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의 주제와 교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27. 16:01 Writer : 김홍덕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룻기라는 성경을 효부나 열녀문과 같은 결로 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룻이 시모에게 보여준 효심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생각의 뼈대에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룻기는 그런 성경이 아니다. 아니 성경은 그런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육신을 입은 인생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주신 목적을 깨닫고 사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책이다. 따라서 그 성경 속의 룻기도 당연히 그것을 말씀하시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획하신 창조목적을 벗어난 사람의 모든 삶의 형태를 죄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창조주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사람도 자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거나 구매한 것이 자기 의도와 다르면 그것을 정죄한다. 버리거나 다시 되팔아 버리거나 수리하거나 한다. 사람이 자기 생각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죄는 그렇게 정의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런 것은 신학도 아닌 그냥 상식이다.


룻기의 시작은 룻의 시모인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들의 나라인 유대 땅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육신의 먹거리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 하나님의 의가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멜렉은 그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떠난 것이다.


그런데 이 모압이라는 족속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동굴에 두 딸과 함께 남았을 때 두 딸이 서로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남자는 자기들의 아버지 밖에 없으니 아버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자.’고 모의하여 낳은 두 딸의 아들 중 첫째 딸 아들의 후손이다. 그러니까 모압(과 암몬)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나오미의 남편도 그렇다. 자기 땅에 흉년이 들자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스스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베들레헴을 떠났다는 것이나 모압으로 갔다는 것이나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무엇을 <행할까?> 염려하는 신앙이 어떻게 회복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압 땅으로 갔고 그것에서 더 나아가서 이방인인 오르바와 룻이라는 여인들을 자기 아들의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흉년이 들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라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 아니 대부분의 교회가 취하고 있는 방법이다. 교인들이 줄어들면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교회에 도입하려 한다. 즉 세상이 가진 다양한 방법과 형식을 도입하려 한다. 방법과 형식은 본질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형식이다. 성경이 여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라는 본질을 표현하는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여자고 그리스도 앞에 신부라고 하심이 그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으로 교회를 꾸미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엘리멜렉이 아들의 아내를 이방 가운데서 삼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멜렉은 물론이고 두 아들까지 다 죽고 남은 것은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았다는 것이다. 남편 없는 과부만 남았다는 것이다. 엘리멜렉과 같이, 오늘날 교회와 같이 형식, 그것도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형식까지 취하여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해 보려했는데 정작 후사인 아들을 낳을 남편들이 다 죽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건물을 화려하게 지었는데 정작 안에는 은혜가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그런 상황은 나오미에게 암담한 것이다. 그런데 고향 베들레헴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신은 남편을 좇아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겠다고 이 먼 곳까지 애썼지만 남자는 다 죽고 과부 셋만 남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이 어떻게 하지 않은 곳,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은혜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길을 떠난 것이다. 


형식적이니 신앙, 세상의 가치로 예배 의식과 건물을 본질로 보는 신앙에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자기가 한 번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보겠다고 시도한 모든 것을 떠나는 것이다. 신앙의 형식,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는 행위를 드려 세상에서 성공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 안에서는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안 자리를 떠나 자신들이 어떻게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 자신이 그리스도(a christ)라는 확신 없이 그냥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신앙인들이 룻기에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말씀을 대하면 나오미와 같이 원래 인생의 자리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룻기를 통해서 효부 타령을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신앙이 엘리멜렉이나 모압의 신앙이 아닌지 돌아보고 회개하고 인생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형식들, 자신이 사회적으로, 세상적으로 가진 육신의 삶도 이방 여인(형식)인 룻이 따라 가듯 그 길을 따라 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말룐과 기론이 이방여인에게서 아들을 얻으려고 한 것과 같이 세상적인 삶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했겠지만, 정작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가 있는 자리, 인생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세상의 삶이 그것을 따를 것이라는 것을 룻을 통해 언약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룻과 같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나오미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형식만 있는 신앙이 가진 이방인의 형식, 곧 세상적인 삶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사는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적인 삶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혹은 악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했더니 육신 가진 세상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삶이 된다는 것을 룻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룻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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