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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가 무엇이길래…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육신을 보는 성경의 관점 Date : 2019. 12. 21. 04:00 Writer : 김홍덕

사람이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은 선악과를 인함이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는데 그 눈으로 보니 육신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든 육신은 온전하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사람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해 놓아서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다가 선악과를 먹으니 뱀의 말과 같이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되었다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과는 어떻게 사람(아담)에게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선악과라는 말 자체에 답이 들어 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악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면 선악과가 아니라 악과라고 이름하였을 것이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선함과 악함을 함께 먹었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먹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불순종이라는 악함을 취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 스스로가 무엇에 대하여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자기 인생과 세상에 대하여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다는 의미


사람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과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악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의미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여,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한 청년이 있었다.(17절) 이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선생”이라고 칭송하는 사람에게 냉소적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라고 반문하신다. 이는 네가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어떤 것을 선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을 가졌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아담이 숨었을 때에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과 같은 질문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표현해 낼 존재이지 스스로가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만물과 일에 대하여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실 너무 간단하다. 사람이 세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창조하지 않은 존재에 대하여 그 정체성을 정의할 수 없을 것이고, 정체성을 정의할 수 없는데 그 존재가 존재 목적에 맞는 선한 모습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 자신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스스로의 존재 목적도 자기 안에 없는데 자기 존재 목적도 가지지 않은 존재가 존재에 대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고, 죄라는 말이 하말티아(ἁμαρτία)라는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는 것을 알면 왜 아담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스스로 무엇에 대하여 선과 악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판단하는 순간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 곧 심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심판의 결과는 항상 부족함에 대한 보완을 요구한다. 심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도 온전한 것은 심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생명과 같은 것이 그렇다. 하지만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온전하지 않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자기 육신을 보니 부끄럽다고 여겼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볼 때 자기 육신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결과는 반드시 문제점의 보완을 추구한다. 그래서 무화과로 자신을 가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은 것이다. 육신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야 의로워진다고 결정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려면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아직 선악과를 먹은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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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곧 사람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안목으로 육신을 보게 되었다. 그 관점은 육신을 부끄럽게 보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육신으로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하나님 앞에 육신을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이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한 것이고, 이 육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죽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웃기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육신이 달라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육신이 부끄럽다고 여긴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육신을 가렸다고 했다. 그리고 숨었다. 하와가 부끄러워 몸을 가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선악과 이전에도 둘이 같이 벌거 벗고 있었고, 이후에 둘 사이에 아들들이 태어나는 것으로 볼 때 벗은 것이 부끄러운 관계라고 할 수 없다. 이들이 육신을 가린 것은 서로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육신을 가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을 하나님께 숨기려는 어리석음이 오히려 마땅히 할 바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리석다고 하시는 뿌리가 여기 있다.


감추고자 한 것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육신이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감추려 한 것


그렇다면 왜 무화과 나뭇잎인가? 몸을 가릴 목적이라면 잎이 더 큰 것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손바닥 만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렸는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성경이 이런 비상식적인 것을 서술했을 때는 그 표현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이야기가 아니듯이.) 그것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신체를 가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추고 싶은 것은 육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는 것을 가리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무엇인가를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이나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화과 나뭇잎은 식물 무화과 나무의 잎이 아니라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하여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 노력하는 신앙인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은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생각에 성경을 행위로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신앙 그 자체



무화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의 나라 나무다. 이스라엘의 나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요 1:48)고 하신 것도 궤를 같이 한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아래 즉 율법을 지키는 것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의미다. 또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아직 열매 맺힐 때가 아님에도 저주하신 것(마 21:18-22)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풍성하지만 그 열매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에서도 무화과 나뭇잎은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을 의미한다. 오늘날도 개신교를 포함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종파에서 성경을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곧 무화과 나뭇잎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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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책이라는 의미다. 그러면 하나님이 두 분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한 입으로 두가지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같은 것에 대하여 동일한 관점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 성경에는 육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중적인 신이든지, 아니면 하나님과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은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이 뼈대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신앙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같은 것을 다르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 하나를 말씀하신다. 언제나 같은 관점으로. 같은 생명을 가진 같은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관점 중에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이단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다른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 차이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어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은 선악과를 먹는 사건 이후에 생긴 것이라는 것이다. 선악과 이전에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가 육신에 대하여 동일하게 벗었거나 말거나 만족하였다. 하지만 선악과 이후에 육신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갈라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연히 두 번째 관점을 죄로 규정하셨다. 즉 사람이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죄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은 선악과를 먹음에서 비롯된 것


문제의 발단은 선악과였다. 하나님께서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선악과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으면 아담 곧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담 곧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뱀의 유혹과 같이 선악과를 먹어서 밝아진 눈이 발견한 것은 오직 육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는 것을 보게 된 것뿐이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되고, 뜻을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 육신을 가진 삶에 대하여 만족하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사람과 하나님과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육신에 대한 개념 외에 또 다른 관점에 사람들에게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와 함께 사람의 세계와 생각과 가치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이 성경에서 등장한 것은 선악과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이자 안목은 바로 선악과가 원인이자 뿌리며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육신을 부끄럽게 보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증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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