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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좀 다녀보았다면 한번쯤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요즘 일상화되어 있는 SNS와 같은 곳에서, 또 설교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아니면 하자고 독려하고 상기시키고 외친다. 그러면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도무지 무엇인가? 예수라는 단어나 이름, 아니면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에 사로잡혀서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을 눈물이 날 정도로 생각하자는 것인가? 대부분은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고 그냥 그러자고만 외친다. 그것은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앞서 구원에 대하여 들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2장을 시작하고 이어서 그 구원의 본질적 정체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고 그 의가 자신의 본성이 됨에 순종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것은 스스로 의를 가지고 선악 간에 판단하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과 사람과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자신의 의를 가지고 판단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육신으로 나서 자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선악의 기준을 버리면 죽는 것이라고 여겨 그것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런 인생들에게 자기의 의를 버리므로 당하게 되는 죽음 곧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몸소 보이시므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즉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당하는 모습을 몸소 보이시므로 그 두려워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사람들이 평생을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삶의 목적이자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임을 확정하셨다. 


히브리서가 생각하라고 하는 예수는 바로 이 예수이다. 이 예수는 정말로 생각할 것이 많고, 그 생각함에 깊이가 무궁하다. 사람의 존재 목적과 또 사람이 그 존재 목적을 회복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과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셨으니 그 십자가를 묵상하므로 그 모든 생각과 묵상이 자기 삶의 근원과 본질 곧 생명이 되는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정말로 간단하게 줄인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생각하므로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의 본질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생각하므로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깨우치라는 것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


히브리서는 이에 대하여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다) 그것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들아 예수님을 보고 너의 존재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니 예수님을 깊이 상고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존재 정체성이 무엇인지, 왜 육신 가진 인생을 살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것도 심각하고 깊이 있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니 육신이 잘 되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일에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행하여야(How to do?) 자신이 바라는 것이 잘 이루어져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칭찬해 줄지,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지를 고민하면서 그 고민을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안 하면 50점이라도 될 텐데 할수록 죄가 쌓이는 꼴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행하는지에 관심이 없고(행함을 의롭게 여기시거나 겉모습으로 판단치 않으시며), 육신이 평안하고 성공하는 것을 복이라 생각하셔서 사람에게 베풀지도 않으며(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육신이 고통 당하시므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셨으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사에 질려서 누가 성전 문을 좀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실 정도로 싫어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본성으로 담고, 그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에 육신을 소비하기를 바라시며 인생에게 육신 가진 삶을 주셨는데 그와 반대로 육신을 보존하고 평안하고 육신이 바라는 것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이라며 그것을 생각하고 바라는 것을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 기쁘실 리가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좇아 육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순간 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육신으로 인생을 주신 뜻이 무엇인지, 이 삶에서 예수님이 어떤 의미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 생각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의 구속, 인생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몸소 보이신 예수님의 일을 더불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만물에 지은 이가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씀으로 인생을 지으신 이가 있다는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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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사망과 죽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시다. 이 구속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가진 생각과 같이 사람들이 무서워하니 사람들 대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구속하신 것이 아니다. 버스 차비 대신 내어주는 것 같은 구속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죽음과 사망이 세상의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본질이라는 것을 직접 보이시므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도록 직접 그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속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옳다는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본체이자 아들이시니 세상에서 더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정립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아니라면 십자가에 달아버린 주장에 자신을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무너지는 것을 몸소 보이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진정한 아들의 모습이고, 기뻐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그 예수님의 모습을 인생의 정체성과 목적으로 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들로 여기시는 모습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인생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스스로 옳다는 것을 버릴 때 나타나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 이상 낮아지는 것이 없고, 그것 이상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 아들임을 보이심으로 그것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것을 알게 되도록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구속은 자신이 스스로 의를 선택하고 주장하고 고집할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인 사람에 대한 구속인 것이다. 스스로 의를 선택하지 않고 본능을 좇아 사는 동물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구속이며, 자신의 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도구로 나타나는 천사 역시 예수님 구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사람,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자신의 순종하는 의에 사용하는 유일한 사람을 구속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이 구속이 유효하게 되는, 그러니까 예수님의 구속을 받는 것은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생과 같이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을 구속하려 십자가를 지셨으나, 그 구속을 받는 사람은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아니 그 구속을 자신의 것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모든 인생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은 이렇게 우리가 가진 문제에 대한 답을 직접 보여주시는 구속이다. 죄는 사람이, 벌은 예수님이 받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나서 지은 죄는 어떻게 하느냐를 궁금해하고, 구원을 받았는데 또 죄를 범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하는 것은 죄는 행위로 범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구속은 사람이 행위로 범한 죄에 대한 벌을 대신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시간차 범죄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형제와 같이 되심이 마땅하다고 하심(히 2:17)도 예수님의 구속은 우리가 가진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동일한 육신으로 답을 보이셨기 때문에 그 구속을 보고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여 하나님이 같은 아버지인 생명이 된 형제라 칭함 받는 모든 사람과 같이 되심은 너무 마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노력할 뿐’이라는 신앙이 얼마나 구원과 멀고 예수님의 구속을 저 버린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우리가 동일한 생명을 가졌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우리도 같이 갈 수 없다면 구속도 없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이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의 앞에 육신을 내어주는 것이 인간이 존재 목적임을 보이시는 구원의 길을 보이셨는데 육신을 보전하고 평안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며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방법도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닐 뿐더러 예수님의 구속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죄를 또 범하는 것이기에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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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예수님과 형제가 된다는 것, 같은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사망의 세력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이라는 것은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정하시는 사람, 즉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아울러 사망은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마귀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다. 육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마귀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결을 달리하는 말씀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하나님의 의가 없는 상태가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육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마귀의 장난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귀의 세력에 매인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를 구속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구속하시는 대상이 누구인가? 바로 마귀에게 매인 사람이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을 구속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고, 마귀에게 매인 사람이며,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는 앞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에서 보듯 죽음도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의의 충돌에서 자신의 의를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네가 옳고 내가 죄인이라고 말하고 받아들이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그 속에 육신의 목숨을 잃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나의 옳음을 버리고 상대의 옳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로 상황에 따라서는 육신의 목숨도 내어 놓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이 그것이다.


성경은 육신의 목숨을 죽음의 본질이라 말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보통의 일은 분명히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서 사람에게는 육신의 목숨보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가 죽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든 문제라는 것이 증명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 곧 자기가 옳다는 것을 버리거나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의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옳다는 것의 상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선악과다. 어떤 것을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하려면 그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의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지 않았는데 의를 가진다는 것이다. 의는 존재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부엌칼의 의로움은 음식을 만드는데 잘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엌칼을 음식 만들 때 사용하겠다는 목적은 부엌칼 스스로가 가지는 것이 아니다. 대장장이와 그것을 사는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의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버리지도 못하고 빼앗기면 안된다는 의를 스스로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어이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하나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었더니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만든 세상과 사람과 사람의 일을 판단하는 의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목적 안에서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니 그것이 바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결국 자기 의를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귀에 속한 사람이요,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구속하시고자 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의가 세상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를 버린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쓸모 없는, 말 그대로 죽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는 것이 세상에 속하였다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권세에 사로잡혔다고, 마귀에게 잡혔다고 하심도 사람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온 자기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는 것은 죽는 것이기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임을 당하신 분이다. 어떤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임금이 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생각에, 가난한 자는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유대인들이 가진 그들의 의 앞에 옥합 안에 갇혀 있던 향유가 옥합이 깨어지므로 향기로 드러나듯 예수님의 육신을 내어 주시니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신 것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의의 판단 앞에 자신을 내어 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인 것이다.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 자신을 제물로 내어 놓으신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이상 온전할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 의의 본체이시고, 그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람의 의 앞에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는 것을 버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구속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의를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의의 본체이심에도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 주셨는데, 자기가 옳다는 그 하찮은 것을 버리지 못하여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생들의 본이 되심이 구속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신앙은 내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악하나 하나님은 온전하시니 그 온전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말씀은 절대로 굽힐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사수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고 큰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1”도 모르는 어두움의 산물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것을 버리는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의도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삶에서 사람들끼리 다투고 갈등하는 모든 것은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주장에서 밀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밀리면 상대가 주장하는 의로움 대로 자신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종이 되고, 때로 수고와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싫은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생들이 두려워하는 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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