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제 10계명)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십계명 Date : 2019. 11. 30. 07:53 Writer : 김홍덕

열 번째 마지막 계명은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은 물론 소나 나귀와 같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마지막 계명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이웃의 소유라고 명시한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종과 가축은 그렇다고 쳐도 아내가 이웃의 소유라는 것이 눈에 띕니다. 아내는 이웃이 아니라 이웃의 소유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웃의 것을 탐내는 이유입니다.


시대적 문화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아내는 소유라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성경에서 아내, 더 본질적으로 여자라는 존재로서 설명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여자와 같고,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심이 여자에 대한 하나님 생각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자는 의의 형식입니다. 아이를 여자가 낳음에도 성경은 늘 아비 즉 남편이 낳았다고 하는 것은 남편은 의와 내용을 의미하고 여자는 내용이 표현된 형식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 이웃의 아내라고 하는 것은 육신으로서의 아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형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형식은 육신의 아내라기보다 그 사람이 가진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형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가진 육신 또한 그 사람의 아내입니다. 이웃의 아내는 이웃의 성씨 곧 의를 가진 아들을 낳는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이 바로 이웃의 아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 말씀의 아내이자 표현하는 형식이고 도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육신인 항아리가 깨어지니 물과 피가 향유와 같이 쏟아져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 세계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내 외에 언급한 모든 것도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는 모두 이웃의 뜻과 생각을 행하는 존재들입니다. 의와 생각이 종의 행동으로 가축의 힘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각과 말씀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명으로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육신의 어떠함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달란트라고 말하기도 하는 재능도 물론 그것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양의 사람에게 각양의 재능과 형식으로 하나님을 표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다양성과 충만하심을 인한 것인데 그것에 대하여 탐하고, 나에게 주신 것은 외면하고 다른 사람 같이 행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함에 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의 시작은 자신의 것에 대한 불만족에서 시작합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만족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남이 무엇을 가지고 있던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 물건의 어떠함이 자신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다면 다른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탐내고 자신도 그것과 동일하게 되려고 스스로 노력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다양성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실 때 자신에게 기대하신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정한 자리, 자신에게 기대하신 것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공개강좌를 개최합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9. 11. 28. 11:08 Writer : 김홍덕

12월 16일 KTX 광명역 회의실에서 <공개강좌>를 개최합니다.


주제는 "육신을 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입니다.


시간은 오후 7시에서 9시까지 2시간이며, 

해당 장소는 소회의실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 사전에 먼저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참석하실 분은 사전 예약을 부탁드립니다.


예약은 

메일 the.elphis@gmail.com, 

휴대전화 010-3396-5555(김홍덕)으로 해 주시면 됩니다.

신청은 참석 인원수만 보내 주시면 됩니다.

("1명 참석" 이렇게만 보내시면 됩니다.)


저의 블로그 구독자들과, 성경을 나의 이야기로 알고자 하시는 분들의

참석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룻기의 주제와 교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27. 16:01 Writer : 김홍덕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룻기라는 성경을 효부나 열녀문과 같은 결로 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룻이 시모에게 보여준 효심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생각의 뼈대에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룻기는 그런 성경이 아니다. 아니 성경은 그런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육신을 입은 인생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주신 목적을 깨닫고 사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책이다. 따라서 그 성경 속의 룻기도 당연히 그것을 말씀하시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획하신 창조목적을 벗어난 사람의 모든 삶의 형태를 죄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창조주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사람도 자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거나 구매한 것이 자기 의도와 다르면 그것을 정죄한다. 버리거나 다시 되팔아 버리거나 수리하거나 한다. 사람이 자기 생각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죄는 그렇게 정의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런 것은 신학도 아닌 그냥 상식이다.


룻기의 시작은 룻의 시모인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들의 나라인 유대 땅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육신의 먹거리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 하나님의 의가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멜렉은 그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떠난 것이다.


그런데 이 모압이라는 족속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동굴에 두 딸과 함께 남았을 때 두 딸이 서로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남자는 자기들의 아버지 밖에 없으니 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자.’고 모의하여 낳은 두 딸의 아들 중 첫째 딸 아들의 후손이다. 그러니까 모압(과 암몬)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나오미의 남편도 그렇다. 자기 땅에 흉년이 들자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스스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베들레헴을 떠났다는 것이나 모압으로 갔다는 것이나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무엇을 <행할까?> 염려하는 신앙이 어떻게 회복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압 땅으로 갔고 그것에서 더 나아가서 이방인인 오르바와 룻이라는 여인들을 자기 아들의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흉년이 들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라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 아니 대부분의 교회가 취하고 있는 방법이다. 교인들이 줄어들면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교회에 도입하려 한다. 즉 세상이 가진 다양한 방법과 형식을 도입하려 한다. 방법과 형식은 본질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형식이다. 성경이 여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라는 본질을 표현하는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여자고 그리스도 앞에 신부라고 하심이 그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으로 교회를 꾸미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엘리멜렉이 아들의 아내를 이방 가운데서 삼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멜렉은 물론이고 두 아들까지 다 죽고 남은 것은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았다는 것이다. 남편 없는 과부만 남았다는 것이다. 엘리멜렉과 같이, 오늘날 교회와 같이 형식, 그것도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형식까지 취하여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해 보려했는데 정작 후사인 아들을 낳을 남편들이 다 죽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건물을 화려하게 지었는데 정작 안에는 은혜가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그런 상황은 나오미에게 암담한 것이다. 그런데 고향 베들레헴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신은 남편을 좇아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겠다고 이 먼 곳까지 애썼지만 남자는 다 죽고 과부 셋만 남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어떻게 하지 않은 곳,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은혜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길을 떠난 것이다. 


형식적이니 신앙, 세상의 가치로 예배 의식과 건물을 본질로 보는 신앙에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자기가 한 번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보겠다고 시도한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이다. 신앙의 형식,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는 행위를 드려 세상에서 성공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 안에서는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안 자리를 떠나 자신들이 어떻게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 자신이 그리스도(a christ)라는 확신 없이 그냥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신앙인들이 룻기에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말씀을 대하면 나오미와 같이 원래 인생의 자리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룻기를 통해서 효부 타령을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이 엘리멜렉이나 모압의 신앙이 아닌지 돌아보고 회개하고 인생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형식들, 자신이 사회적으로, 세상적으로 가진 육신의 삶도 이방 여인(형식)인 룻이 따라 가듯 그 길을 따라 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말룐과 기론이 이방여인에게서 아들을 얻으려고 한 것과 같이 세상적인 삶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했겠지만, 정작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가 있는 자리, 인생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세상의 삶이 그것을 따를 것이라는 것을 룻을 통해 언약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룻과 같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나오미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형식만 있는 신앙이 가진 이방인의 형식, 곧 세상적인 삶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사는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적인 삶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혹은 악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했더니 육신 가진 세상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삶이 된다는 것을 룻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룻기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