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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스는 친족이 룻에 대한 책임을 양도함에 따라 룻의 기업을 무를 사람이 되었고 유대인들의 풍습에 따라 이를 장로들 앞에서 확증한 후 룻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이어 룻은 하나님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아들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일을 찬양한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이르기를 그 아들은 시모인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오벳이 누구의 아들인지를 논한다. 또 재정적인 후원자인지 무슨 관계인지를 연구한다.(인터넷에서 오벳을 검색하면 이런 의견들이 많다.) 성경을 정말로 모르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다.


룻기의 시작은 모압으로 떠난 나오미의 남편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모압이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결하겠다는 족속이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니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겠다고 떠난 사람이 나오미의 남편과 아들이었다. 주일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 엉망임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바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고 모압 사람들이다.


엘리멜렉의 아들들이 모압 땅의 여인들로 아내를 맞았다는 것은 세상의 형식과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겠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가치관과 방법과 도구를 가져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십억 파이프 오르간과 엄청난 돈으로 지은 교회 건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잇고자 한 아들들은 물론 그것을 주도한 아비 엘리멜렉은 다 죽었다. 오늘날 교회의 시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나오미는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것을 좇아 과부의 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돌아온 것이다. 회개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이방 여인인 며느리 룻이 그 시모의 마음을 끝까지 좇아서 함께 온 것이다. 마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 믿고 자기 창으로 그들 오나 살피고 왔을 때 정탐꾼을 숨긴 것도 같은 이유다.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나오미와 룻에게 라합의 일로 축복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타락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모하는 시모를 보고 좇아온 이방 여인 룻의 마음까지 그 모든 과정을 기뻐하시고 의롭게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이 오벳이라는 남자 아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마음이 육신이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오벳의 시작은 나오미가 자기 남편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보겠다고 하나님 백성의 땅에서 떠난 것을 돌이키면서 시작되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은 룻의 마음이 형식이 된 존재이니 나오미에게 낳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룻의 아들을 두고 왜 남편 보아스에게 낳은 것이 아니라 시모인 나오미에게 낳았다고 했는지를 궁굼해 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신학인양 부산을 떠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이 형식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지 성경이 어렵게 쓰였거나 하나님께서 고약하게 꼬아 놓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형식이라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고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가치관 안에 있으니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간 것에서부터 그 의미를 단지 육신의 흉년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룻기를 착한 며느리의 효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것이라는 초등학문적인 사고에 빠져있기 때문일 뿐이다.


이 룻기는 하나님의 의는 없고 삶의 형식만 남은 과부와 같은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가는지를 말씀하시는 책이다. 나오미는 오늘날로 보면 하나님의 믿는 형식은 있으나 하나님의 의는 없는 사람들이다. 쉽게 말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룻은 처음에는 그마저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방 여인이라는 것이 그것을 설명한다.


룻이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으로 함께 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형식만 가진 사람이 자신에게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형식만 있고 하나님의 의가 없음을 회복하고자 할 때 그것을 보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하나님을 믿는 형식마저 없는 사람, 흔히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세상 사람이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삶으로 거듭나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아주 쉽게 룻이 나오미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형식은 있지만 자기 삶에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없음을 알고 그것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자 하면 그것을 보고 이방 여인과 같은 세상 사람이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전도에 비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렇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은 나오미와 같이 하나님 의가 없음을 돌이켜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도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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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4:1-6) 보아스와 그보다 우선하는 친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23. 08:34 Writer : 김홍덕

보아스는 자신이 룻의 기업을 무를(책임질) 사람이기는 하지만 자신보다 책임의 순위가 먼저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룻에게 설명하고 그 사람을 만나서 그의 의견을 들어야 하며, 그가 룻의 기업을 무른다고 하면 룻은 그와 결혼하여야 한다는 것도 설명하고 그 사람을 만나서 그의 의견을 듣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오미와 룻 소유의 땅에 대하여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지만 룻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그 후사를 잇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끼칠 수 있으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보아스나 그 친족이나 입장은 비슷한데 왜 다른 결정을 했을까? 친족은 땅은 모르겠지만 룻을 아내로 삼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물론 성경에는 어떤 이유로, 어떤 손해가 날 것이라 예상했는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보아스와 친족의 또 다른 차이는 룻을 아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보아스는 룻이 자기 밭에서 성실하게 이삭을 줍는 것을 본 것은 물론이고, 룻에게 직접 룻이 시모에게 한 일과 그의 여정에 대하여 들었고, 그것을 선하게 여긴다고 말하기도 했다. 즉 보아스는 룻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이야기의 주제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두 사람, 보아스와 기업을 책임질 우선된 권리를 가진 이 친족은 두 아담을 연상케 한다. 친족은 첫 번째 아담을, 보아스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에 비할 수 있다. 첫 번째 아담은 땅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그 땅의 내용을 취하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흙으로 지어졌는데, 흙으로 지음 받은 상태 보다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 사는 것은 손해와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오미와 룻의 땅은 형식이다. 그 내용은 주인인 룻이다. 그 땅은 룻의 아들을 위한 땅이기 때문이다. 이는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후사 곧 아들을 낳을 책임은 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드릴 의사가 없다는 것이고, 또 자신에게는 그런 생명이 없다는 의미이다.


첫 아담이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다. 그래서 보아스의 친족이 룻의 기업을 무르지 못하게 된 것과 같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만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에덴은 만족의 동산이기 때문이다. 즉 땅과 같이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만족스러워지지 않는 순간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후사를 잇는다는 것이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나 육신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둘 다 흙으로 지음 받은 육신의 삶에 만족이 없고 그대로 사는 것은 손해요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모습 그 자체이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삶은 만족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주신 그대로 사는 것은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만족이 없는 것이다. 만족하는 자는 더 노력할 것이 없다. 자기가 만족하는 것을 누리고, 그것이 더 왕성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으로 살 뿐이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없다는 자백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먼저 접하는 것은 대부분 성경을 행위로 지키는 것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땅을 주신 목적이 아니라 땅은 경작하고 소유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육신을 주신 목적을 생각지 않고, 그 육신을 어떻게 단련하고 노력하며 그것을 평안하게 소유할 것인지를 사고한다. 그런 신앙이 바로 첫 번째 아담이다. 첫 번째 아담이 육신으로는 만족되지 않고, 육신으로 사는 것을 손해로 여겨 하나님이 되려 했던 것처럼 육신을 어떻게든 성경대로 금욕적으로 훈련하고 연단하여야 한다고 외치는 오늘날의 신앙은 모두 첫 번째 아담과 같은 모습이다. 그것을 율법적인 신앙이라고 일갈할 수도 있다.


그런 신앙은 아들을 낳는 것에 관심이 없다. 땅에만 관심이 있다. 아니 그런 신앙은 우리에게 아들을 선사할 수 없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남편은 하나님의 의를 좇는 룻의 남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자기 존재의 목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이, 첫 번째 아담이 남편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육신의 어떠함(땅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두 번째 아담이 남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가 진정한 남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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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3:6-18) 타작마당의 보아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20. 08:40 Writer : 김홍덕

나오미가 찾아온 하나님의 은혜, 룻의 안식은 보아스가 모두 가지고 있었다.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삭줍기를 허락할 땅과 곡식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후사를 이어줄 책임을 가진 친족이었다. 따라서 룻에서 보아스는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사람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 모든 인생은 남편 없는 여자와 같은데 그런 인생에게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해주시고, 그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의를 알고 그것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존재, 곧 아들로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로 산다는 것은 아들을 낳은 것,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산다는 의미이다.


그런 보아스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잠을 청하며, 곡식이 많으므로 기뻐서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의도하신 대로 열매가 많이 맺혔음을 즐거워하고, 그 자리에서 쉬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작마당은 곡식을 최종적으로 얻는 자리이니 그 자리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의도대로 열매를 얻었음에 즐거워하고, 그곳에서 잔다는 것은 열매가 얻어질 때 안식하신다는 말씀이다.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가 어디에서 잘 것인지를 알아보고 그곳에 먼저 가서 있으라고 했을 때 룻이 타작마당 노적가리(곡식 쌓아 두는 곳)에 갔다는 것은 룻이 보니 보아스가 열매를 얻은 자리에서 안식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어디서 하나님과 안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신 것도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도하신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나, 하나님의 뜻하신 열매가 나왔다는 것은 둘 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즐거워하시고, 그것에 취하시며, 그것을 인하여 안식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곡식과 열매가 되었을 때 즐거워하시고 안식하신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가 뜻(이것을 로고스라고 한다.)대로 되었다는 의미다. 사람이 세상에서 취한 기준으로 평안하고 세상에서 잘 되어서 교회에 헌금 많이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을 인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되니 하나님께서도 만족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기쁘니 하나님도 기뻐하시라는 압박이나 착각이지 하나님께서 그것에 안식하실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가지셨다면 세상 최고의 멸망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작마당이라는 것을 곡식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의 자리일 수 있다. 엄청난 충격을 가해서 그 껍질을 까부는 곳이 타작마당이다. 이는 곡식의 껍질을 벗기는 자리이다. 이것은 할례를 받는 것과 같고, 십자가에서 육신이 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껍질 있는 곡식은 최종적인 열매가 아니듯, 하나님 앞에 사람도 그 육신이 깨어져서 물과 피가 나올 때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깨어지듯 소비되는 도구요 벗어야 할 껍질이라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그 껍질, 곧 육신이 평안하고 보존되고 적게 사용하면서 교회가 바라는 것을 많이 할 수 있는 세상적인 능력을 가지는 것을 복이라 여긴다.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로 껍질이 덜 깨어지고 보존될수록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넓은 길을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반대된 생각이다. 진정한 곡식은 껍질이 타작마당에서 벗겨지듯 인생에게 주신 껍질인 육신은 하나님의 의와 같은 알곡 같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깨어지고 소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런데 룻은 모든 사람들이 육신이 평안한 자리에 하나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보아스는 타작마당에 거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화려한 곳에서 거룩하다 자칭하는 좋은 예복을 입고 평안한 모습을 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한 유대인들과 반대로 곡식의 껍질과 같은 육신이 깨어지는 그 자리에 물과 피, 곧 말씀과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보아스는 그 룻을 진정 정숙한 여인으로 여겼다. 남자의 허락도 없이 이불 속에 들어온 여자인데도 정숙하다고 한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와 같이 불의한 듯 하나 칭찬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선한 것으로 보시고 은혜를 주시는지를 보아스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이다. 육신 가진 삶을 소비하므로 육신의 쇠약해지는 세월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곡식이 껍질을 벗기 위하여 타작마당에서 내려 쳐지듯,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물과 피)을 십자가에서 쏟으심과 같이 살아야 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자리에 거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시며, 그것에 취하시고, 그 자리에서 안식하심을 보아스가 보여주고, 룻은 그것을 알았기에 정숙하다는 칭찬을 듣고 결국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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