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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5장 후반부터 6장 중반까지는 신앙의 장성함과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지경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렇게 다시는 구원으로 돌아 올 수 없는 경우에 대하여 몇 번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혹시 그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염려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다시 타락한다는 것은 회복된 사람들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신앙이 아직도 율법과 외식에 머무르는 중에 회복된 다음에 있을 타락을 염려하는 것은 한 마디로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소 조롱하는 듯이 들릴 수도 있고, 나름 교회에 좀 다닌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단순하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수가 이렇게 많은 수도 없겠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전세계의 수 많은 기독교 및 천주교 신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믿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무관한 사람들이다. 산신령이나 무당에게 비는 것보다 좀 품위 있게 육신의 문제를 사람 이상의 존재에게 의탁하는 위선에 불과할 뿐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예수님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니 그들은 구원이 없다. 예수님과 아직 같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인데, 자신들은 예수님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아직 예수님과 같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력은 가상하나 안타깝게도 그런 신앙은 구원을 받은 신앙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신앙인들은 다행스럽게도 구원을 맛보고 다시 타락하여 구원을 다시 얻지 못할 지경에 이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렇다는 것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의미다. 히브리서 4장에서 말씀하신 ‘약속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게 조롱이 아니라 자신에게 감사가 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직 예수님과 같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는 모습이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 곧 죄 가운데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예수님께서 올라 가셨다는 것은 내려왔었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타락하여 떨어지려면 먼저 제자리에 올라감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에 가서 세례 받고 예배 참석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며 교회가 하자는 것에 순종하니 자신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정말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무익함이 아니라, 교회에 가서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내용은 전부 자신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과 사업과 국가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식과 자기 육신의 일에 관하여 복을 빌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믿음은 자기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라도 맘대로 행하여도 좋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지 하나님께 유익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은 단지 도깨비 방망이에 불과할 뿐 하나님을 창조주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신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경영은 온전하며 실수도 없으심을 믿는다면 왜 자기 육신의 일을 걱정하고 또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간구하겠는가? 그런 것을 기도하고 간구하고 또 그것을 이루려면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에 미혹되어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내려 하고, 또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애초에 문제가 있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나 경영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신으로 믿는 것이며 무엇보다 순종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다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타락은 나중에 걱정하고 먼저 자신의 신앙이 지금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돌아봄이 먼저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과 자신이 일생동안 기도하는 것을 비교해 봐야 한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육신의 삶을 어떻게 하시더라도 괜찮다는 의미다. 과연 사람들의 신앙이 그럴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끝임없이 육신의 문제 해결, 자신의 육신이 바라는 것을 구한다. 그것을 성경은 육신의 정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을 외식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타락하는 지경에 이르는 일이야 절대로 없어야 하겠지만 그런 것을 염려하기 전에 먼저 구원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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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순종으로 멜기세덱의 반차에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이전에는 제사장이 아니었다가 그 때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대제사장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전부터 계셨고, 아브라함 때의 멜기세덱 역시 제사장이라는 정체성(the Priest)이 나타난 사람인데 그 정체성의 본질이 바로 예수님의 육신이 된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순종이 멜기세덱에 속하심을 보였다는 것은 예수님의 순종이 구속의 제사가 되었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고난에 순종하신 순종이 사람들의 구속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살아도 예수님의 구속이 유효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에 어떻게 순종하는 것인지 본이 되시므로 육신을 가진 인생이 예수님의 순종하심을 또한 순종하므로 안식에 들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순종하셨다는 것에 대하여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바로 알아야 한다. 모르는 것에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거나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순종에 대하여 큰 오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을 보고, 육신을 가진 사람들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엄청난 사명감과 각오와 인내로 이루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예수님의 순종에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단지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육신의 고통으로만 봐도 예수님 이후의 사도들도 예수님 이상의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되는 죽음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순종은 육신의 고통을 신념과 사명으로 감당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과 사도들의 보여준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에 그 대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해야 할 것은 그 육신이 고통 당하는 모양과 방법이 아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이유와 또 순종할 수밖에 없는 본능이다.


예수님의 순종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내가 아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것을 참아야 한다는 신념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순종은 그리스도라는 그 본성에 이끌림이다. 사람이 부모가 되면 자식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본능이다. 부모가 되는 순간부터 그 본능이 자식 앞에서의 모든 희생과 헌신을 이끌어 내는 순종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순종도 신념이나 목적(숭고한 목적이라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이끄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순종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의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자기들의 하나님과 그 아들의 정체성에 앞에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의의 충돌 시 자신의 의를 내려 놓고 상대의 의 앞에서 죄인이 되는 본성이라는 것이다. 상대의 의 앞에 자신의 의를 내려 놓으면 즉시 죄인과 실패자가 되고 그 결과 종과 같이 되는 것이 세상의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일 뿐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일 아니라는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끄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신념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다. 본성이 이끄는데 이길 재간이 없는 것이 바로 육신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몸소 보이신 것을 인함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순종, 육신은 의의 충돌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내려 놓으므로 종과 죄인이 되어 수고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그리고 그 순종을 본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육신의 삶을 받은 의미이자 목적이며 우리 인생의 존재 정체성임을 깨닫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신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에 이끌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는 자신이 아무리 불순종하려고 해도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속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고난을 순종하신 것이라고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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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5:1-10) 고난을 순종한 하나님의 아들

Category : 카테고리 없음 Date : 2020. 1. 30. 04:00 Writer : 김홍덕


특히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에 속한다. 이는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주셨고, 이 육신의 장막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살기 때문이다. 즉 이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가 신앙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온전하게 보신다. 창세기에서 심히 좋았다고 하심은 물론이고, 이 육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다면 하나님은 결함이나 실수를 하신 분이고, 예수님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우리가 가진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은 온전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다.


반면에 사람들의 생각은 반대다. 육신을 부정하게 여긴다. 부정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자기 행실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 노력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든 미신을 믿는 것이든 모두들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늘 노력한다는 것이 자신을 부정하게 보는 것이고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온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감사할 것이지만, 자신을 부정하게 여기기에 자신의 삶이라는 형식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에 감사하고, 그런 감사를 하려고 간구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아니어도 충분한 논리다.


특히 육신의 고난에 대한 생각은 더 그렇다. 사람들은 육신의 삶이 곤고해지는 것을 재앙으로, 하나님의 징벌로 여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 고난에 순종하셨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 예수님께 자기 육신의 삶의 곤고함을 없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그렇게 해 주시리라 믿는다는 것이다. 이건 신앙을 떠난 논리의 모순인데 이런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어둡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의 고통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는데 사람들은 자기 육신이 고난에서 벗어나 평안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여기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려고 하고, 그것을 연구했다는 신학을 한 사람에게 그 방법을 물으려고 매주 헌금을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아들이심을 보이셨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 믿고 그렇게 되기를 고난에 순종하신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로 예수를 믿으면 당연히 예수님과 무관한 존재가 된다. 아무리 “주여! 주여!” 외친다고 해도, 또 자신들의 신앙 가치대로 추구하여 육신이 평안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회 칠한 무덤이고 선지자 노릇일 뿐이다. 더 핵심적인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써의 구속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동질성과 접점과 무엇보다 방향성이 다른데 예수님의 구속이 자신의 것이 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시고, 그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인생을 소비하는 본성이 이끄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고 본을 보이신 것이다. 그 육신의 삶의 소비가 인생들의 눈에는 고난으로 보이고, 또 육신이 쇠약해지고 수고하는 것이니 형식으로는 고난 같아 보이지만 정말로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성이 되어 예수님께서 고난에 순종하심과 같이 우리도 육신으로 그와 같이 순종하면 장차 다가올 영광과 육신으로써의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의 구속, 대제사장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 그 구속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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