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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보는 것에 대한 하나님과 다른 관점들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해보면 선악과를 먹은 상태에서 육신을 바라보면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선악에 대하여 판단하기 때문이다. 선악에 대한 판단이 이렇듯 사람의 육신을 부정하게 보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은 동기에 있다. 아담과 하와를 꼬신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듣고서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 보였다. 즉 선악과를 먹으면 과연 하나님과 같이 될 것과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니 육신으로서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아진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사람이 잘못된 안목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해보니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과 비교할 때 정말로 비교조차 안된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물론 그 인식은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그릇된 관점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어쨌든 어두움에 빠진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 앞에 육신이 너무 부끄럽고 부족하다는 것에 대하여 원인을 생각치 않고 어둡고 하나님에게서 떠난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돛단배 안에서 자기가 돛에 부채질을 하여 배를 움직이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그런 어리석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한 것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으로 온전히 가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은 물론이고 많은 사도들이 율법의 한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율법, 즉 사람이 스스로 생각한 법과 그 법에서 파생된 생각인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그 관점에서 시작한 그 어떤 것도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사람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육신을 정하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한 신약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만족과 안식과 평안이 없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상식이다. 그런데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문제이고 문제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제 해결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한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삶이 만족이 되고 평안하기를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련하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려고 한다. 신부나 수녀가 되고 속세를 떠난다며 중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노력들을 오히려 비겁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마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여긴다. 그런 노력이 바벨탑을 쌓는 것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그 피나는 노력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그것이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가 된다. 하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안 될 것 같으니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 각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육신 가진 인생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면서 노력은 끊임없이 한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 둘을 혼합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다르게 육신을 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온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신앙의 실체이다.


그러나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신앙의 절대적인 문제는 어쩌면 다른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자기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오히려 신앙의 경건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들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그래야 경건한 것이라고 최면에 빠져 있는 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만약에 개를 구원하실 것이었다면 개로 오셨을 것이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상, 구원의 대상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그 존재와 같은 형식인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를 보이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것은 육신으로 오신 이의 뜻과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의 육신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육신 가진 자기 삶을 부정하게 봄을 인하여 이를 만회하려고 말씀을 지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육신의 삶이 말씀 그 자체가 되면 그것보다 더 온전하게 말씀을 지키는 삶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말씀 자체인데 말씀을 지키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숨만 쉬어도, 말만 해도 다 말씀을 이룬 것이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약속하신 이 놀라운 것을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정작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고서 오히려 어둡게 되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의 의미를 모른 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부끄러움을 가리듯 성경을 지켜서 의로워지려 하고, 흙을 짓이기고 불에 구워 벽돌을 만들 듯 자신을 단련하고 금욕적인 노력을 쌓아 하늘에 오르려는 바벨탑을 쌓고, 이것저것 해도 안 되니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단지 할 수 있는 노력이나 하자는 식으로 주저 앉아 있는 것이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보이셨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음을 아시고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육신을 부정하게 봄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구속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창조하실 때 세우신 뜻대로 사람이 회복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마저도 사람이 먹은 선악과로 인한 벌을 아들에게 내리심으로 사람들을 구속했다고 생각한다. ‘죄는 사람이, 벌은 예수님이’ 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을 소비하여 육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말씀하시려 오신 분이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셨고, 육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육신 안에 물과 피 곧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옥합이 깨어져 향기가 나듯 드러내신 것이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라는 것이다. 육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이 평안하고, 복락을 누리며, 육신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십자가에 육신이 달리심으로 완전히 보이신 것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육신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육신이 하나님에 미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고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오히려 육신은 그렇게 신이나 천사에 비해 턱없이 연약하기에 오히려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쉽게 드러나는 온전한 존재라는 것임을 보이셨다. 사람의 연약함, 육신의 능력이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여 선악과를 먹은 눈으로 보면 부끄러운 그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기에 가장 온전한 상태라고 생각하셨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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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 안에서 보면 율법주의는 전통적인 이단 혹은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는 신앙이라면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 새롭게 자리한 이단을 말한다. 이 영지주의는 신약성경 후반부를 기록한 사도들, 요한과 유다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이 많이 언급하였다. 이는 다소간 사도들의 사역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사도는 상대적으로 영지주의보다는 이방인의 신앙과 철학 곧 세상의 가치가 복음과 간음하는 것에 대하여 많이 경계하였다면, 이스라엘 내의 교회들,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비중이 높았던 사도들은 영지주의에 대하여 많이 경계하였다.


이는 영지주의라는 것이 쉽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있어 육신과 영혼을 따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육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영지주의의 기반인 것이다. 그래서 이에서 파생되거나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하신 것이라고 하거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파생되었고, 이는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 갔던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지주의는 어느 시대에만 반짝한 시대적 신앙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자신들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고 단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본질적인 영지주의다. 다시 말해서 영지주의는 역사 속 한 시대의 신앙이 아니라 오늘도 현존하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도들의 때 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칭 정통이라는 신앙에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관점이다. 즉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해 온 두 번째 관점은 육신을 부끄럽게 보고, 감추어야 하며, 육신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두려운 것이라고 판단하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가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육신이 정하고 온전하면 굳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소망을 좇을 때 육신을 배제할 이유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신앙


따라서 영지주의도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에서는 율법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즉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모두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두 번째 관점에서 비롯된 신앙이고 사상인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육신을 부정하게 보기에 그것을 만회하려고 성경을 지키려는 것이나, 육신은 어떻게 해도 항상 부정하니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육신을 가진 사람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둘 다 같은 뿌리에 있고, 둘 다 선악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둘은 같지만 약간의 색깔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영지주의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상이라는 것을 보이셨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수 있을지를 비교하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니 할 수 없음을 인하여 예수님과 자신의 육신을 다른 것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다.


이는 엄연히 육신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그것도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실존이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형상인데 그것을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부정하게, 또 부끄럽고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존재로 단정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영지주의는 없어진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어이없게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 근간이 되어 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과 같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과 같은데 어떻게 예수님과 다른가?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보다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까지 하셨는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님과 같이 온전하여 질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온전하여 질 수 없다는 것이다. 화를 내고 성욕이 일고 욕심에 매인 자신을 보니 부끄러워서 도저히 예수님과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겸손한 것 같은데, 사람의 육신을 그렇게 본다면 그런 육신을 만드신 하나님은 실패자요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요,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는 것까지 생각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한 영지주의


사람들이 이렇듯 자신도 모르고 부인하고 있지만 영지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 그 이유는 육신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먹은 선악과로 인하여 자신이 화를 내고 욕심과 정욕에 가득 찬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스스로 심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 간에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의 본성이다. 선악과를 먹었으니 그 본성이 내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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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 가진 인생을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해보니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대책으로 성경을 몸으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을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로 보지 않으면 아담을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연구하듯 비판하는 것을 성경공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선악과의 사건은 분명히 오늘날의 이야기다. 오늘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과를 먹은 존재로 살아간다. 생활에서 마주하는 일과 사람 그리고 상황을 늘 선과 악으로 판단한다. 예를 들어 물컵을 쏟아서 옷이 젖는 것과 같은 일상의 일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께 뭔가 잘 못해서 그런 것인가?’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악한 일을 당하지도, 행하지도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무엇을 노력할 것인지 성경을 가이드로 삼는다.


특히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고 착각 아니 거의 최면을 건다. 이는 신학의 영향이 지분이 크다. 성경을 공부라는 행위로 알아가려는 노력의 산물은 결국 행위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상식인데 이 상식을 가리고 신학을 거룩히 치장하고 그 산물들이 신약에 있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행위로 좇는 것은 거리낌없이 복음적 생활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약성경의 말씀도 행위로 지키려 하면 율법이 되고 복음도 Have to가되면 율법이 된다.


그러나 이것도 엄연히 아담이 부끄러움을 가린 무화과 나뭇잎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으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면 이단시하고 터부시 한다. 이는 다분히 성경을 기반으로 둔 많은 이단들을 인함이 크다. 하지만 자신이 예수다 혹은 하나님이나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은 예수님의 권세나, 능력이나, 지위를 도용한 것이지 예수님의 생명이나 정체성, 십자가를 지신 본성을 기반으로 자신을 예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차이는 근원이 다른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동일한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 이것이라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경건한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믿고 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신앙의 실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온전하다면 노력할 필요가 있는지를.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이 부족하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기에 그것을 메우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즉 끊임없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잎이 마르면 또 따서 치마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양의 가죽으로 옷을 해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이라는 것을 믿으면서도 오늘도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은 잎으로는 “예수님의 구속을 믿노라.” 말하지만 실상은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끊임없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예수님과 같지 않은 자신을 메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육신을 부끄럽게 보는 것


즉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육신을 보는 것과 같은 관점을 가진 존재이며,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부끄럽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며, 판단했다는 것은 스스로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었고 아직 그 문제를 벗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율법주의 신앙이지만 자신들이 사는 달력의 시대가 예수님 오신 이후의 세월을 살기 때문에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신앙을 복음신앙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성경을 모른다는 부끄러움에서 시작한 공부라는 행위의 산출물인 신학이 이를 붙들고 있어서 더울 그렇다. 그러나 간첩이 대한민국에 산다고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 듯이, 자신의 존재가 율법적인 존재이고, 자신이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노력해야 한다는 신앙에 있는 사람이라면 주후 30,000년이 지난 시대를 살아도 그의 신앙은 율법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고서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그것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말씀은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면서 정작 자신은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것은 부끄럽고 만회해야 할 문제이므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대로 살고, 율법신앙의 본질인 신학을 신봉하는 목사들의 말을 지켜내려고 하고 있는 신앙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이다. 즉 육신을 부정하게, 부끄럽게 보는 안목이 만들어낸 신앙이 바로 율법주의인 것이다. 율법주의는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육신의 삶을 부정하게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본 자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만회하고자 한다. 육신에 만족하지 못하니 육신의 삶을 고난이라 여길 수밖에 없고, 삶을 고난으로 여기니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니 무슨 선한 것을 행하여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고 이윽고 자신이 먹은 선악과가 주는 가치관대로 자신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근본 동력이다. 그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이생에서의 삶이 온전해지고 의로워지는 것은 물론 죽어서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그것을 지켜 행하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우리가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오늘날 유대교라는 종교를 지키는 사람들이나 구약성경대로 하는 것이나 하나님과 무관한 행동으로 의로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율법주의지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율법주의는 오히려 하나님과 무관한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행위로 말씀을 지키는 것에 더 노하신다. 그것은 간음한 것과 같이 혼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을 더 진노하게 하는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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