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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잔을 옮길 수 있으면 옮겨달라고 기도하시면서도

십자가로 가신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의무감에 대한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생명의 본성, 그것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 역시 그런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져

그 본성을 인하여 그렇게 괜히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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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1-11) 향유옥합 - 5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7. 05:00 Writer : 김홍덕

가룟 유다의 배신


이 향유옥합 사건이 가진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이자 이 사건이 가져온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룟 유다의 배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12제자는 모두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라 믿었다는 점에서 다른 점이 없지만 이 향유옥합 사건을 계기로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결이 다르다는 것이 나출(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다)된 것이다. 가룟 유다는 향유옥합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될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깨달은 제자는 어이없게도 가룍 유다였다. 문제는 아니란 것은 알았는데 그러면 누구인가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단 가룟 유다 뿐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하던 백성들 모두가 이 시간까지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가난을 해결하는 그런 왕, 세상의 그리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시자 가룟 유다는 그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다면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겼다는 것은 사뭇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세상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은 확인하고 대제사장을 찾은 것이다. 세상의 왕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들도 아니고, 설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왕이 되지 못할 능력이나 말씀이라면 그것의 가치는 고작 은 30 그러니까 종의 몸값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육신은 고작 노동에 사용되는 육체로서의 가치 그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돈에 예수님을 넘긴 것이다. 


이를 대제사장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반가운 일이다. 앞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 서기관을 꾸짖으신 일, 과부의 헌금으로 자신들을 비난했던 그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상의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기에 죽이고자 하나 민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와서 예수님을 넘기겠다고 하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이상 세상의 왕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더욱이 세상의 왕이 아닌 예수의 가치로 육체의 힘을 쓰는 종과 같은 가치로 쳐 주는 것에 만족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향유옥합의 사건은 이래저래 예수님의 장사를 기념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LOGOS)이 형식 곧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난 첫 아들이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의 육신은 하나님의 로고스가 담길 그릇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신 육신을 그저 노동력이라는 가치로만 간주하는 생각이 바로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보는 사람들의 생각인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아니고 그 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를 구현할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은 의미가 없고,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의가 담긴 육신은 그저 노동력을 가진 육체 그 이상의 가치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이 바로 가룟 유다의 모습


문제는 그런 생각이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이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내면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이 그것이다. 세상에서 이긴 자, 곧 왕과 같이 육신의 삶에서 만나는 문제와 상황을 세상의 가치로 이긴 자가 되기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내어 놓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는 공로와 업적과 정성을 하나님께 드려서 세상의 가치로 이긴 자가 되는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면 하나님을 기만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으로 무덤에 회칠하듯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단지 선지자 노릇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의 가치로 이긴 자가 되려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수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믿는 가치관을 가졌다고 오히려 예수님을 종의 몸값에 팔아넘긴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바로 육신의 가치는 노동력 곧 수고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놀라운 점이다. 육신으로 수고하는 것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육신의 가치를 은 30으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 곧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법은 육신의 수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왕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육신을 노동의 가치 밖에 없다고 여기면서 오히려 자기 그 육신으로 수고하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어 더 어이없게도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말도 되지 않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모순에 빠져 있다 보니 모든 것이 또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어두움에 속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어두움 속에 있다가 보니 뭔가를 알려고 신학과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룟 유다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가룟 유다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향유 옥합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예수님을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신앙과 생각이 드러나는 사건인 것이다. 향유옥합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여 사람들 안에 있는 본심을 드러내게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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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1-11) 향유옥합 - 4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10. 6. 05:00 Writer : 김홍덕

깨어진 옥합 그리고 향기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린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애도하는 뜻으로 그랬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죽을 사람을 위해서 자기 전 재산을 한 순간의 의식으로 드리는 감동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종말로 귀결되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인하여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가 드러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난다는 것은 이전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 속에 있던, 육신이 된 그 말씀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보는 사람에게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는 의미이다.


향유옥합이라는 것은 작은 질그릇, 곧 흙으로 만든 작은 병 안에 귀하고 귀한 향유가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 향유옥합이 깨지면 당연히 그 안에 있는 것이 쏟아질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향유 곧 향수와 같이 향기를 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주워 담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향기가 진동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가두어지지 않고, 어떤 곳이라도 향기는  전해질 것이다. 그것이 향유요 향기다. 그것이 질그릇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람을 질그릇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늘 말씀하시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은 무엇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은 형식이고 그 안에 무엇이 담겨짐으로 그 정체성이 완성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향유옥합 사건은 바로 사람의 이러한 정체성에 바탕을 둔 사건이다.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이 옥합이 깨어지듯 십자가에 달리시면 옥합 속에 있는 향기가 퍼지듯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하나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드러날 것임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이 옥합이 깨어지듯 깨어지니 하나님 아들, 하나님의 말씀(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니)이 드러난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육신이 세상의 가치 앞에서 깨어지듯 낮아지므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육신이 깨어지듯 낮아진다는 것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여 높게 만드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시각과 안목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이유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창에 찔리시니 물과 피가 나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명제(命題)화 하였지만 왜 피가 우리를 하는지는 모른다. 단지 <죄는 우리가, 벌은 예수님이>라는 논리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물은 말씀을 상징하고,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더니 물과 피가 나왔다는 것은 말씀과 생명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옥합이 깨어지니 향기가 넘쳐나는 것 같이.


예수님의 몸에서 물과 피가 나왔다는 것이 말씀과 생명이 드러났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질그릇을 깨니 그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났고, 또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정체성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과 생명은 바로 십자가와 일치하는 것이다. 육신을 세상의 가치 앞에 죄인이 되어 내어주니 말씀과 생명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 앞에 육신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니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의(말씀, LOGOS-계획)와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은 세상의 가치 앞에 육신을 깨뜨리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사람을 지으신 뜻이자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심령이 있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그 본성을 인하여 자신을 내어 줄 수밖에 없는 길로 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아들은 아버지의 뜻이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이다.)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이 향유옥합 사건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의 표현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는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놀라운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괴리를 극복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뜻도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며, 돌로 떡을 만들고, 세상의 가치로 이긴 자, 성공한 자가 되는 것이라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생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본질이 무엇이지를 말씀하시는 사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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