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다는 것


이와 함께 거룩하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의가 다른 것이라면, 그것이 거룩한 곳에 있을 수는 없다. 거룩함과 멸망은 어울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의도하심과 다른 존재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수술실에 쓰레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거룩함이라는 것은 ‘깨끗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은 “구분”이다.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민주국가에서 공산주의 간첩을 분리하듯 구분하는 것이 바로 거룩함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의가 같은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의가 같은 존재여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하나님과 의가 같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의가 같은 존재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다는 것은?


그러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의가 다른데 하나님처럼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의가 다른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을 일회용 소비재로 주셨는데 육신이 평안하고 보전되며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하나 것이 거룩한 곳에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의외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기는 신앙과 믿음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상태인 것이다. 강단에 서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자식이 잘되며 건장하고 장수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면 황금보화를 누릴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의 상징인 것이다.


하나님과 생각, 무엇보다 ‘의’가 다른데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의가 다르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는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는 것 그것이 바로 멸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회칠하고서 심지어 그것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라고 전하는 것이야 말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왜 하나님과 다른 생각인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신앙의 목적, 더 나아가서 자기 삶의 목적과 지표를 그것에 두는 것이 문제다. 성공이나 평안은 삶의 부수적인 산물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육신을 주신 목적일 수는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실패자이다. 사람의 육신은 다 늙고 그리고 죽기 때문이다. 사실 이 하나만 봐도 우리의 육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회용 소비재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믿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신이 상했고 못 박혀 죽으셨다. 그 예수가 바로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신분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죽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을 인하여 사형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형수, 즉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지금 당장 없어져야할 정도로 쓸모없는 존재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하고, 심지어 주를 위하여, 주와 함께 죽겠다고 기도한다. 그러면서 사람들과의 작은 대화 하나에서도 지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 하나님을 스스로를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날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절대로 지지 않으려 한다. 종이나 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심판? 그런 것은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게 예수님이 가신 길과 같은가? 그렇지 않다.


세상의 가치로 완전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그렇게 세상의 가치로 완전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렸더니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라는 의미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이시기 위해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심이 바로 이런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의 가치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의 가치로 귀하고 좋다는 것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세상의 모든 가치기준으로 좋은 것으로 교회를 치장하고, 교인들이 그 열매를 얻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라 찬양까지 한다.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것인가? 이건 성경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다. 자신이 의지하는 주의 정체성과 전혀 다른 것을 구하는 괘씸한 행태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가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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