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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1-5) 엘리멜렉의 이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룻기 Date : 2019. 11. 3. 21:30 Writer : 김홍덕

룻기의 시작은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고향 베들레렘을 떠나 모압 땅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성경은 엘리멜렉이 왜 이주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이방인의 땅인 모압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두 아들이 장가들어 이방여자인 모압인을 아내로 두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성경말씀의 주된 흐름에서 보면 아주 어리석은 선택이다. 이방인에게로 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이 이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지 룻이 며느리로서의 효심, 마치 조선시대 열녀와 같은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것에만 주목하고 그것이 룻과 룻기의 모든 계시인 듯이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룻의 가치를 효부로서의 행위에 두듯 그들의 신앙이 육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행위 중심의 신앙에 속했기 때문에 룻기를 고작 그런 성경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보시는 분이 아니신데, 자기 안목이 궁색하다고 갑자기 룻기만을 효부 룻의 행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라고 전개하는 것은 기만에 가깝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룻기 역시 룻의 행위를 교훈 삼으라고 성경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접근이고 성경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이다. 룻은 룻의 행위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스스로 구하는 신앙에서 순종적인 신앙으로 거듭나는 것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온전한 관점이다. 물론 이 관점은 그렇게 볼 수 있는 생명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룻기의 시작을 보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흉년을 이유로 이방인의 땅으로 이주했다. 그것도 모압 땅으로. 모압이라는 족속이 어떤 족속인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롯과 룻 이름이 비슷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피하려 산에 올라 동굴에 거하는 중에 그 딸들이 아비 롯을 취하게 하고 동침하여 큰 딸이 낳은 아들의 후손이 모압이다. 이것이 룻기의 시작에 명시되었다는 것은 모압이라는 정체성과 룻기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흉년을 이유로 모압으로 갔다는 것도 모압이라는 족속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성경에서 흉년이나 가뭄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흉년을 이유로 떠났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흉년을 피해 양식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식이 육신의 양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몰라도.


그런데 그 하나님의 양식을 찾으러 간 곳이 다름 아닌 모압 땅이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후사를 잇겠다고 아버지의 씨를 훔친 결과 태어난 족속인 모압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양식을 얻고자 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엘리멜렉의 꿈은 사라지고 오히려 자신도 두 아들도 모두 죽고 말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 어떤 원인으로 죽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설명할 이유가 없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는 내용과 형식으로 설명된다. 내용은 남자로, 형식은 여자로 늘 비유되어 말씀하신다. 남자가 다 죽었다는 것은 이제 내용 곧 의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업을 이을 후사가 이제 없다는 것이다.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압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을 설득할 때에 지금 관점으로 보면 낯 뜨거운 말임에도 자신이 두 며느리에게 다시 장가갈 수 있는 아들을 낳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모압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는 세계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다. 그러므로 아들이나 남자가 죽은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많은 교회가 어떤 행사, 어떤 수단, 어떤 건물이나 시설 혹은 악기가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내용 없이 형식만 갖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는 남자나 아들 곧 하나님의 의가 없고 그냥 형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좀 더 모압이라는 세계를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롯의 두 딸이 자기들 생각에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은 없고, 남은 하나님의 백성인 남자는 자기들의 아비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끊이지 않게 하려면 아버지의 씨를 훔쳐서라도 후세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결과 낳은 아들, 곧 신앙의 세계이다. 즉 사람이 ‘이래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가 잘 될 수 없다.’며 스스로 방법을 도모하는 모든 것이 바로 모압의 세계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순정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결하고, 자신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려는 것은 모두 모압인 것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고 모압으로 갔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구하고 얻고 심지어 만들어 내려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이 말씀이 사사기와 다윗의 시대 사이에 있던 일인가?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흔히 교회라 하는 곳에 넘치고 넘치는 일이다. 성경은 바로 그곳에는 아들이 다 죽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아니 죽었다고 하신다. 즉 그런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룻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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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10-32) 제자들의 배신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25. 11:45 Writer : 김홍덕

향유옥합 사건은 계속 이어져온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괴리를 증폭시켜 현현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향유옥합 사건을 보고 이 예수는 육신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확신하고 결정을 내린 것은 가룟유다였다. 그가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팔아 넘겼다는 것은 자신에게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존재로 정리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외형적으로 동일한 배신 같아도 베드로는 그 마음에 끝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놓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과 개념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와 다르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고 그것을 알고자 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자리까지 따라 갔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인 배신의 모습이 단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쉽게 이야기 한다. 의리 없는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그러면서 그나마 그들이 그것을 돌이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의 배신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른 그리스도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 곧 육신의 문제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처한 정치 사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그들이 믿고 기대한 그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예수님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는 존재라고 말씀을 하시니 이 괴리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괴리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배신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 아들이라는 그 존재가 자신들을 버린 것이다. 그릇된 개념의 하나님 아들이 자신들을 버렸고 그렇게 버림당한 자신들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실 때 그 하나님이 바로 제자들이 스스로 만든 우상이자 하나님인 그들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즉 자신들은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세상의 문제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 그렇게 믿었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니 그들이 믿었던 메시아에게 그들은 배신을 당했고 예수님을 자신들이 생각한 메시아라고 믿었는데 그런 존재가 아니니 그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배신이라기보다 오히려 고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요한복음 21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 스스로가 예수님을 육신의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고 3번이나 고백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제자들과 같은 과정이 있느냐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느냐에 대한 묵상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교회에 가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과 같이 흙으로 지음 받은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지,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하여 자기 육신이 수고하고 소비되고 심지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기도하는지, 아니면 그와 반대로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도모하는 일의 성공과 자녀를 비롯한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이긴 자가 되기를 기도하는지 돌아볼 일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배신이 고백으로 보일 것이고,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배신이 육신의 안녕을 위하여 배신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 사이에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묵상하고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앞에 솔직할 수 없다면, 그래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고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히 신앙의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니라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생은 그 자체로 허무한 인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향유옥합 사건을 통해서 자신들이 기대한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찬 중에 예수님께서 누구 하나가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할 때 모두 자신이 아닌가 염려했다. 그들은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혼돈 가운데 있었다. 마치 창세기 시작처럼.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이때까지 부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랬는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찔림마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들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것이 더 문제인 것이다. 정말로 제자들과 같은 마음이 들었다면 아마도 죽고 싶을 만큼의 심적 갈등과 고난의 여정을 겪을 것이다. 그게 하나님이 만든 사람의 온전함이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겪는 갈등과 괴로움을 이것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다.


성경은 모두 언제가 되었든 그것을 읽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아,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신의 모습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들이자 그리스도가 같은 모습인지를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개념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을 기대하신다. 육신과 세상을 살 동안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얻고 이루는 것을 은혜와 성공이라고 여기며 그 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과 그 문제 해결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관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자리를 떠난 죄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이다. 


이것을 알고 보면 이 제자들의 부인함과 배신은 그들의 흑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르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비추어보게 하는 거울과 같은 말씀이다. 제자들의 부인과 배신이 오늘 나에게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담보하는 존재가 그리스도라 굳게 믿었던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부인, 그렇게 덧입혀 놓았던 예수님을 부인하는 과정 없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기에 오늘 우리도 그러한 부인함과 배신이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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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5(15:1-5) 유대인의 왕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21. 17:52 Writer : 김홍덕
왕은 맘대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 DNA에 이끌리듯, 의에 이쓸리고 의가 나타나고 의가 다스리는 존재다 그 의가 바로 하나님의 의고, 그리스도 일때 유대인의 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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