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히브리서는 제사장은 사람 중에서 세우는 직분이라는 것을 언급한다. 이러한 도입은 대제사장으로써의 예수님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앞서 4장에서 안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의와 목적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이라고 권면한 것에 이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이 우리를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는 안식을 이끄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제사장의 직임은 자신도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연약함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4장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라고 하심과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은 결국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을 구속하러 오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과 우리와 동일한 육신이라는 동질의 접점이 예수님의 구속이 우리에게 의미, 아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가서 안식하게 하는 동질성이자 관계성인 것이다.


이와 함께 예수님 이전의 모든 대제사장들 또한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 가운데서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해도 그 직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설정한 제사장이라는 신분의 정체성이 멜기세덱으로 나타났던 것과 같이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은 하나님께서 정한 직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라는 것은 그 직분의 정체성, 쉬운 말로 개념과 존재 목적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사람을 기준으로 정하신 것이기에 사람이 제사장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도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는 것 같이 그리스도나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사람을 통해서 그 직분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분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우셔서 사람의 연약함을 용납하게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에 적합한 존재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연약하게 지으신 뜻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양 같이 끌려가서 달리셨다는 것으로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것이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 연약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기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히브리서 5:1-10) 멜기세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1. 28. 10:23 Writer : 김홍덕

히브리서 5장에서부터 8장까지는 제사장과 멜기세덱이 많이 언급된다. 엄밀히 말하면 4장 14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멜기세덱은 창세기 아브라함의 때에 나타난 인물인데 히브리서에서는 부모도, 시작도, 생명의 끝도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다. (7:3) 이 언급대로라면 한 마디로 육신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기세덱이 하나의 반차(just like Melchizedek) 곧 혈통이나 계열을 형성한다고 하는 것은 실존적 존재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유독 히브리서가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약속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약속’은 계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뜻이 피조물에게는 약속이 된다는 것을 앞서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가지신 의와 뜻이 사람에게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약속과 멜기세덱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약속의 한 측면인 것이다. 그리스도신 예수님은 하나님 약속의 표상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그리스도의 의미에서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곧 대제사장이시기도 한 것이다. 이는 멜기세덱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한 존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다는 것.(You are a priest forever just like Melchizedek.)도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이 멜기세덱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한 하나님 뜻의 실존이자 표상인 예수님께서 제사장이심을 의미하는 “the 제사장(Priest)”를 의미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고 멜기세덱은 실존 없는 제사장이라는 개념으로만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the Christ의 실존(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이심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을 대변하는 실존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the Christ라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내심과 같은 이치이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멜기세덱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대제사장이라는 개념이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현현한 것이라면, 히브리서에서는 “the Priest(제사장)”이라는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각과 약속이 예수님으로 나타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대제사장의 구속이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신 구속은 멜기세덱으로 표현된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멜기세덱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려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만난 멜기세덱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구속의 역사, 대제사장으로써 이루고 보이시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멜기세덱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 멜기세덱을 발견할 수 없는 관계라면 예수님과 멜기세덱은 연관성이 없다. 또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려 하신 대제사장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하나님 생각의 표본이고, 예수님은 멜기세덱으로 나타나는 제사장이라는 정체성의 본질인데 그 예수님을 보고 멜기세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것과 같이 젖 먹는 어린 신앙이거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멜기세덱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써 이루신 구속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멜기세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두를 구속하신 제사장적 직임에 대한 상징적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5장 처음에 대제사장에 대하여 시작하면서 그것이 사람에게 났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것인데, 제사장을 세우신 하나님 계획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대제사장이심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또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하여 아신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Logos)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 그의 계획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에 큰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의 중심에 있는 것, 행동의 근원이 되는 의와 본성을 본질로 보시고 그것에 관심이 있으시다. 생각해보라. 사람의 하는 행동과 그 결과 중에서 하나님이 하시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사람의 행동이나 그것이 가져올 결과 중에서 하나님께서 놀라실 만한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다 아신다. 사람이란 존재가 가진 육체적, 정신적 모든 능력을 아신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을 의로 삼을지에 대하여만 비워 두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그릇이라고 하시는 이유다. 그리고 순종을 강조하시는 이유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여 자신 안에 하나님의 의를 담든지, 아니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자기 의로 삼고서 살든지 그것은 사람에게 맡기셨다. 이런 하나님의 허용이 없었다면 선악과의 문제 같은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고 그것을 자기 존재 목적으로 삼고 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하나님 외에는 모르는 로봇이나 아바타와 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 두셨다. 그래서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순종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지, 못 먹게 한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신다는 것은 여기까지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자기 의대로 살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도 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다. 4:12절의 말씀이 Logos가 사용되었다는 것에서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가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 안에서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으로 이어간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사를 받으시는 분과 하나가 되게 하는 중재자다. 사람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 양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양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 안에 제물과 같은 마음과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제사다.


모든 제사의 기본인 번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죄사함에 대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먼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았다는 시인과 고백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더 중요하나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이제는 무엇이 순종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뜻인지 알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 때만 시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있어 유일하게 선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선행되고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시기 위하여 보이신 것을 우리의 본질로, 나의 정체성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인생을 주신 목적으로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것을 고백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자기 생각에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해도)을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앞서 권면 받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다하는 것, 그 도리를 굳게 잡는 그것이 바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믿는 도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니 그를 믿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인생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듯이 힘든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 뿐이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과는 전혀 결이 다른 말씀이다.


사실 많은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삶의 의미와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으로 새롭게 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대하는 것에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 성경을 어떤 행동으로 철저하게 지켜내야 육신의 삶이 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될 것인지를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정말로 눈 뜨고 제대로 보았다면 분명히 예수님은 세상에서 패한 자, 그것도 약간의 실패자나 순간의 실수를 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한 실패자인 사형수가 되셨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실패자의 자리가 하나님 아들의 정체임을 보이심은 물론 예수님을 믿으려면 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데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자기 신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믿는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시기 위하여 보이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표본이고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을 설명하는 유일한 본이라는 것이다. ‘도리’란 사람이 해야 할 가장 마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에 순종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에게 있어 자기 존재의 목적에 속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안식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의 내용을 OFF-LINE에서 함께 나누실 분을 모집합니다.


모집 지역은 대구, 서울 입니다.


적정한 인원이 모이면 별도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아래로 연락주십시오.

e-Mail : elphis@kakao.com  /  phone : 010-3396-555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