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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왜 종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을 떠나 자신의 신앙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과 같이 세상 기준으로 좋고 위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것이 안 되면 어떤 복음도 의미가 없다. 성경은 바로 그렇게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의 이야기인데, 예수님을 빌어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반대로 가는데 성경의 무슨 말씀이 그와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의 의와 다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시작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신앙을 가진지 50년, 100년이 되었다고 해도 아직 시작도 안한 것이다. 그것이 시인이 되고 나면 이때까지 자신이 다니던 것과 같은 대부분의 교회의 강대상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하게 서 있는 곳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목사라는 그 신분이 세상이 사람의 능력을 검증하는 그 기준으로 쌓은 공적의 자리아닌가? 시험치고, 육신으로 얼마의 능력을 보여서 좋은 교회에서 일했는지가 청빙의 기준 아닌가? 그 기준이 무엇인가? 세상의 가치관이 가진 기준 아닌가? 그렇게 목사가 되었으니 당연히 강대상에 서서 성경을 남보다 더 잘 지키면 세상에서 더 복을 받을 것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심지어 천국에 가면 고래등 같은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천국에 고래등 같은 집이 왜 필요한가는 생각해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이와 같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는 것은 단순히 불순한 것이 거룩하고 고상한 척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자기 신앙의 본질적 정체성의 문제이다. 자신이 멸망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은 자신이 이때까지 유지한 삶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본질적인 의미이다. 그것이 종말인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이 보이면 종말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보이려면 멸망과 거룩함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것이 체휼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그 가치와 본성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종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종말이 보인다면 그것은 놀랍게도 구원의 확신이다. 자신이 이날까지 세상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고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거듭난 생명이 되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상의 가치로 귀하고 좋은 것을 하나님께 얻으려고 외치고 있는지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로 낮아져서 죄인이 되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어서 그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얼만 만연한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 매트릭스에서 알약을 먹은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엉터리로 예수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자신의 신앙이 멸망의 가증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면 분명히 그곳을 떠날 것이다. 그것을 알고 그 신앙 안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이 교회를 떠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앙의 의를 바꾸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낮아지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을 좇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를 바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아는 그 하나 만으로 세상을 살면서 인지하는 모든 것을 인하여 자기 속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듯 하나님을 알게 됨이 넘쳐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생명이란 것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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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다는 것


이와 함께 거룩하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의가 다른 것이라면, 그것이 거룩한 곳에 있을 수는 없다. 거룩함과 멸망은 어울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의도하심과 다른 존재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수술실에 쓰레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거룩함이라는 것은 ‘깨끗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은 “구분”이다.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민주국가에서 공산주의 간첩을 분리하듯 구분하는 것이 바로 거룩함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의가 같은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의가 같은 존재여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하나님과 의가 같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의가 같은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다는 것은?


그러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의가 다른데 하나님처럼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의가 다른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을 일회용 소비재로 주셨는데 육신이 평안하고 보전되며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하나 것이 거룩한 곳에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의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기는 신앙과 믿음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상태인 것이다. 강단에 서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자식이 잘되며 건장하고 장수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면 황금보화를 누릴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의 상징인 것이다.


하나님과 생각, 무엇보다 ‘의’가 다른데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는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는 것 그것이 바로 멸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회칠하고서 심지어 그것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라고 전하는 것이야 말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왜 하나님과 다른 생각인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신앙의 목적, 더 나아가서 자기 삶의 목적과 지표를 그것에 두는 것이 문제다. 성공이나 평안은 삶의 부수적인 산물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육신을 주신 목적일 수는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실패자이다. 사람의 육신은 다 늙고 그리고 죽기 때문이다. 사실 이 하나만 봐도 우리의 육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회용 소비재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믿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이 상했고 못 박혀 죽으셨다. 그 예수가 바로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신분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죽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을 인하여 사형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형수, 즉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지금 당장 없어져야할 정도로 쓸모없는 존재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하고, 심지어 주를 위하여, 주와 함께 죽겠다고 기도한다. 그러면서 사람들과의 작은 대화 하나에서도 지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 하나님을 스스로를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날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절대로 지지 않으려 한다. 종이나 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심판? 그런 것은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게 예수님이 가신 길과 같은가? 그렇지 않다.


세상의 가치로 완전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그렇게 세상의 가치로 완전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렸더니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라는 의미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이시기 위해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심이 바로 이런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의 가치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의 가치로 귀하고 좋다는 것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세상의 모든 가치기준으로 좋은 것으로 교회를 치장하고, 교인들이 그 열매를 얻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라 찬양까지 한다.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것인가? 이건 성경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다. 자신이 의지하는 주의 정체성과 전혀 다른 것을 구하는 괘씸한 행태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가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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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다른 멸망의 기준


사람에게 멸망을 논한다면 단연 죽음이 가장 큰 멸망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멸망의 대명사는 곧 죽음이고, 죽음의 다른 의미가 멸망인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도 다르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멸망은 결국 사망이다. 그리고 그 사망은 육신의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과 멸망이 육신에 관한 것이라면 죽음이 정해진 사람에게 구원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멸망이나 사망을 논하는 것은 육신의 호흡에 관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나 멸망은 다른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육신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육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육신의 어떠함에 수렴한다. 


하나님께 얻고자 하는 것, 흔히들 은혜라고 하고 얻었다고 여기면 감사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가에서 그것을 구분할 수 있다. 만약 솔직하다면 자신들이 은혜나 감사로 여기는 것은 대부분 건강이나 사업의 성공이나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들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의 어떠함을 신앙의 척도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앞서 사망과 멸망의 기준이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대입해 본다면, 기쁘고 감사한 기준이 육신에 있다고 하는 것은 사망과 멸망을 육신의 일로 본다는 의미이다.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를 기쁘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 육신의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분명히 기준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사망과 그 일의 멸망을 사망과 멸망으로 보지 않는데, 사람들은 육신의 일을 기준으로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다른 기준? 그것이 곧 사망과 멸망


사람들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하여 존중이 미덕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도 “의”에 관한 것은 좀 다른 문제다. 나라의 근간인 “의”가 다르다는 것은 간첩이나 국가 전복을 도모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형법 중에 유일하게 의도만으로 처벌 받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적인 문제가 된다. 즉 하나님 앞에서 “의”는 절대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고, 의가 다르면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한 사망과 멸망이 무엇이냐를 가늠하는 기준이 육신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성경이 가진 다른 기준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그 기준이 같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 죽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차피 다 멸망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남들과 달리 절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이 멸망과 사망에 대하여 다른 기준을 가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사망과 멸망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지만 은혜와 축복에 관한 것은 같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은혜와 축복은 같은 선의 양 끝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이라는 것은 바로 기준이다. 그리고 기준은 의에서 비롯된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안에는 동일하게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그 기준은 명확하게 다르듯, 하나님의 기준에도 사망과 멸망 그리고 은혜와 축복이 있고, 사람의 기준에도 사망과 멸망 그리고 은혜와 축복의 개념이 있다. 


그것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사망과 멸망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은혜와 축복은 사람의 기준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선과 민주주의의 악을 묶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간음이다. 본질이 다른 것을 혼합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서의 성공을 은혜로 여기는 것이 간음인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의 중함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과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면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일 뿐 아니라 오히려 적과 같고 원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망과 멸망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망과 멸망 그리고 죄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분명히 의도한 바가 있을 것이다. 하물면 사람도 의미나 목적 없이 무엇을 만들지 않는데 하나님은 더더욱 그렇다. 아울러 사람이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일을 하고 무엇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 그리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람도 쓸모없는 것은 다 버린다. 따라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사망이다.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멸망이고 사망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멸망도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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