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이야기 같지만 안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보자. 안식을 육신이 무엇을 하지 않고 쉬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즐기는 것 즘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 일반적이다. 대표적으로 안식일과 그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을 땀을 흘리지 않는 것, 더 나아가서 땀 흘린 소산을 지불하지 않는 것과 같이 여기기도 한다. 주일(안식일과 다르지만) 돈을 쓰지 않는다는 식의 개념이 그것이다. 이런 곤란한 계명들의 뿌리는 결국 육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그런 어리석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이 그것이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오늘날도 주일날 혹은 안식일이라고 여기는 날에 돈을 쓰거나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회사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듯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믿고 가르치고 지키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런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을 육신의 어떠함, 눈에 보이는 것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은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궁극적인 질문이 있다. 그것은 안식일이 육신이 쉬는 것이라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육신이 쉬고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극한의 고통의 자리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느냐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거짓말인지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안식에 대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들춰 내신 것이다.


특히 안식일을 달력의 특정 요일로 규정하고 그 날에 경제적 활동과 같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식을 빙자하여 마음의 일을 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칭 정통이라는 교회에서 주일이라 칭하는 일요일을 대하는 태도 역시 동일하다. 이단이냐 다른 종파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현상은 종파나 이단이나 정통이라 동일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와 형식을 본질로 보는 외식하는 신앙의 산물일 뿐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께 책망하신 외식하는 신앙을 가지고 자신들을 정통이라고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고 정통이란 개념을 도둑질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육신이 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라면 히브리서가 말씀하시는 대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육신이 쉬는 것이므로 예수를 믿는 순간 직장에서 은퇴해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몇이든. 따라서 안식이라는 의미를 육신을 기준으로 찾는 것은 자신이 어두운 신앙 안에 있음을 감추려다 들통이 난 꼴이다. 진정한 안식은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삶에 대하여 의미와 목적을 회복하므로 육신의 삶에 무관하게 평안과 감사와 만족을 누리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존재 정체성이라는 의에 관한 것이다. 존재의 목적, 그것에 관한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는 안식은 일을 끝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안식에 들어가면 일이 끝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일이 육신의 일이라면 하나님을 믿어 안식에 들어가면 육신의 모든 일에서 은퇴해야 이 말씀을 문자대로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심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십자가를 육신으로 지시는 엄청난 일도 하셨다. 이 말씀들 앞에서도 안식을 육신이 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문을 던진다. 먼저는 길게 설명한 바와 같이 안식은 육신이 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식은 우리가 목적에 부합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생의 목적이 자기 삶의 본능이 되는 상태가 바로 안식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안식이 육신의 쉼이 아니라 존재의 회복이라는 것에는 존재가 회복되는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존재가 회복되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육신이 은퇴하듯 쉬게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 육신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이유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안식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의 의도는 유대인들의 외식적 율법에 훈계하고 저항하는 것 이상으로 해석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일을 끝내고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안식의 본질인 예수님을 보고 인생이 자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일을 끝내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육신이 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시기까지 육신으로 수고하심과 같이 그리스도의 본능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안식인 것이다. 이것이 본성에 기인하여 사는 삶이기에 거듭남이라고 하고, 본성을 표현할 형식이 있어야 하기에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다. 그런데 안식을 특정한 날을 안식일로 정해서 혹은 주일로 정해서 육신이 쉬는 것이다?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초등학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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