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구원의 주님이시자,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앞서서 구원이 어렵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앞서서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며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이 쉽고 가벼운 것은 어떤 존재든지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서 목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먼저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모순이자 허구성을 짚어 보면, 세례 문답에 답하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신앙 등 여러 가지로 구원과 무관함을 말할 수 있겠으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을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그것이다.(물론 그것은 증거로 나타난 것이고, 본질은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도할 때 마다 회개로 시작한다. 죄가 있다는 것을 늘 자인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자신이 받지도 못한 구원을 아주 쉬운 것이라고 여긴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쉽다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존재 목적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쓰이고 살아갈 때 가장 쉽게 사는 것이다. 자동차 브레이크는 자동차를 세우느라 엄청난 열이 날 뿐 아니라, 자신이 닳아 없어지지만 그것이 브레이크의 존재 이유고 살아가는 삶이기에 브레이크에게 그것보다 쉬운 것은 세상에 없다. 만약 브레이크가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게 하려 한다면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완전한 하나의 공학과 공장과 산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인생들에게 보이시려 하신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가 우리 존재의 목적이란 말씀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쉬운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단 말씀은 사람이란 존재가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구원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목적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자신이 생각할 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좇아 사는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가장 쉬운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온전히 알면 예수님께서 쉽다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녀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간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 좋은 결과는 쉬운 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쉽고 가벼운 일이다.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쉬운 일이고 가벼운 짐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구원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거듭남도 말로 되는 것으로 안다. 성경에서 거듭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만 인정하면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자. 다른 생명으로 났다는 뜻이다. 생명이 달라졌다면 삶이 달라지고 무엇보다 본성이 달라져야 한다. 본성이 달라지면 가치관과 안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전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거듭남이다.


그런데 구원 받기 전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바랐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다음에도 동일한 것을 구하는데 그것을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기 전에는 자기 힘을 믿고, 또 세상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필요하면 불법적인 것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육신의 평안과 안녕과 같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의 주관자로 믿는다.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 이런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런 신앙과 믿음은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것이 아니다. 구원 받기 전, 교회에 다니기 전,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구원 받은 다음이나 원하는 목표는 같으니 거듭난 것도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다. 썩은 고기를 좋아하고 먹는 늑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변화 다음에도 썩은 고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을 두고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거듭남은 이렇게 엉터리다.


공부하면 좋은 미래를 보장 받는 것은 쉬운 것이나 공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진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다.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다. 존재로서 존재 목적대로 사는 것이므로 쉽고 가볍다. 문제는 공부하는 것이 힘들 듯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힘들다.


육신의 정욕, 곧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늘 소망하는 사람이 육신의 정욕이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형식이자 도구며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어려운 것만도 아니다. 자신이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사하신다는 것이 약속이다. 


그러므로 돌이킴은 행위에 대한 반성과 돌이킴이 아니다. 행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고서 또 다시 행위로 범한 죄를 회개하는 반복이 사함 받고 구원 받았다면서 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더욱이 행위는 본질도 아니다. 행위는 속에 있는 의와 생각과 가치와 철학의 표현이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인 삶의 목적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구원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되겠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인생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를 하나님께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알려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다.


구원은 엄청 어렵지만 구원 받은 삶은 너무 쉽다. 현재의 삶을 늘 곤고하다, 인생은 힘들다, 괴로운 인생길이라 말하며 사는 인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존재가 존재 목적 아닌 것을 좇아 사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힘들다. 반대로 존재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은 다른 존재가 보기에 힘들 것 같아도 편안하다. 브레이크가 항상 열나고 마찰을 받아도 차를 세우는 것에 사용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을 믿고 알고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구원은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목표를 바꾸는 것이다. 높은 곳을 앙망하다 뒤로 돌아서는 것과 같다. 돌아서는 것은 하등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높은 곳을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돌아 설 수 없다. 그럴 수 없다면 구원은 한 없이 어렵다. 그러나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모든 것을 주신다. 사람이 육신의 가치를 앙망하면 구원은 하염없이 어렵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낮은 곳을 앙망하면 쉬운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죄 - 하나님이 보시는 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9.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죄를 사하고 구원한다고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떳떳하게 “나는 죄가 없다”라고 예수님과 같이 말해야 정상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죄사함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다. 죄사함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죄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말이다. 죄가 다르니 당연히 사함에 대한 관점도 다른 것이다. 결론적인 부분을 먼저 언급하면 하나님은 존재를 죄의 기준으로, 사람은 행위로 죄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앞서서 계속 설명한 바와 같이 죄는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 다. 그런데 성경의 수많은 구절에서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 께서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 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보고 죄를 판단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여기서 큰 착각을 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상도 벌도 주신다고 착각한다.


하나님이 행위를 보고 심판하시는 것 같지만 행위는 그 속에 있는 것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신다.


하나님은 행위를 보시고 심판하거나 죄를 물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행위는 존재의 본성에 종속된 것임을 아신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은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이 나타난 것이지 절대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죄로 여기고 심판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행위는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서 떠난 심령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시기에 사람이 볼 때는 행위로 심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 괜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사람도 다른 사람의 본심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한다. 결국,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로 나타난 본성, 그 존재성을 보신다.


하나님이 가지신 죄의 정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하나님의 법이 이런 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神)이기 때문 이다. 하나님의 모든 기준이 존재의 정체성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실 때도 무엇을 했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를 보신다. 어떤 존재, 어떤 생명인지만 정해지면 행동은 다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하시지 않고 “네가 어디에 있느냐?”를 물으신 것이다. 여기서 ‘어디’는 장소 where가 아니다. 정확히는 “너의 정체성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너는 이제 누구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을 볼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도 같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 앞에 하신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고,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어떤 관계, 어떤 존재로 보는지를 물으신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선악과를 먹은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리를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 것이다.


아담에게 하신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물으시는 질문이다. “너는 너의 존재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두고 있느냐?” 물으신 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가 그것이라면 사람의 죄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에 있으면 선하고, 그렇지 않으면 악한 것이다.


사람도 자기 물건을 목적대로 쓰기 위하여 자리를 정해서 두었는데 누가 옮기면 화를 낸다. 그런데 세상의 만들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을 살아 있는 존재로 보실 리가 없다. 그래서 단호하게 죄와 사망에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정한 존재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죄다.

'주제별 성경 보기 > 질그릇의 선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 - 행위규범 vs. 존재규범  (0) 2020.09.14
죄 - 법이 바뀌어야 만족  (0) 2020.09.13
죄 - 구원과 죄사함  (0) 2020.09.08
육신 - 감사  (0) 2020.09.02
육신 - 육신의 희생  (0) 2020.09.01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죄 - 구원과 죄사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8. 04:00 Writer : 김홍덕

사람의 삶에서 죄는 불가분이다. 그래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한다. 누구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다르게 말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죄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상은 세례받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넘쳐 나지만, 그중에서 자신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들다.


이것은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앙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듯하다. 성경은 구원받으면 죄가 없다고 하는데 구원받았다면서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죄 없다 말하는 것을 터부시한다. 더욱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서로가 그 본심은 숨기고 다들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고 하니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대중성에 자기 영혼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제일가는 목적이 구원이고 죄사함인데이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뚜껑을 덮어 가리듯이 그냥 가면 안 된다. 자신을 돌아보아 죄 없다 할 수 없으면 죄인이다. 이건 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명제다. 그렇다면 당연히 구원도 받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믿지 못하면서 구원은 받았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더 나아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뻔뻔하게 자신은 구원받은 하나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죄를 사함 받아 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 중의 근간이므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 는데 정작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양심 있게 고백하고 이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도 저도 선택하지 않고 구원은 받았는데 죄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다만 노력할 뿐”이라는 변명 같은 말로 상황을 덮고 대충 살면안 된다.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죄 없다 말하지 못하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


혹시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모든 논란은 종식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거짓말이면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을 필요 없다. 거짓말하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은 명백한 시간 낭비, 인생 낭비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분명히 사람이 하나님과 죄에 대하여 사함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다. 구원받았는데 죄 없다고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견해가 다르다는 뜻이다. 사실 죄에 대해서만 하나님과 사람이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하나 님의 정체성과 사람의 육신과 인생에 대해서도 하나님과 사람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은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성실이다.


육신에 대한 견해가 그렇듯 죄에 대하여 또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것은 죄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했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것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당연히 죄인이다. 죄인이니 죄사함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 하다. 하나님의 영을 담을 그릇이 죄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생각, 다른 견해, 다른 가치를 가졌다는 것은 자리를 떠난 것이고 죄그 자체이다.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스스로 죄책 감을 떨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고 깨어 있는 삶을 살 뿐”이라는 말은 죄일 뿐, 겸손도 신앙도 아니다. 그렇게 숨기고 싶은 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속사람의 정체가 들통난 것이다.

'주제별 성경 보기 > 질그릇의 선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 - 법이 바뀌어야 만족  (0) 2020.09.13
죄 - 하나님이 보시는 죄  (14) 2020.09.09
육신 - 감사  (0) 2020.09.02
육신 - 육신의 희생  (0) 2020.09.01
육신 - 관점의 회복  (0) 2020.08.31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