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2장에서 룻과 보아스의 관계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전형적인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풍요롭게 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DO) 그것을 인하여 마음이 동하여 사람을 축복하시고 그 축복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세상에서 더 잘 살게 되는 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여긴다. 이것이 일반적인 신앙의 프레임이다.


룻의 모습도 충분히 그런 각도에서 볼 수 있다. 룻이 그 시모에게 한 일을 비롯한 선행을 보아스가 듣고 그것을 선히 여겨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큰 오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이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행동 이전에 행동의 목적과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을 이끄는 본성도 있다. 행동 이전에 선행되는 것이 있고, 행동은 어디까지나 종속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행위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심령을 보신다는 의미다. 이는 사람의 행위는 그 속에 있는 심령의 의와 목적과 심령의 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행동을 인하여 속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지키는 것은 다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 심지어 죽어서의 복락까지를 하나님께서 담보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즉 자기 육신의 정욕이 먼저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신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지키면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는 이생에서의 자랑과 죽어서의 복락까지 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떠나갔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높아지려 하나님을 믿는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낮아진 자리인데 그 십자가를 의지해서 세상에서의 시험과 성공을 이루려 하는 이 완벽한 모순 속에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에 기만당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따라서 자기 육신의 정욕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고 그 목적이 성경을 지키는 행위로 나타나고 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전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신앙 안에 있으면서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을 보는 시각을 사진기 렌즈처럼 굴절시킨다.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세계, 은혜의 삶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성을 좇아서 살게 된다. 성경을 지켜서 의로워지고 그로 인하여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하므로 그 생명으로 거듭나므로 그 생명대로 사는데 그 삶을 보니 성경에 이른 대로 살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아니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생명으로 났으면 그 생명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듭났으니 그 생명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궤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마차가 말을 끄는 것이다.


룻의 삶도 같은 관점으로 봐야 한다. 물론 이것도 그렇게 볼 수 있는 생명과 그 생명의 안목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삶이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 그 행위를 이끌어 내는 본성이 먼저라는 보는 관점이 노력에서 비롯될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룻의 이야기를 룻의 행위가 보아스에게 은혜를 이끈 것이 아니라, 룻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나오미의 마음에 자신의 삶을 순종하므로 그로 인하여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미를 베들레헴에서 성실한 삶으로 이끌었고, 그것을 보아스가 알아 본 것이다. 나오미의 행위를 이끌어낸 본성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아스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신 이가 알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룻이 이삭을 줍는 것은 율법이 정한 법이다. 룻은 그 계명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룻이 보아스의 은혜를 입게 되는 과정을 단순하게 룻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다. 룻의 성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떠난 시모 나오미의 삶을 보고 자신의 삶을 그에 순종한 룻의 순종을 기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룻을 주관하므로 성실한 삶을 살게 한 것임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룻의 성실이 마음이 먼저였다는 것을 볼 수 있으려면 당연히 그것을 보는 사람의 생명과 안목 역시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이끌어내는 생명의 본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이어야 룻의 행위가 그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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