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본질은 죄는 사람들이 짓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으시면서 겪게 되는 고난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육신으로 오셔서 같은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육신으로 어떻게 나타내는지를 보이신 것이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보이는 그 모든 삶이 바로 고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난은 육신의 안목으로 보면 육신이 일생을 살며 소비되거나, 예수님과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같이 급격하게 소비되는 것이 고통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고난으로 여기는 것이지만,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과 육신의 성격으로 보면 오히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이 쇠약해지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육신을 보전하는 것을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는 것뿐이다. 따라서 주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육신의 삶이 쇠약해지고, 다른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거나 아직 장성하지 않은 사람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광범위한 것이다. 즉 성경말씀 전반에 있어 근간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기에 성경이 생명으로 여기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었다면 당연히 성경의 모든 말씀아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거짓이거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아닌 것 그 두가지 중의 하나일 뿐이다.


거듭남이 근간이 되는 것은 당연히 생명에 관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형제와 같은 말씀들도 모두 생명에 관한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것에는 그 생명의 본성이 있다. 같은 생명을 가졌다면 같은 본성에 의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행동들을 모으면 성경이 된다. 성경에 무엇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말씀들은 결국 그런 행동을 하는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다. 거듭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규범들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본성에서 동일한 행위를 보이는 존재들이 서로 형제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형제로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거듭난 존재들에 말씀이다. 예수님과 본성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본성이 같으면 그 삶의 모양이 달라 보여도 결국 같은 본성에 의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남자였지만 육신으로 여자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 앞에서 죄인이 되어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심과 같이 자기 삶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 표현은 다를 수 있지만 그 행위의 본성, 근원은 같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을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본성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심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고 순종이 된 사람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가 되었다는 것은 범사에 동일한 본성을 보이는 사람들인 것이다. 히브리서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다고 말씀하심 또한 같은 생명이 같은 본성으로 살아감을 인함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 역시 자신의 고난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이기에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에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함을 입은 자가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아버지가 같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고난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만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겸손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예수님은 예수님이니까 그럴 수 있지만 우리는 사람이니 그럴 수 없고 단지 노력할 뿐이라는 신앙은 예수님과 형제도 아니고 예수님의 역사하심을 인하여 거룩하게 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의 고난으로 온전케 되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자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예수님과 생명이 다르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예수님과 형제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과 형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고난이라 말하는 것이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 안에서 보면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같이, 자신의 삶도 말씀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굳이 그렇게 믿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생명으로 난 사람은 오히려 부인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서 거듭난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형제인 것이다. 아버지가 같고 생명의 본성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런 사람들이 모일 때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까지 생명의 본성에서, 거듭남에서 다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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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복종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에게 복종하는 장차 올 세상은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선 십자가를 언급하심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난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삶, 장차 올 세상으로 이끈 그 고난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고난으로 우리를 장차 올 세상으로 인도하심과 같이 우리도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들에게 장차 올 세상으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라는 말씀에서 확증된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복종하는 거룩한아들이 된 사람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과 하나에서 난 형제라고 하심은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좇아 지셨으니 그 십자가로 거룩함을 입어 예수님과 하나가 된 아들들 역시 같은 운명이라는 의미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물론이고 모든 성경이 결국 모든 사람이 회복되어야 할 자리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런 아들이 고난을 받음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영광과 존귀라고 말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이다.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다고 하면 그것은 고난을 벗어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내포된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천사들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영광을 얻는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고난을 벗은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반면에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으로 영광과 존귀를 얻는다고 하셨다. 아들이 되는 것은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는 것은 결국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를 추종한다는 것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 고난을 벗어난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그 추구하는 바를 성취할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천사를 인식하고 그에게 자기 소망을 의탁하는 것이 천사에게 복종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장차 올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창세기에 말씀하신 태초가 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인하여 자신 뿐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까지 영화롭고 존귀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육신이 소비되므로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가 된다고 여기시는 반면 사람들은 육신이 소비되지 않고 보존되고 평안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완전히 반대이다. 이러한 괴리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아니 그것이 자기 안에서 왜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른다면 아직 고난에 대하여 세상이 가진 생각에 자신의 의를 남겨 두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육신이란 세월을 살면서 점점 쇠약해진다. 일부러 고난이라는 것을 자청하거나 당하지 않아도 고난을 당한 것과 같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인생이 그렇게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그렇게 달성이 된다는 의미다. 약해지고 쇠약해지는 삶, 고난을 당한 것과 동일하게 소비되는 육신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을 있어서 안될 것으로 보거나, 반대로 그런 육신의 운명 속에서 그나마 원치 않는 것을 당하는 것이 죄로 인한 벌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안목은 모두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다른 생각인 것이다.


결국 날로 연약해지는 육신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고, 그 운명 안에서 맞이하는 날들 속에서 육신이 연약해지는 것을 어디에 사용할 것이냐가 핵심인 것이다. 육신이 소비되는 순리와 같이 세상의 가치에 매여 자신의 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생들 앞에 육신의 종과 죄인과 같이 수고를 내어주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그 육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반대로 가고자 하는 노력에 수반된 곤고함을 고난이라 착각하면서 살 것인지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육신이란 세상의 가치를 좇는 자기 의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이 된 하나님의 아들을 심판하는 심판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운명이라고, 세상이 모두 다 고난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운명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볼 때는 한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려 투쟁하는 것에 비하면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평안임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세상의 가치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의 앞에 종으로 또 죄인으로 자신으로 내어주는 것은 육신의 평안과 안녕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 신앙으로 볼 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고난으로 보이겠지만,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좇아 자신에게 주신 어차피 소비되는 육신을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소비하는 것은 가장 평안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피조물은 창조된 목적 안에 있을 때 가장 평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동차 브레이크를 보면 항상 마찰을 일으키고 열이 나면 마찰로 인하여 닳아 없어지지만, 브레이크라는 제조 목적 안에서 보면 그것이 브레이크에게 가장 온전하고 평안한 것이다. 브레이크가 닳지도 않고 마찰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버림을 당할 것이다. 그와 같이 육신도 나이 들면서 연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육신이 그렇게 됨이 온전하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도 당연히 육신의 삶을, 또 세상이 고난이라 말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지 못하여 다른 생각을 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로 사는 것은 육신의 고난만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 살아 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사람을 위하여 육신이 수고하는 것이 얼마나 평안하고 기쁨이 되는 것인지. 이것을 모르고 그리스도의 삶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생명이 아니거나 아직 어리다는 방증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고 한 바울사도의 말은 다 거짓과 사기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고백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바로 그 이유가 우리 안에 본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고난만 당해야 하는가?” 와 같이 의문을 가진다면 예수를 믿는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게 의문이라면 나의 생각을 돌아봄이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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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세우신 뜻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흑암 속에 있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인생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왜 사는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인지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천지창조의 시작에 “빛이 있으라”하심이 그것이다. 빛은 곧 인식이다. 컴퓨터에 입문하면 컴맹에서 벗어나고 컴퓨터 세계에 대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태초다. 그 태초는 물리적 세상의 창조보다 한 개인이 새로운 세계를 인지하는 것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본질이다.


그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는 모든 인생에게 예비된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을 후사’라고 하셨고, 히브리서 2장 5절에서는 ‘장차 오는 세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확정이 아닌 장래의 예비된 것으로 말씀하심에 대하여는 앞선 ‘구원을 후사들’에서 간략히 설명하였다.) 이것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로 인도 받도록 지음을 받았으므로 이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순종하고 받는 사람에게는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그 살아가는 세상과 다른 또 다른 세상이 자신에게 임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일임으로 부인할 수 없게 되면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하심도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히브리서는 바로 그 세상에 대하여 말씀을 이어가고 있다. 그 세상은 천사에게 복종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게 복종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평안과 안녕을 바라는 사람들이 천사들에게 자기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심이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차 다가올 세상은 육신의 문제 해결이 신앙의 본질이 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에게 복종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잠시 천사보다 못하였지만 예수를 보고 나면 만물이 왜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는지를 알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를 본다는 것,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가 왜 오셨는지를 인지하므로 열리는 새로운 세계는 천사에게 복종하는 세계가 아니라 만물이 예수를 보고 새 세계가 열린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것에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세계는 육신의 성공과 평안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에게 복종하고 의지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돈 달라, 밥 달라, 배우자 달라 기도하는 것이 바로 천사에게 복종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자기보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대하는 능력이 뛰어난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신앙 위에 서서 자신이 바랬던 대로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된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라고 믿는 그 신앙이 바로 천사에게 복종하는 신앙인 것이다.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신앙이라는 의미다. 장차 오는 세상이 오지 않은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날에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가르치는 자나 따르는 자나 알지도 못하면서 행함으로 성경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괜히 성전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렇게 자기 공로로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거래하는 곳이 오늘날의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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