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히브리서는 히브리인이라는 사람들, 즉 인생의 큰 물(말씀, 의, 율법)을 건너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리에 이른 사람들에게 대한 간곡한 설교이고 한 편으로는 모든 인생들이 온전한 히브리인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말씀이다. 세상의 모든 집과 모든 물건이 지은 이와 만든 이가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에서 우리의 인생과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계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도 그 생각을 깊이 한다면 인생의 존재 목적을 예수님을 통해서 찾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특히 하나님의 이런 간절함을 외면하지 말라고 여러 번 강조하신다.2장 1절의 염려가 그렇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3장 1절이 또한 그렇다.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스스로가 역량을 갖추기를 간절히 권면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부모자식이라는 제한된 특수성과 같은 사례가 아니라 모든 사람,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에게 있어 이 권면은 절대적인 명제다. 


특히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이 그 존재의 목적과 창조주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귀한 자아인식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차조와 경영과 권위를 만홀히 여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한 인생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간혹 부모에게 존재의 원인을 두고자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부모도 스스로 존재하게 되지 않은 동일한 존재다. 창조주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고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다.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아를 인식하게 하시므로 충분히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음에도 자가발전과 같이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닌 자기 안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누구나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면서, 인생의 목적을 자기 안에 있는 능력이나 꿈에서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본좌 같은 생각임에도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 마음이 강퍅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께서 진노하는 것이다. 엄연히 창조하실 때 뜻하신 의가 있었고, 또 존재에게는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아는 것이 가장 근원되고, 가장 귀한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생각치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생각할 때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부여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에 부족함이 없는데도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이를 찾고 스스로는 알 수 없는 존재의 이유를 듣고 그것에 순종해야 하는 은혜를 버리고 대신에 자기가 조성하지 않은 인생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같은 것이라고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다. 사실 출애굽의 여정은 인생이 하나님의 약속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찾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준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은 존재 목적을 회복한 인생의 삶이 얼마나 풍요한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이 인지하기도 전에 사람에게 두신 뜻이 사람에게 하신 유일한 약속이고, 땅이 곧 사람이기에. 


출애굽의 여정은 인생이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하까지 얼마나 순종하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 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독립 여정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광야를 지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말씀이 아직 성경에 있는 것이다. 이제 광야를 지나는 사람, 광야에서 불순종하는 사람이 없다면 성경에 그것이 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광야에서의 불순종은 오늘날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렇다면 누가 나를 조성하셨는지, 그리고 왜 조성하셨는지를 찾기 전까지의 인생은 광야에서의 불순종의 여정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그 불순종의 광야를 거쳐서 순종하는 백성이 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오늘도 우리에게 온 세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이 땅과 같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그 음성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을 히브리서가 간절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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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집이 지은 주인이 있듯이 이 세상도 지은 이가 있고 그 지은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집에 충성한 두 사람을 이야기한다. 주인이 있는 집에 충성한다는 것은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것이고,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주인의 의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순종하고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충성은 믿음 곧 순종과 하나다. 하나님이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의를 자신의 존재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은 사람의 믿음이고, 그 믿음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순종하여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고 나타내니 충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충성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아들들이 지으신 이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모든 것으로 수용하고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 모습은 충성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의 원어 해설들을 찾아보면 믿음을 의미하는 피스티스(πίστις) 와 충성을 의미하는 피스토스(πιστός)는 동일한 어원으로 같은 단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과 같이 하였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그 본성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충성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모세가 온 집에서 충성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에 충성했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충성이니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것이 하나님의 모든 것에 충성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씀 중에는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아들로 충성하였다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아들로 충성한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소망과 자랑을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집에 속한다는 것은 집에 거주한다는 말씀이라기 보다 모든 집에 주인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인생이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충성이 자신의 소망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 주목해 볼 것은 모세는 장래의 일을 위하여 충성하였다는 말씀이다. 모세의 충성은 장래 일에 대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세의 충성이 그리스도의 충성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증거는 일이 먼저 있고 나오는 것이다. 장래의 일이라고 한 그리스도의 충성은 모세보다 많은 세월 뒤에 나타난 것인데 히브리서는 장래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먼저라는 의미이다.


성경의 이러한 시간 개념은 자주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신 말씀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 가장 근원적이다. 이것은 달력으로 시간을 지키는 신앙인들, 카이로스가 아닌 크로노스의 시간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는 않는다. (어쩌면 그런 것이라도 솔직해야 온전한 믿음으로 가는 가능성이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로노스적인 시간, 달력과 같은 객관적 시간 개념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시간은 언제나 주관적인 시간이라고도 하는 카이로스적인 관점이다. ‘증거는 사후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달력의 시간(크로노스의 시간)이지만 증거는 어떤 계획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계획이 증거보다 먼저인 것이다. 아브라함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계셨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초에 함께 계셨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충성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아내는 결과로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증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달력의 시간으로는 모세보다 예수님이 나중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먼저 계신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뜻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모세의 충성이 장래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이 먼저인데 달력으로 예수님께서 나중이므로 장래의 증거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적 개념을 넘는 깊은 의미가 있다. 아브라함의 순종, 모세의 충성과 같은 모든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표현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시겠다고 하신 계획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아브라함의 순종으로도 나타나고, 모세의 충성으로도 나타나는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지켜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으면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다. 생명의 본성이 그것이다. 그런 삶은 그리스도와 닮음이 증거되는 것이다. 모세의 충성이 장래의 증거인 것과 같이. 이것이 성경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본질적 관점은 우리의 존재 정체성에 직결되어 있다. 즉 깊이 생각하라고 한 예수님의 정체성, 그것을 말씀과 같이 깊이 생각하면 이 말씀들이 지켜서 그리스도가 되거나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그 뜻하신 대로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았다면 흔히 유전자라 말하는 본성이 있을 것이고 그 본성은 감출 수 없는 것이다. 그 본성을 성경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유전자에서 비롯되는 행동과 표현이 되는 것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책이니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자랑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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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1-6) 지으신 이의 생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1. 5. 04:00 Writer : 김홍덕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감상에 젖거나, 아니면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성취를 위해 육신이 바라는 일에 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게 또 예수님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을 깊이 있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신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 철학인데 그것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는 그것이 바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히브리서는 사람들의 집을 비유로 도입한다. 집은 내부에 거주하기 위하여 짖는 것이고, 당연히 내부에 거주할 사람이 있어 건축하는 것이다.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집이 그렇듯 사람도 지으신 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 사람 역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그 안에 무엇이 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외모에 의하여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과 본성 그리고 유전자에 의하여 정체성이 결정되는 존재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육신으로 나타나므로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결정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므로 그 육신의 삶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며 창조하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거하기 위하여 집을 지으면 그 집에 거하려는 사람이 주인이듯, 사람 역시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지었으니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삶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믿는 것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서 주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삶을 사용하실 때 온전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육신을 덜 움직이고 수고를 적게 하면서 더 많은 일을 이루어 낼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세상의 가치가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은 이기고 성공한 자의 모습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혼합한 것이고, 세상의 가치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어떤 분야든지 기본을 잘 지키는 것이 사실 모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또 세상을 만드시고, 그 전지전능하심으로 온전하게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정말로 온전히 믿는다면 사람이 할 것은 순종 외에는 없다.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세상을 경영하시는데 사람이 나설 일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늘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기도한다.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이라 신앙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세상을 고쳐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무능하거나 무관심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순종 대신에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은 육신을 소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세상에 문제가 많다고 여기는 것은 육신이 편하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육신을 소비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육신이 평안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세상의 형편이 그렇지 않으니 이것이 개선되어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온전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이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이들이 보기에 순종하기 힘들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 육신이 종이 되고 수고하여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의 방증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좋은 환경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를 바라심이다. 반면에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2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죽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은 바로 그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운 앞에 나를 내어 줄 때 드러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셨다. 예수님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라고 히브리서는 앞서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고 하면서, 이 세상을 지으신 주인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의 의를 깊이 생각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를.


그러면 어떤가?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자, 곧 육신의 정욕을 좇는 자들이 하나님께 세상을 고쳐 달라고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하여 그 성품을 표현하실 일이 많은 세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신 뜻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세상은 자기 육신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이 상실되더라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두려움을 몸소 지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뜻을 보이신 그 구속함으로 얻은 우리 정체성 대로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언뜻 하나님께서 고의로 세상에 죄를 넘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이들이 그 성품을 드러낼 터전으로 삼으신 것으로 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두 가지를 모른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심이 육신으로 창조하신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회복되는 과정이 진정한 창조라는 것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의로 충만하여 죄가 넘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상태가 흑암이 혼돈한 상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창세기 1장도 열리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의가 있어 사는 사람의 삶을 모른다. 그 감사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지 않았으니 창세기의 태초가 열리지 않은 것이고, 그런 관점으로 보니 세상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온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나타내시려 세상에 죄를 방치하시거나 더 나아가서 조성하시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의 주인이 어떤 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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