 한 번 성경은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책이지 세상의 풍습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가이드가 아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이러한 권면은 모압에선 어떨지 몰라도 추후에 이스라엘 장로들이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는 것에 있어 다말의 일을 인용하는 것에서 보듯 유대 땅에서는 평번하고 보편적인 문화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와 동침하게 되는 것이 룻의 평안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나오미의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을 보고 자신도 하나님의 의를 좇아온 룻에게 있어 안식이란 아들을 낳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인생에게 안식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 아니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 안식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뜻대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 정체성이 가진 본성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에 대하여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서 맘 편히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자기 인생을 조성했을 때 이야기다. 자기가 조성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은 인생의 평안과 안식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지으신 자신의 소유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삶을 도적질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도적질이기도 하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안식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후에 안식하셨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표현할 형식 곧 육신을 가진 사람을 지으시겠다는 뜻인 내용이 창조된 사람으로 나타나므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이다. 창조주이시자 사람의 내용이자 존재 목적인 그 하나님의 이미지가 육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 곧 아들이다. 의가 육신이 된 존재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의 삶이 되는,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안식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룻에게 아들, 하나님 백성의 아들을 낳는 그것이 룻의 안식이 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생들은 육신의 평안에서 안식을 찾을 것이 아니다. 죽도록 고생했다고 여기는 인생을 뒤로하고 죽음을 맞이하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고 하는 그런 개념의 안식을 하나님 앞에서의 안식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안식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안식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육신의 평안을 안식으로 믿는 이들에게 사는 동안 안식은 없다. 자고 일어나며 일하는 모든 것이 다 고생이고 오히려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나님을 믿고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 육신의 평안이 어디 있겠는가? 평안을 얻으면 하나님의 도움도 필요 없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으로 믿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안식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안식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없는 것이다.


나오미가 룻에게 말한 그 안식,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룻이 하나님의 은혜를 좇는 나오미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나라로 와서 내용 없이 과부로 사는 것에서 의요 내용인 남편과 그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아들을 얻는 것이 안식이듯, 이 룻기를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리스도로 거듭난 아들로서의 삶이 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안식이고 룻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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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2:17-23) 은혜를 알아 본 나오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17. 13:22 Writer : 김홍덕

보아스의 배려로 밭에서 이삭을 주운 룻은 그것을 가지고 나오미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함께 한다. 그러자 시모 나오미는 이 곡식이 어디에서 났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룻이 답하기도 전에 “너를 돌 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며 축복한다. 즉 룻이 가져온 곡식이 돌보심 없이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나오미는 룻이 가져온 곡식을 볼 때 그것의 양이나 맛이나 룻이 먹고 남은 것을 가져왔는지와 같은 문제를 본 것이 아니다. 나오미는 이스라엘 여인이기 때문에 이삭줍기를 해서 한 에바(약 22리터)를 가져 온다는 것은 어떤 이가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가져 올 수 없는 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누가 룻을 돌보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즉 룻이 가져온 것은 룻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푼 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룻을 돌 본 사람을 바로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오미와 룻과의 대화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신다. 성경은 육신의 먹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나오미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나오미를 따라온 이방인 며느리 룻이 자신에게 가져온 곡식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말씀고 궤를 같이 한다. 룻이 가져온 것은 보아스가 베푼 은혜, 곧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형식적인 신앙만 가진 사람이 자기 신앙이 흉년이 들고, 또 자기 신앙이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주시는, 또 들리는 말씀의 온전함을 축복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배의 형식,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에 대한 행위 규범과 외식하는 신앙 안에서 영적이 흉년이 들고, 그 안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다 사라졌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밥집(베들레헴)으로 돌아가서 그 말씀을 듣고자하면 그 간절한 마음이 룻과 같은 하나님 앞에서의 성시리로 나타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 베푸시는 곡식 곧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이 사람의 힘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나오미는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의를 이루려 모압 땅으로 갔던 사람의 아내, 곧 모압으로 가는 신앙의 형식이었고, 심지어 룻은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스스로 걱정하는 신앙 안에 있는 형식 곧 세상의 방법과 가치를 의미하는 이방여인이고, 아들을 낳을 남편 곧 의가 없는 과부였는데 그들에게 베풀어진 곡식 곧 말씀은 나오미가 인생 여정을 통해서 그렇게 얻기 원했던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은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인 것이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스스로 솔직하고 양심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신앙이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 언제까지인지도 모르고 마냥 노력만 하고, 말조심, 착한 행실, 기도와 성경 보는 것과 같은 것은 분명한 행위인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것을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과부와 같은 형식적인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먼저 나오미와 같이 그 신앙에서 떠나야 하고, 그 신앙에서 떠나서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형식적인 신앙에서 떠나서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면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며 당연히 은혜를 베푼 사람을 축복하게 된다는 것을 지금 나오미와 룻의 대화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은혜는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바로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한다. 바로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형식으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 의로워지는 신앙이 남편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고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찾아 떠났다면 룻의 곡식이 은혜라는 것을 나오미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말씀하시는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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