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안식에 들지 못하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은 계속 이어진다. 이는 후렴까지 이어지는 잔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에 속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히브리서는 복음을 받았으나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말씀일 것이다.


4장에 들어가면서 히브리서는 안식과 약속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안식은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앞서서 계속 설명한 것과 같다. 안식이란 목적이 이루어진 온전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약속과 같은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약속은 계약적 성격이 아니다. 계약은 동등 혹은 유사한 존재 간에 체결하는 것이다. 성경을 잘 지키면 육신으로 사는 동안 하는 일이 잘 되고 건강하고 부유한 축복을 주고 죽으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천국에서 주겠다는 계약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사람들과 계약할 사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말씀이 바로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임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무슨 유익이 있다고 100% 온전하게 지키지도 못하고 일부만 지키는 사람들과 말씀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을 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람 중에 누가 이런 불합리하고 자신에게 유익 없는 계약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사람 만드신 하나님도 그러실 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이 관계에서 약속은 오직 하나님만 정하실 수 있다. 만드시지 않으면 약속도 없다. 사람이 약속 혹은 계약의 당사자나 “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모든 약속은 사람의 동의와 반대급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과 의와 뜻과 목적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존재한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든 아니든 간에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미 성립되었고, 항상 존재하고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자신들이 교회에 나가면 그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존재 the Human이 존재하게 된 그 순간부터 아니 그것을 계획하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약속을 하셨고, 하나님께서 사람이란 존재를 경영하시는 동안 항상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는 말씀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이해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고 그 마음을 성령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것과 그것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무조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제 아무리 하나님은 신실하시니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목숨을 걸고 믿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것이 아니다. 특히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와 뜻이 아니라, 이 생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육신의 삶이 다른 사람보다 형통하게 되는 것을 약속이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다시 안식으로 설명한다. 약속의 본질이 안식이라는 것이다. 안식은 앞 장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수고하지 않는 것이고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새우신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약속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의와 뜻이라는 것을 안다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온전한 안식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복음을 들었지만 유익되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익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쉬고 안식하게 하면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과 심지어 아들까지 보내서 그 음성을 들려주셨는데, 그리고 세상 곳곳에 성경이 배포되어 말씀하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오늘도 내일도 계속 수고하고 노력하고 있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복음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안식하게 하는 것이다. 이 안식은 몸이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교와 같이 안식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서 돌 판이 빛난다는 것과 같은 더더욱 아니다. 인생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뜻 안으로 들어가므로 목적 안에서 온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내부에 계속 폭발이 일어나는 가혹한 환경에 처한 자동차 엔진은 뜨거운 폭발이 계속되지만 그것이 엔진에게는 안식인 것이다. 쉬는 것으로 치면 폐차장에 있는 엔진이 더 안식일 것 같지만 엔진의 존재 목적으로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엔진으로 설명하면 이해하면서도 자기 육신이 편해지는 것이 안식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두운 자들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육신의 평안과 안식을 안식과 복으로 여기는 것은 정말로 곤고하다. 강퍅하다는 말이 오히려 약할 지경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세상에 유효하지만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유익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안식은 당연히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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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안식에 관해서는 사실 히브리서에 많이 나온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이런 식이 아니라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많이 표현하고 있다. 안식교와 같은 곳에서 이 말씀을 어떻게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안식이 육신의 안식과 평안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육신이 십자가를 졌으니 안식과는 무관한 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이 없다는 것,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든 일의 휴식과 안식은 일이 마무리되어야 누릴 수 있다. 목적과 목표가 달성되지 않았는데 놀고 있으면 안된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그렇듯.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안식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온전해진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육신의 평안이 아니다. 육신의 평안은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속한 사람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지, 인생이 그것을 안식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다하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심에서 비롯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이란 목적이 달성되면 얻는 것이라고 직접 보이셨고, 또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온전해지지 않았는데 자기 맘대로 안식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상태와 같다. 자기가 기준을 정하므로. 또 예수님께서도 육신이 안식일에 쉬는 것을 안식으로 정하지 않으셨다. 그랬다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므로 문제를 일으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그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안식이 되고, 그 사람의 존재가 안식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안식에 들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 말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안식이 없다고 하는 것이나,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나,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처럼 수고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들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출애굽 과정에서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비단 광야의 삶이 율법적인 삶을 비유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아도 광야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안식에 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는 약속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식에 들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당연히 광야에서 죽은 안식에 들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신앙이라고 믿고 평생 수고만 하다가 안식에 들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교회라고 다니고 있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광야에서 죽은 안식에 들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답습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평생 <노력>하다가 스스로도 또 누구에게도 수고를 그쳐도 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죽어서 듣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그제서야 사람들이 모여서 장례를 치른다며 안식에 들었다고 의미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 신앙인들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또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일말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솔직해보면 자신이 예수님과 같다고 생각할 수 없고, 자신의 신앙이 안식에 들었기에 수고를 그쳐야 한다고 외칠 용기도 없음을 알 것이다. 사실 용기가 없는 것이라기 보다 근거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신앙은 언제나 더 온전해지기 위해서, 예수님 닮기 위해서, 성경을 하나라도 더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며 돈키호테처럼 노력만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 가지를 지켰어도 오늘 한 가지를 범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엄연히 말씀하고 있는데도 신앙적 수고를 그치지 않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온전해졌다면 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고 수고하겠는가? 당연히 아직 이르지 못했으니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히브리서가 안식에 들지 못한 인생이라고,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것이라고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것을 배우고 연구하겠다고 돈 내고 학교 가서 논문까지 쓰고, 그 공적으로 설교까지 하면서 자신의 그 삶이 안식에 들지 못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그런 현대인들의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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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은 온 세상과 사람이라는 육신 가진 존재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義)고 그것을 보고 또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를 가장 온전히 표현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그 모든 음성이 자신의 생명이 되어 자기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과 의를 듣지 않으면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몇 줄 안되는 문장으로 요약된 이 말씀은 사실 성경 전반을 요약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그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표현하며 대변한 사도들의 간절함에도 이것을 보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 자기의 말씀이 되지 않는다면 사실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의 의가 무의미해지는 것에 진노하신다.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의 의가 피조물에게 의미가 없어지는데 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가 진노하는 상황 아래에 있는 피조물이 평안을 누릴 법은 더더욱 없다.


이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간절함으로 권면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일에 간절하게 임한다는 것이다. 생명체가 그 생명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이 말씀이 되고 또 그 말씀이 자기 육신 곧 육신의 삶이 된 사람에게 그 말씀대로 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생명체가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필사의 수고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단순한 개인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런 생명의 본능이 없으면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이 자기 본성을 나타내는 것에는 그 본성을 알아줄 수 있는 동일한 생명을 찾는 간절함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난 존재는 같은 생명을 찾는다.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은 음성이 말씀이 된 사람을 찾는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음성을 듣고자 하는 이들을 간절히 찾는다. 그 간절함들이 모여서 공동체와 나라가 된다. 그렇게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구원 받을 이름이 예수 외에 받은 바가 없듯, 교회가 되는 것도 이러한 생명의 법 이외에 주신 것이 없다. 세상의 방식대로 경쟁하고 시험 쳐서 자격을 얻어서 세상에서 성공한 장로 두어 명과 함께 할 때 교회가 된다는 생명 없는 교리로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 세계는 하나님이 주신 법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하나님을 믿는 세계이고, 세상의 가치와 권세를 좇는 무리들일 뿐이다. 다른 것 볼 것 없다. 그렇게 모인 자들이 무엇을 기도하고,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은혜와 영광으로 아는지를 보면 된다. 그게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한 성공 아닌가? 그럼 게임 끝난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그런 교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세상에 그런 교회만 남았다면 이 세상은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가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경영하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는 온전한 교회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하나님께서 세상을 기쁘게 경영하시는 것이다.


온전한 교회는 생명으로 세워진 교회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말씀이 된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그 말씀을 나누는 곳이 바로 교회다. 그리고 음성을 듣고 그것이 말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곳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에 대한 음성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육신 곧 삶이 되는 것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망이고, 또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들이 그 소망을 가진 자들에게 음성이 말씀이 되는 본을 보이는 곳이다. 권면은 말씀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말씀이 된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이 된 사람이다. 그들의 권면은 말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음성이 자기의 말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있어 권면은 음성이 말씀이 된 삶이다. 그것을 서로 보고 그 삶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듣는다. 즉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 권면하는 것이다. 그렇게 같은 생명의 삶을 알아볼 수 있고, 서로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같은 생명을 가진 증거다. 그리고 생명이 같아야 형제다. 그리고 이 생명을 처음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맏아들이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법에서 벗어나면 서로 형제도 아니요, 생명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그것과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도 생명이 없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 아닌 것을 추구하고, 그 추구하는 소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기를 바라는 것도 예수님과 다른 생명이며,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심으로 말씀을 보이신 예수님과 달리 교훈이라며 찌르는 말과 지적질로 서로를 대하는 것은 예수님과 형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이 근간이 교회는 무늬만 교회일 뿐 그냥 종교 단체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형제로서의 권면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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