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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4-14) 천사와 아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19. 12. 27.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이제 아들로 말씀하신다고 시작한 히브리서 기자는 아들을 천사와 비교한다. 이것으로 보아 히브리서는 천사에 대하여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에게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천사에 대하여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천사를 사람보다 나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일반적인 공감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제는 아들로 말씀하시겠다는 그 아들’을 천사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이며, 천사는 오히려 아들을 찬양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또는 될) 사람보다 (어떤 기준으로) 더 나은 능력을 가졌다고 믿고 문제 해결을 의지하려는 사람을 위한 말씀하시는 성경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천사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사람이 가지지 못한 능력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천사는 사람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이 자신의 믿음이자 기본 상식인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렇다는 것은 천사를 이와 같이 인식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말씀인 아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히브리서의 견해는 천사의 능력이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념과 다르다. 사람이 천사보다 비교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생각이다. 오히려 히브리서는 이에 더하여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을 찬양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일에 사용되는 도구라고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전하는 말씀인 히브리서의 생각과 달리 천사가 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천사의 개념이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그 생명의 본성이 가진 안목이 천사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를 자신을 위한 도구라고 본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그렇게 보고 말할 수 있는 이유, 즉 본성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아들은 본성으로 낳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견해에 반하여 천사를 아들보다 못한 존재로 본다는 것은 사람에게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육신의 삶을 대하는 인식에 있다. 사람들이 육신의 문제가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대로 잘 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천사가 자신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람이 가진 생각과 가치관은 항상 자기 육신의 능력 이상이다. 그래서 그 괴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육신의 능력 이상의 도움이 필요하다. 천사는 그 역할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천사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천사들은 바람이요, 사역자들의 불꽃이라고 말씀하신 반면, ‘아들은 즐거움의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히 1:9), 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공평하게 다스릴 자(히 1:8)’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아들과 천사는 엄청난 차이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사람은 하나님 창조의 목적이고, 천사는 바람과 불꽃이라는 것에서 보듯 그 목적의 도구요, 또 아들을 찬양하는 존재라고 하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을 바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천사는 도구이고, 아들은 목적의 본질이다.


우리가 알 것은 히브리서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근원적으로 천사와 아들의 비교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 말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알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의 창조 목적을 알게 된다.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관점이고, 피조물에게 그 창조 목적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을 표현하시겠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형상)이 표현되는 존재가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바로 그 목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아들로 말씀하시는 말씀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하나님의 의를 알고, 그것이 피조물인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순종하므로 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심겨지고, 그 심겨진 것을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시면 그 생명이 육신의 삶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이끄시는 사람이 된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또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나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표현이고, 그 중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형상 자체를 표현하는 아들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에게 수렴한다면 천사도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는 아들이 되는 과정에 수렴되는 존재, 즉 그것을 위하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아들이 되면 천사가 찬양을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천사가 찬양하는 존재가 거꾸로 천사가 자신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천사가 하나님의 의가 세상을 통해서 또 육신을 가진 자신과 같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돕는 존재라는 것이 본능처럼 인식이 될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본다면 천사를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보지 않는다면, 아니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생명과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인데 아버지께서 천사를 아들을 돕고 찬양하는 존재로 여기는데 정작 아들은 자신보다 나은 존재로 보는 이상한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하나님의 생명에 기인한 본성과 안목으로 세상과 사람과 천사를 보는 존재라는 점을 상기하고서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일 뿐 아니라, 이 히브리서를 보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기에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히브리서를 읽기 전에는 천사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이 히브리서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하나님 아들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 천사조차도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는 존재로 볼 수 있게 거듭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이 히브리서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구원은 천사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의 안목을 가지고 보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이 바로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어서 성경이 보는 안목과 자신의 안목이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구원의 본질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천사나 마귀나 또 다른 어떤 것이라도 성경이 보는 관점과 동일하게 보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바로 그 구원을 얻을 후사인 사람에게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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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육신을 부끄러워하는 아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입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동물의 가죽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죽음 사람을 대신하는 제사의 원조로 볼 수 있고, 그 제사의 궁극은 예수님이시며, 그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표현하므로 일반적으로 양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다른 것을 희생하였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어떤 육신이 소비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는 어떤 육신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라는 것이 그렇고,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다. 그러니까 구속과 십자가를 지는 것에는 육신의 소비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는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만드신 목적도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람의 육신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사용이 된다면 당연히 소비가 되는 것이다.


대속이 있다는 것은 대속물의 육신이 소비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속도 당연히 이러한 법에서 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말씀대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이 가진 육신의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보는 관점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은 그 목적에 너무 적합하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먹은 선악과는 육신을 다르게 보게 했다. 소비되도록 지으신 육신, 그래서 연약한 육신은 하나님께 부정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끄럽게 여겼다. 사람 안에 욕심이나, 정욕이 가득함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육신을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육신 가진 인생을 창조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그렇게 만드신 이를 비난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아담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육신을 부끄러워했다는 것 역시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우리가 육신에 대하여 가지는 관점을 회복하는 기준은 십자가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도 결국 육신의 모습이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육신이 옥합과 같이 깨어지니 옥합에서 향기가 나듯 물과 피가 나온 것이다. 물과 피, 즉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로서 자신을 순종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육신의 가장 본질적 모습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구속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요 17장),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마 17:5) 예수님께서 보이신 육신의 사용법을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것이라고 보셨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그 모습 속의 육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기대하시고 목적하신 육신의 모습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보시는 관점대로 구현된 온전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가장 온전한 형상으로 보신다. 찔리고 상할 때 그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옥합과 같이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겠다는 의미다. 우리가 깨어질 때, 다시 말해서 육신이 소비될 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것은 육신이 하나님의 본성이 내재된 상태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을 종과 같이 섬기고, 세상의 가치 앞에 죄인이 되어도 자신을 소비해 가는 그것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에 내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에 대하여 가지신 생각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뜻이 본성이 되고, 그 본성이 육신을 DNA와 같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보는 관점은 그것과 일치해야 한다. 육신 아니라 어떤 것도 존재의 목적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목적과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그 상태로는 온전한 삶이 될 수 없다. 자기 정체성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봐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질 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나의 육신은 너무나 적합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달라진, 거듭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이 자신이 믿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너무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산다면 인생은 말 그대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감사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상태가 된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키고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의미이고, 인생 자체가 감사한 삶이 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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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회복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육신을 보는 성경의 관점 Date : 2019. 12. 25.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만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타락했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런 타락이 없다면 굳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는 것과 같은 구원의 역사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이렇게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는지 늘 궁금하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을 예견하신 것인지, 아니면 부추기셨는지, 선악과는 미끼였는지, 이런 문제들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아담이 왜 타락하고, 그로 인하여 아들을 보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알려면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실 때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자 하신 최종적인 목적물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스릴 존재”인 사람인 하나님 창조의 최종적인 목표 곧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과 하나가 된 존재는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나타내시겠다고 하신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자 하신 사람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 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을 창조하시고자 하신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스도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아직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첫 번째 아담의 모습으로 창조된 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달성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나누어서 설명한다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들 중에서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 있어 하나님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아들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고, 삶의 목적인 사람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다.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가 있는 것이고, 아들이 살아가면 그 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인 것이다.


첫번째 아담 - 육신만 사람 - 구속의 대상이자 창조의 대상

두번째 아담 -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된 사람 - 창조의 목적 - 그리스도


따라서 사람은 육신이 사람인 존재가 있고,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창조목적이 본성이 된 사람이 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당연히 첫 번째 아담의 모습이다. 즉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육신으로는 사람으로 났지만 아직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지 않은 모든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은 아담의 범죄에 따른 후속 조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창조의 과정이며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이 모든 인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하나님의 구속이 모든 인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모든 인생이 죄인이라는 의미다. 모든 인생이 자기만의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각 개인이 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생을 위한 구속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이며 세상을 경영하시는 계획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없다면 말만 모든 사람을 위한 구속이라고 뇌까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모든 구속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아담이 먹은 것이 유전된 것으로 치부하는 한 이 구속은 자신에게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이 왜 그렇게 자기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작인데 이 시작이 없으면 교회에 1,000년을 다니고 예수를 10,000년 믿어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은 사람 자신이 선악과를 먹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삶에 만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육신의 삶에 만족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란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만족은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 가진 삶을 자기의 선악 기준으로 보지 않는 것이 만족의 동산에 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 아담처럼.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회복 아니 창조목적 안으로 온전해지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죄는 우리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생들이 무엇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을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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