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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1-11) 향유옥합 - 3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5. 05:00 Writer : 김홍덕

늘 함께 있는 가난한 자들


예수님께서 여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난한 자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가난을 해결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가난이라는 것은 사회 구성의 일부이지 척결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다.(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그래서 이해하는데 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한 사항이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로 가서 대업을 이루러 가시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들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것은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무능함인가?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가난하든 말든 무관심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육신의 어떠함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본다는 것이다. 속 심령을 보신다고 하심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사도들 그 누구도 오늘날 교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없다. 육신은 영적 상태와 무관하게 가난할 수도 부유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식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너희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의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지금 향유옥합이 깨어지고 향기가 넘쳐나는 사건은 예수님의 몸이 깨어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의미이지 이 향유로 가난을 해결하는 관점과 같이 그리스도가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직임을 가진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육신의 어떠함은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직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의 어떠함, 그것이 경제적 상황이든 건강에 관한 것이든 그것은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일의 부속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그리스도로 할 수 있고,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향유옥합사건이 한 여인이 전 재산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감동적인 그러나 단편적이고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것이 그렇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 인식은 당연히 생명에 종속된 것이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은 본성으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충돌과 그것에 대하여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으로 밝히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듭난 생명이 되라는 말인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있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 내가 거듭나야 하는 것이구나!”라고 듣기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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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1-11) 향유옥합 - 2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4. 05:00 Writer : 김홍덕

세상의 왕


우선 사건은 여인이 자신의 모든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향유가 들어 있는 작은 옥합(이스라엘 여인들이 결혼자금으로 모아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하는)을 깨뜨려서 그것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다른 성경에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었다는 것이 사건의 형식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해져서 사건이 구성되어 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참관인들의 모습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모든 관심사였다. 그래서 이 여인의 모습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한가지였다. 그들은 그 비싼 향유를 무슨 이유로 이렇게 어이없게 허비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어이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 정도니 삼백 데나리온은 한 마디로 1년 연봉인데 그 많은 돈을 발에 쏟아 부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는가?


그들이 놀라운 것은 어쩌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대척점으로 이동하신 것이 문제다. 그냥 두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 이상하고 어이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오히려 귀한 일이고 예수님의 일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이 일이 전해질 것이라고 하실 정도로 귀한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것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발생한 일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임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신 뜻이 이루어진 사람의 모습이라는 예수님의 생각 그 차이인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가치 앞에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육신을 드리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것이다.


향유를 그렇게 쓸 것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가진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든 선지자든 하나님의 아들이든 그 누구라도 그들의 존재 이유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이다. 옥합 안에든 향유든 예수님의 능력이든 결국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은 바로 그것을 위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변화산 사건 이후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맞서는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이긴 자’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도 교회에서 늘 보는 일이다. 아니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가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가서 듣는 설교가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세상에서 평안과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것 아닌가? 세상에서의 평안과 영광이라는 기준은 당연히 세상의 가치에 터 잡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평안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교회가 장사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것이라고 하셨다. 세상에서 말하는 등 따시고 배부른 평안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볼모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엄연히 장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괜히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화를 내신 것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믿어서 얻는 귀한 것이 세상의 평안과 성공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 가치관이 향유옥합을 팔아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가치관과 동일하게 세상의 기준에 의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이 여인의 일이 함께 전해질 것이라고 하심도 궤를 같이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해야 한다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즉 향유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복음을 전해 들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늘 있다. 향유옥합이 깨어지던 자리에도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도 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를 이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것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고 믿는 하나님과 대척점에 있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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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1-11) 향유옥합 - 1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3. 07:27 Writer : 김홍덕

향유옥합 사건의 이면


변화산 사건 이후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봐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시각이 전혀 달랐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환호하던 백성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믿었고 기대했다.


그리스도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여겼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놀라운 능력이 당시 로마의 속국 상태였던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함은 물론 모든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견해는 가장 먼저 가룟유다에서부터 무너졌고 다음으로 제사장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백성들에게서 끝장났다. 그들의 조롱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제자들도 이것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까지 베드로가 칼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베드로는 열심당이라는 당원이라는 것을 자라 알려져 있다. 열심당의 정체는 모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구한말 독립군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치된 견해다. 그리고 그들의 상징이 품속의 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순간에도 열심당원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인 정치적인 문제를 기대하고 도모하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군인들에게 잡혀가시니 모두가 도망 가 버린 것은 그들이 기대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사라졌음을 인함이다. “잡혀갔는데 어떻게 독립을 도모할 것이냐?”로 압축될 것이다. 다만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그런 마음들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가시겠다고 하신 갈릴리로 왔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이다. 갈릴리로 갔다는 것은 낮은 자리로 갔다는 것인데, 일반적인 사람의 개념으로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낮아질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전면적인 충돌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세상의 모든 가치 기준으로 이기고 높고 강하고 문제없이 평안한 존재여야 한다는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아들은 종과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하나님의 생각 간의 갈들이 임계점에 이른 시간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임계점이 십자가사건으로 끊어지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쏟으신 물과 피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지나 자신의 존재 정체성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아니 그런 사람만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바로 이 흐름 위에 예수님께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자의 일이 있는 것이다. 즉 향유 옥합의 사건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충돌이라는 내용 위에 불거진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사실 이 사건은 상당히 난데없는 그런 사건이다. 물론 그 여자가 나사로의 누이라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에 자기 오라버니를 살려주신 분에 대한 감사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본질이라면 나사로가 살았을 때 옥합을 깨드리는 것이 더 맞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한참이 지난 지금이냐의 문제에 답하기 어렵다.


이 향유옥합 사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이 사건이 전해질 것이라고 하신 것은 정말로 큰 의미가 있다.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 사건 전반은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질 때 일어나는 일들을 함축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물론 예수님의 장사 곧 예수님의 죽음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는 향유옥합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일면들이 신앙의 다양한 모습이자 단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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