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10-32) 제자들의 배신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25. 11:45 Writer : 김홍덕

향유옥합 사건은 계속 이어져온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괴리를 증폭시켜 현현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향유옥합 사건을 보고 이 예수는 육신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확신하고 결정을 내린 것은 가룟유다였다. 그가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팔아 넘겼다는 것은 자신에게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정리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외형적으로 동일한 배신 같아도 베드로는 그 마음에 끝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놓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과 개념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와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고 그것을 알고자 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자리까지 따라 갔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인 배신의 모습이 단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쉽게 이야기 한다. 의리 없는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그나마 그들이 그것을 돌이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의 배신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른 그리스도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 곧 육신의 문제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처한 정치 사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그들이 믿고 기대한 그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예수님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는 존재라고 말씀을 하시니 이 괴리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괴리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배신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 아들이라는 그 존재가 자신들을 버린 것이다. 그릇된 개념의 하나님 아들이 자신들을 버렸고 그렇게 버림당한 자신들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실 때 그 하나님이 바로 제자들이 스스로 만든 우상이자 하나님인 그들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즉 자신들은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세상의 문제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 그렇게 믿었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니 그들이 믿었던 메시아에게 그들은 배신을 당했고 예수님을 자신들이 생각한 메시아라고 믿었는데 그런 존재가 아니니 그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배신이라기보다 오히려 고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요한복음 21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 스스로가 예수님을 육신의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고 3번이나 고백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제자들과 같은 과정이 있느냐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느냐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교회에 가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과 같이 흙으로 지음 받은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지,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하여 자기 육신이 수고하고 소비되고 심지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지, 아니면 그와 반대로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도모하는 일의 성공과 자녀를 비롯한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이긴 자가 되기를 기도하는지 돌아볼 일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배신이 고백으로 보일 것이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배신이 육신의 안녕을 위하여 배신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 사이에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묵상하고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앞에 솔직할 수 없다면, 그래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고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히 신앙의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니라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생은 그 자체로 허무한 인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향유옥합 사건을 통해서 자신들이 기대한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찬 중에 예수님께서 누구 하나가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할 때 모두 자신이 아닌가 염려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혼돈 가운데 있었다. 마치 창세기 시작처럼.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이때까지 부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랬는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찔림마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들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것이 더 문제인 것이다. 정말로 제자들과 같은 마음이 들었다면 아마도 죽고 싶을 만큼의 심적 갈등과 고난의 여정을 겪을 것이다. 그게 하나님이 만든 사람의 온전함이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겪는 갈등과 괴로움을 이것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다.


성경은 모두 언제가 되었든 그것을 읽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신의 모습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들이자 그리스도가 같은 모습인지를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개념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을 기대하신다. 육신과 세상을 살 동안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얻고 이루는 것을 은혜와 성공이라고 여기며 그 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과 그 문제 해결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관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자리를 떠난 죄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이다. 


이것을 알고 보면 이 제자들의 부인함과 배신은 그들의 흑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르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비추어보게 하는 거울과 같은 말씀이다. 제자들의 부인과 배신이 오늘 나에게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존재가 그리스도라 굳게 믿었던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부인, 그렇게 덧입혀 놓았던 예수님을 부인하는 과정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기에 오늘 우리도 그러한 부인함과 배신이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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