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듣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강퍅하지 않은 마음이다. 사람이 들으려 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말부터 다르다. 그리고 사람은 간절하지 않으면 겸손해지지도 순종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사고하게 하셨다. 자신에게 주신 사고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볼 때 마음이 강퍅하지 않다면 세상의 모든 집을 지은 이가 있듯이 세상도 지으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에 반하여 스스로 안에서 사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므로 그 음성이 말씀이 되어 자신의 삶을 주관하게 되면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반대로 삶의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자기 삶이 평안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적어도 한 분야에 안식한다는 것은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수고와 대학교수로서의 연구활동은 다른 것이다. 되기 위한 수고는 교수라는 자리의 안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교수로서 연구하는 것은 교수라는 자리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인생을 이 관점에서 보면 인생에 의미를 찾은 사람의 삶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고,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모든 순간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안식이 없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 삶의 모습과 수고의 모양은 같아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예수님의 자이만큼 극명하게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저주로 벌로 규정하시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수고하도록 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애 대한 대가성 벌이 아니라,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존재의 숙명이다.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이 남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삶도 끊임없이 판단하기에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그 판단에서 선한 자리에 이르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안에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사는 것이 바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안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둘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하는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의 음성 앞에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순종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의지나 신념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과 육신 가진 인생에게 주신 사고와 선택과 인지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면 너무 쉬운 것이다. 유일하게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육신의 평안이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은 육신의 수고가 수반된다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고, 그 육신의 정욕이 이끄는 평안의 기준은 선악의 행위에 대한 반대급부에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이 생각하는 선한 행위를 공로로 쌓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마음이 강퍅한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 온 세상과 육신에게 주신 역량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은 모든 것을 목적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목적대로 순종하는 관계는 온전하다. 모든 부품이 설계자의 목적대로 작동하는 기계는 언제나 온전하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만드신 인생의 삶이야 말한 것도 없다. 그 온전하고 평안함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회복되어 있으니 그것이 안식이다. 그 안식을 누리는 사람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아 보여도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예수님이 다른 만큼 다르다.


오늘도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예수님을 닮겠다고 노력하며, 더 나은 신앙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수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수고가 안식이 없다는 이름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표가 붙어 있다는 것은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이 이끄는 선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사람은 안식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으니 안식 없는 수고에 매몰된 삶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블로그의 내용을 OFF-LINE에서 함께 나누실 분을 모집합니다.


모집 지역은 대구, 서울 입니다.


적정한 인원이 모이면 별도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아래로 연락주십시오.

e-Mail : elphis@kakao.com  /  phone : 010-3396-555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히브리서 3:7-11) 음성이 말씀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1. 9.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음성은 모든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표현하신 것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말씀하심이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행위에 관한 것, 육신에 관한 것을 묻고 의지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이 눈에 보이는 어떠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생이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을 인하여 광야에서 다 죽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하지만 그 땅은 최고의 신이 주었다고 생각하기에 부족한 땅이었다. 최고의 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토지를 주시겠다고, 영토를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자신의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서 인생이 꿀과 같이 풍요롭고, 다른 사람을 먹이기에 충분한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사람의 이야기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다. 즉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육신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현혹되어 그것을 걷어 차 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진노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것인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구한다. 사람들의 이런 신앙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던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진노하시는 신앙이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3가지 전후의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로고스, 다음으로 케리그마, 그리고 쉐마 혹은 뤠마라고 하는 말씀이다. 로고스는 계획, 의도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가 로고스이다. 다음으로 케리그마라고 하는 것은 선포되는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에게 전해질 때의 말씀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뤠마라고 하는 체휼이 되어 자신의 것(본성)이 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뤠마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께 뤠마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의와 뜻과 계획을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께서 그 정체성과 성품을 표현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인화한 프레임 안에서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모든 만물과 이치가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과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지은 이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그것을 보았으면 자신도 하나님께서 지었음을 알게 되면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음성을 드는 것이다.


음성은 단순한 소리와 같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그 뜻을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이 되는 것은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그 하나님의 음성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으로 받을 때 말씀이 되는 것이다. 사람 많은 곳에서 특정 이름이나 호칭을 부르면 자신이 그 이름이나 호칭을 가진 사람들만 돌아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늘 세상의 모든 것으로 창세 때부터 지금까지 말씀하시지만(음성) 정작 그것이 자신의 말씀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어떻게 행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고 진리다. 그들이 듣는 것이 설사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 중에 지극히 일부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성품을 늘 말씀하는데 그것 중의 일부에 해당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존재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이 아니다. 다 자기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는 말씀일 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때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사람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들려주신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 음성이 들리면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지은 이가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에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한결 같이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시니 우리가 그것을 듣고 그 음성이 자신에게 말씀이 되어 그 말씀이 육신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음성이며, 우리를 지으신 뜻이다.





이 블로그의 내용을 OFF-LINE에서 함께 나누실 분을 모집합니다.


모집 지역은 대구, 서울 입니다.


적정한 인원이 모이면 별도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아래로 연락주십시오.

e-Mail : elphis@kakao.com  /  phone : 010-3396-555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히브리서 3:7-11) 하나님의 음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1. 8.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음성은 은혜로운 것이지만 사람들이 자기들 맘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함이 많고, 그로 인하여 신앙이 어긋난 길로 가는 것은 이제 새로운 뉴스도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을 자의적으로 의인화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그 뿌리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의인화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사고 프레임 안에 종속된다. 문제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그 존재를 표현하시는 분이시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용이시다. 사람은 그 형식이다. 내용은 형식에 갇히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 내용이 먼저 있고 형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은 하나지만 형식은 다양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함이 설명된다. 어쨌든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을 의인화한 프레임 안에서 사람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듣는 것은 온전하지 않다.


특히 간혹 주변에서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들었다고 말하는 내용의 범주를 생각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육신에 관한 것이라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당연히 당신도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사업의 성공, 결혼, 건강, 자녀에 관한 육신의 문제를 기도하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이 동일한 범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구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음성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그 음성의 내용이 하나님의 정체성에 부합하느냐의 문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육신을 통하여 그 성품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에게 육신 가진 삶을 불온전하게 주고서 그 해결을 도와주는 재미를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육신의 문제를 어떻게 하라고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이런 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도 자기 정체성에 맞는 말을 한다. 말과 자신의 정체성이 다르면 그것이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니 존재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어떻게 해야 복을 주겠다는 행위규범에 종속된 공로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이 존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어떤 선택, 기도와 같은 어떤 행위를 하라고 음성을 들려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순인데 그것이 구분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어두운 신앙이라는 증거다.


존재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존재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 어떤 존재가 되면 그 존재의 존재목적과 본성에 맞는 행동은 그냥 딸려 오는 것이다. 존재가 되면 행위는 그 존재의 본성에 맞게 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존재가 되면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행위로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존재의 신이 주신 말씀을 행위로 대응하니 잘 될 리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는다. 그리고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존재의 신께 행위의 문제를 물었더니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진리고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음성은 이 히브리서와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히브리서의 간절한 권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 창조하실 때 뜻하신 것이 자신의 정체성이고 삶의 목적과 인생의 의미라는 것을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주제를 벗어난 음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 음성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도 그것이다. 세상의 가치로 높은 자리로 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 앞에 낮아지고 죄인이 되어 육신으로 섬기는 모습이 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물과 피가 쏟아지듯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오직 그것 뿐이다.





이 블로그의 내용을 OFF-LINE에서 함께 나누실 분을 모집합니다.


모집 지역은 대구, 서울 입니다.


적정한 인원이 모이면 별도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아래로 연락주십시오.

e-Mail : elphis@kakao.com  /  phone : 010-3396-555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